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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투쟁이 전설로 묻혀서 되겠나, 그래서 나섰다”

이상한 나라 조회수 : 323
작성일 : 2008-08-28 12:49:39


“독립투쟁이 전설로 묻혀서 되겠나, 그래서 나섰다”  



경향신문  기사전송 2008-08-28 09:34 | 최종수정 2008-08-28 09:34



ㆍ윤봉길 의사 친손녀 윤주경 언론 첫 인터뷰
올해는 매헌 윤봉길 의사의 탄신 100주년. 스물네살 청년이던 윤봉길은 1932년 4월, 일왕의 생일날 중국 상하이 홍커우공원에 모인 일본 수뇌부들에게 폭탄을 던져 당시 중국 지도자 장제스로부터 ‘4억 중국인이 해내지 못하는 위대한 일을 했다’는 찬사를 받았고, 일제의 압박에 시달리는 우리의 아픔을 세계에 알렸다. 100주년을 맞아 중국에서도 학술대회가 열렸고 12월엔 일본에서 일어판 평전도 출간될 예정이다.



하지만 친손녀인 윤주경씨(50·광고회사 대지 이사)는 그 어느 해보다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다. 뉴라이트전국연합에서 윤봉길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가 하면 매헌기념관이 있는 양재동 시민공원의 명칭을 매헌공원으로 바꾸려는 계획도 고승덕 의원 등이 반대하고 나섰고, 지난 6월 고향 예산에서 열린 100주년 기념행사가 노래자랑과 음악회 일색이어서 그의 애국정신을 기리는 프로그램을 찾기 힘들었다는 비난을 받았다. 또 올해부터 뜬금없이 광복절이 건국절 행사로 변하고 이승만 전 대통령에 대한 우상화 등 달라진 세태도 당혹스럽다. “어떤 억울한 일이 있어도 절대 조국에 서운함을 가져서는 안된다”는 할머니의 말씀 때문에 윤주경씨 가족은 “윤봉길 의사는 직계자손이 없다”고 소문이 났을 만큼 조용히 숨죽여 살아왔다. 할아버지가 워낙 유명한 독립투사란 자부심으로 살았고, 대학교육도 받아 다른 유가족들에 비해서는 나라에서 혜택을 받았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뭔가 이야기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윤봉길 의사를 비롯한 독립투사에 대한 인식이 너무 희미해져가고, 다른 유가족들의 생활이 열악하다못해 비참하기 때문이다.

역사가 잊혀지고 전설이 되는 것이 안타깝다

-지난 6월9일 매헌공원 추진위원회 발대식이 열렸는데 8월1일 고승덕 의원이 윤 의사가 서초구와 아무 연고가 없다며 매헌공원으로 바꾸지 말라고 서울시에 공식 요청을 했더군요.

“김덕룡 전 의원(매헌 윤봉길의사 기념사업회 명예회장)을 비롯한 많은 분들이 10년 전부터 ‘윤봉길 의사의 위대한 나라사랑과 겨레사랑의 정신을 계승하자’며 매헌타운을 추진해 왔습니다. 그래서 20년 전에 세워진 매헌기념관을 중심으로 길 이름도 매헌로로 부르고 올해 매헌초등학교도 개교됐어요. 연고를 따지는데 그렇다면 충무로와 이순신 장군, 을지로와 을지문덕 장군, 도산로와 안창호 선생 사이에도 아무 연고가 없죠. 양재 시민의 숲으로 익숙해져 있다고 해도 매헌공원으로 바뀌면 어린이들도 ‘매헌이 무슨 뜻이냐?’고 물어 자연스럽게 윤봉길 의사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다른 분들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 좋지 않을까요. 서초구민 10명에게 물어 7명이 반대했다며 ‘주민들이 강력히 반대한다’고 한 의견서는 설득력이 없어 보입니다.”

-SBS TV가 지난 6월에 방영한 ‘일본군의 처절한 복수, 윤봉길은 이렇게 총살됐다’에서도 문제가 제기됐고, 폭탄 투척후 일본군에 체포된 사진의 진위가 문제되면서 그 사진이 올해부터 교과서에서도 빠졌더군요.

“할아버지를 뵌 적이 없어 맞다, 틀리다를 말씀드릴 수 없지만 친지분들이 맞다고 하시고 누구보다 할아버지를 아끼시던 김구 선생님이 쓴 ‘도예실기’란 책에 그 사진이 실려있다는 것이 진짜 모습임을 확인해주는 증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마 그 교과서를 만든 회사에서도 시비에 시달렸으니 뺐겠죠. 우리 가족으로선 일본군에 붙들려가는 모습보다는 다른 당당하고 멋진 사진이 실리길 바랍니다.”

-최근에 윤봉길 의사를 테러리스트로 규정하는 우파들, 그리고 8·15 광복이 미국의 산물이라는 주장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나요.

“할아버지가 남긴 어록 중에 ‘우리 청년시대엔 부모의 사랑보다, 형제의 사랑보다, 처자의 사랑보다 더 한층 강의(剛毅)한 사랑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라와 겨레에 바치는 뜨거운 사랑이다’란 말씀이 있어요. 그 암담한 시절에 부모, 아들, 임신한 아내를 두고 타국에 가서 몸을 던진 분의 충정과 행동을 테러로 매도하다니…. 광복은 미국의 힘이라기보다 우리 땅은 물론 세계 곳곳에서 조국을 위해 몸바친 분들이 뿌린 피와 눈물 덕분이라고 생각합니다.”

-할아버지가 훌륭한 분이란 건 언제 알았고 그런 집안의 딸이란 의식은 있었나요.

“철이 들고서야 제대로 안 것 같아요. 할머니(윤봉길 의사의 부인 배용순 여사)는 강인한 애국열사의 부인이라기보다 너무 지혜롭고 완벽한 여성이었어요. 16세때 한 살 연하인 할아버지와 결혼, 6~7년 정도만 결혼생활을 했고 할아버지가 농촌운동을 하며 야학도 하느라 늘 새벽에 나가 밤에 돌아오셨는데도 정말 금실이 좋고 애틋한 사이였나봐요. 할아버지는 당신 누이들과 부인인 할머니에게 한글을 가르치셨는데 누이들이 틀리면 막 야단을 쳐도 할머니껜 절대 야단을 치지 않았고, 할머니가 밭일을 하느라 바쁘면 한 팔에 아기를 안고 학생들을 지도할 만큼 애처가였다고 자랑하셨답니다. 어머니께도 너무 다정한 시어머니셨고 손주들을 끔찍하게 챙겨주셨지요. 다른 분들이 더 그런 의식을 심어준 것 같아요. 중학교 때 교실이 너무 추워 다들 얇은 실내화 대신에 구두를 신었는데 선생님이 유독 저만 나무라시면서 ‘다른 애들은 몰라도 넌 그러면 안된다’고 하셨을 때 제 사소한 행동 하나가 가문에 영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막연히 알았습니다. 항상 윤봉길 의사의 손녀란 시선이 불편했고 사춘기때 제대로 반항도 못하고 연애도 자유롭게 못했지만 지금 생각해보니 아름다운 구속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왜 윤봉길 의사는 직계자손이 없다고 소문났을까요.

“할아버지 기념사업회 등의 일을 친아들인 아버지(윤종)보다 할아버지의 셋째동생과 그 아들인 제 오촌당숙이 주관해서일 겁니다. 아버지는 할아버지 의거 후, 일제시대엔 도처에서 나쁜 집안 아이로 구박을 받았는데 해방후 갑자기 훌륭한 집안 아들이 되어 친한 척하는 사람들이 많이 나타나고, 또 6·25가 터지고 친일파들이 친미파로 변신해 태도가 돌변하는 모습을 보며 ‘세상과 주변사람들이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컸어요. 박정희 대통령때도 정보과 형사들이 가끔 집으로 찾아오기도 해서 까딱 잘못하면 아버지와 친한 이들이 불이익을 당할지도 모른다고 불안해하셨죠. 50세가 되어서야 좀 안정되셨는데 57세인 1984년에 돌아가셨습니다. 애국열사인 아버지에 대한 자부심보다는 원망이 크셨을지도 몰라요. 친손자인 제 동생도 이제 37세이고 평범하게 직장생활을 하니 기념사업회 등의 일에 몰두하기가 어렵죠. ‘아들이 제 구실을 못한다’ 등으로 소문났을 때는 억울하기도 했는데 그나마 ‘진짜’ 친척들이니 다행이에요. 어떤 유공자 집안은 전혀 아무 상관도 없는 이들이 자손이라고 나서서 포상금도 받고 사업회 기금도 조성하는 경우가 많다더군요.”

-국가보훈처 자료에 따르면 많은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삶이 비참한데 가정형편은 어땠나요.

“제가 1남6녀 중 장녀인데 어머니께서 우리를 키울 때 ‘어깨가 무겁다는 표현은 절대 문학적 표현이 아니라 가장 현실적인 표현’이라고 하셨을 만큼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어려웠어요. 독립유공자 가족이 못살면 ‘조상 얼굴에 먹칠한다’고 비난받고 경제적으로 여유있으면 ‘독립운동했다면서 어디서 돈이 난 거냐’고 비아냥거리고, 공부를 잘해도, 공부를 못해도 항상 입에 오르는 것이 정말 부담스러웠어요. 아버님이 공무원이셨는데 생활감각이 없어 어머니가 고군분투하셨죠. 백범의 아드님인 김신 장군의 도움으로 김포공항에 스낵코너를 운영하게 되면서 겨우 가난에서 벗어났어요. 그래도 우린 축복받은 편이에요. 다행히 대학까지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요. 그 무엇보다 교육과 취업의 기회를 주는 것이 정부가 해줄 일인 것 같아요. 제대로 배우기만 해도 스스로 자립할 힘이 생기잖아요. 그런데 요즘은 대학 등록금을 준다해도 고등학교때까지 사교육을 잘 받아야 좋은 대학에 갈 수 있으니 큰 도움이 아닌 것 같고…”

-그동안 침묵하다 최근에 윤봉길의사 기념사업에 참여하는 이유가 있나요.

“제가 처음으로 인터뷰를 하는 이유는 제가 누구란 걸 밝히려는 것이 아닙니다. 때론 너무 과분한 대접을 받아 몸둘 바를 모르기도 해서 어디 나서는 것도 싫어합니다. 다만 우리 할아버지가 벌써 역사의 실존인물이 아니라 전설적 인물로 사라지는 것 같고 농촌계몽운동 등 업적이 많은데 그저 도시락 폭탄을 투척한 인물로만 기억되는 것이 너무 안타깝기 때문에 제 입을 통해서라도 진실을 알리고 싶어서입니다. 할아버지는 이미 1920년대 말에 ‘농민독본’이란 책을 통해 ‘농촌에 미래가 없으면 인류의 미래도 없다, 머잖아 세계적으로 식량부족 사태가 올 것이 확실한데도 농산물 시장 개방으로 우리의 생명창고인 농촌의 붕괴를 방기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라고 강조하셨어요. 그분의 이런 철학과 정신을 널리 알리는 일에 조금이라도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조상이 애국해서 후손은 고생하는 사회
독립유공자의 가족으로 산다는 것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은 ‘진실’이다.

무사히 대학교육도 받고 직장도 있는 윤주경씨는 독립유공자 가족 가운데 축복받은 경우다. 2008년 8월 현재 국가보훈처에 등록된 독립유공자는 223명. 유족은 6283명이다. 이 가운데 직업이 없는 사람이 무려 60%를 넘고 고정수입이 있는 봉급생활자는 겨우 10% 정도이다. 유족 가운데 중병을 앓는 사람이 두 집에 한 집꼴, 중졸 이하의 학력이 55%다. 이 가운데 유족등록증을 갖고도 보상금을 받지 못한 채 생계대책도 없는 유족이 1114명. 극빈층에 속하는 유족에게만 제공되는 생계지원비 월 25만원이 유일한 국가의 은덕이다.



일신과 가문의 행복을 뒤로 하고 항일투쟁의 길로 들어선 독립운동가의 후손은 뿔뿔이 흩어지고 가산을 빼앗겨 집안이 몰락했다.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 오로지 조국 광복에 대한 열정과 신념으로 전 재산을 독립자금으로 쏟아부어 가족에게 남겨진 것은 가난과 멸시뿐이다. 독립운동을 한 집안이란 자부심이 한 끼의 식사도 해결해주지 못하는 현실이어서 당연히 학교 교육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독립유공자인 아버지의 이름조차 한글로 쓰지 못하는 무학의 유가족들도 많다. 가난은 대물림되고 병마도 선물처럼 따라 온다. 자신은 유복하게 자랐거나 재력이 있고 고등교육까지 받았어도 독립운동하느라 하얼빈, 상하이 등을 누비다보면 아이들은 양가집 자손임에도 넝마주이, 좌판행상 등으로 목숨을 연명할 수밖에 없다. 독립유공자 후손 가운데 가장 흔한 직업이 ‘경비’다. 고단한 직업을 전전하다 나이들어 겨우 얻은 경비업무 종사자가 가장 많다. 왜 우리 할아버지는 친일해서 돈을 모으거나, 이승만정부에 충성해 자리를 얻지 못할까하고 조상과 조국을 원망하다가 다른 나라로 떠난 유가족들도 많다.

민족문제연구소가 2005년 전국의 독립유공자 후손 5154명의 4.4%인 225명을 표본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자신의 경제·생활수준이 ‘하층에 속한다’는 응답자가 59.4%(133명)나 되었다. 반면 ‘중층에 속한다’고 응답한 이는 40.1%(90명), ‘상층에 속한다’고 답한 응답자는 1명뿐이었다. 결국 자신의 생활·경제수준이 ‘중·하층에 속한다’는 응답이 99% 이상이다. 국가보훈처는 같은 해에 밝힌 자료를 통해 후손 5154명 가운데 상층 1140명, 중층 2353명, 하층 1605명, 생계곤란층 56명으로 분류했다. 비율상 분포는 상층 22%, 중층 45%, 하층 32%, 생계곤란층 2%이다. 실제 독립유공자들이 느끼는 생활수준은 국가보훈처 판단과 거리가 아주 멀다. 물론 국가보훈처는 독립유공자에 대한 지원 사업을 다양하게 추진해오고 있다. 그러나 독립유공자 지원방식에 허점이 많고, 후손의 상당수가 국가의 지원에서 완전히 배제되어 있는 게 문제라는 지적이 많다. 국가보훈처에서는 독입유공자의 유족에 대해 최대 손자녀(3대)까지만 보상 및 예우를 한다. 45년 8월15일 이후에 사망한 독립유공자의 경우는 자녀(2대)까지만 보상을 받는다. 연금 등 각종 혜택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은 유족 1명으로 한정돼 있다. 선순위 유족(1순위 배우자, 2순위 자녀, 3순위 손자녀)이 사망할 때까지 2남, 3남, 딸 등은 전혀 지원을 받지 못한다. 국가보훈처로부터 유족등록증을 발급받지 못한 유족들의 경우 실태조사도 돼 있지 않다. 정부가 지원을 검토하려 해도 기초자료조차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상황이다.

독립유공자 가족 가운데 가장 명문가이며 사회적으로 대우받은 유족은 백범 김구 선생의 후손들이다. 둘째아들 김신씨는 공군참모총장·교통부 장관을, 그의 장남 진씨는 주택공사 사장을 지냈다. 차남 양씨는 상하이 총영사를 거쳐 현재 국가보훈처장, 3남 휘씨는 광고대행사 대표이며 외동딸 미씨는 빙그레 김호연 회장의 부인이다.

그러나 백범 선생과 비슷한 시기에 독립운동을 한 분들의 유가족은 너무나 대조적이다. 36년 뤼순감옥에서 서거한 단재 신채호 선생의 아들 수범씨는 광복후에 오히려 고통을 겪었다. 신채호 선생이 임시정부 초기에 이승만 정책에 반대했다는 이유로 신변의 위협까지 받아 넝마주이, 부두노동자로 떠돌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한 후 은행에 취직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신채호 선생은 일제가 만든 호적에 이름을 올릴 수 없다고 신고를 거부하고 망명길에 올라 아직도 대한민국 국적을 회복하지 못한 무국적자 신분이다. 신채호 선생 명의의 땅과 집도 호적이 없다는 이유로 인정받지 못해 그의 자손들은 “독립운동가의 후손이 자부심을 갖는 것은 사치”라고 원망어린 말을 한다.

상하이 임시정부 외무장관을 역임한 장병준 선생은 천석꾼 재산을 모두 독립운동자금으로 헌납하고 임시정부 일에만 몰두해 자식교육은 신경도 쓰지 못했다. 그의 장남 경식씨는 물론 손자 하정씨도 제대로 배우지 못해 변변한 직업도 못가진 채 65세인 지금 스리랑카 출신 근로자인 양아들의 도움을 받으며 산다.

전 재산은 물론 목숨까지 바친 독립유공자의 후손들에게 우리 국가와 국민들이 보여주는 도움은 빈약하다못해 부끄러울 정도이다. 충분한 경제적 보상과 함께 유공자들과 그 유족들을 최대로 예우하는 보훈정책을 시행하는 프랑스는 전국 각지의 거리·광장 등에 레지스탕스들의 이름을 붙여 유공자를 기념하는 등 그들의 사회적 예우에 힘쓰며 유족에게는 연금 지급뿐 아니라, 기업체 의무고용 규정을 마련해 취업을 보장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보훈업무를 담당하는 보훈부의 직원 숫자가 연방정부의 14개 부서 중 국방부에 이어 2번째로 많고 예산 규모는 586억달러(약 55조원, 2001년 기준)로 전체 예산의 2.7%를 차지한다. 정부 예산의 1.65%인 우리의 국가보훈처와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독립유공자와 그 가족들을 더욱 서글프고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을 향한 왜곡된 시선들이다. 해마다 광복절 행사 등에 광복회 회원, 독립유공자 가족들을 초대해 고작 엑스트라 노릇만 시킨다. 아직 발굴되지 않은 독립유공자 자료 수집에는 관심도 없고 가족들이 준비한 자료는 ‘전문가 부족’ 등을 내세워 해결해주지도 않는다. 한 독립운동가의 가족은 “국가보훈처 직원들조차 독립유공자 후손들을 불쌍해서 도와주는 사람쯤으로 생각한다”며 “각종 문의를 할 때마다 내가 구걸하는 느낌이 든다”고 불쾌해했다. 더더욱 유공자 가족을 분노케하는 것은 “대체 조상 한 명이 독립운동을 했다고 몇 대가 울궈 먹을 거냐”고 주장하는 이들의 그릇된 시각이다. 게다가 유명한 독립유공자를 이용해 자신의 경력을 돋보이게 하려는 일부 정치인들이나 사업기금을 노리는 이들이 기념사업회, 숭모회 등 각종 단체를 만들어 유가족들을 두 번 울린다.

지난 정부에서 국가보훈위원회를 열어 친일반민족행위자에게 환수한 재산을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지원하겠다고 밝혀 올해까지 전반적인 보훈보상체계 개선방안을 마련할 계획이긴 하다. 빈약한 정부예산을 대신해 친일파들에게 환수한 돈으로 독립유공자 후손들의 장학금 지원 등을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윤주경씨는 이렇게 말했다.

“친일파 재산문제도 그렇고, 좌와 우도 그렇고, 이제 서로가 미워하지 않도록 했으면 좋겠어요. 공과 과도 치우치지 않게 따져야겠지요. 독립유공자 가족들은 국가에 대단한 걸 바라는 게 아니거든요. 존경받거나 풍요롭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계를 유지하도록 교육만이라도 국가가 책임져주었으면 합니다. 적어도 조상이 애국해서 후손이 고생한다는 원망은 하지 않게요.”

일본에 충성하고 시대가 바뀌어 친미파로 변신한 이들의 후손에겐 부와 명예가, 우직하게 조국 광복을 위해 목숨을 바친 이들의 후손에게는 가난과 질병만 물려진다면 누가 애국애족을 할까. 숭고하고 고결한 애국정신을 가진 이들의 후손들이 피눈물을 흘리는 나라, 심지어 그들을 이용하려는 나라, 그것이 대한민국의 현주소다.


조상이 친일하여 후손은 고상하게 사는 사회
친일파의 후손이 사는 법

박용성 두산그룹 회장, 이장무 서울대 총장,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 그리고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 김병만 전 동아일보 회장, 중앙일보 홍석현 회장…. 현재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이 유명인사들은 조상이 친일파란 공통점도 갖고 있다.

두산그룹의 모태인 ‘박승직상점’의 설립자 박승직씨는 경성 상업계에서 절대적 지위를 누렸고, 홍석현 회장과 이건희 전 회장의 부인인 홍라희 삼성리움미술관장의 아버지는 일제시대 판사를 지낸 홍진기씨, 조선일보 방상훈 사장의 증조부는 일어상용운동을 주장한 계초 방응모씨로 모두 ‘친일 인명사전’에 올라있다. 이밖에도 김상협 전 고려대 총장, 역사학자 이병도 박사, 민복기 전 대법원장, 최돈웅 전 의원 등 우리가 기억하는 명사들이 모두 일제시대 중의원 참의 이상을 지낸 골수 친일파들의 후손들이다.

이들보다 더 노골적이고 적극적인 친일파들, 즉 일제로부터 귀족 작위와 은사금, 은사 토지를 하사받은 이들의 후손도 물려받은 땅으로 떵떵거리며 살고 있다. 이완용과 송병준 등 대표적인 친일파 11명이 소유한 토지만 무려 440만평, 돈으로 따지면 수십조원에 이른다. 이완용의 경우 경기 김포·용인 등에 106만평, 송병준의 경우 경기 고양시 등에 여의도 면적의 2배인 162만평을 보유했다. 이완용의 증손인 이윤형씨는 1980년부터 이완용 땅찾기 소송에서 승소판결을 받아 이미 수십억원을 받았다. 송병준의 종손 송돈호씨 역시 90년 중반부터 서울, 인천, 경기 지역에 있는 송병준 명의의 토지상속 소송을 주도하며 각종 사기사건을 일으키다 2007년 구속됐다가 올초 보석으로 풀려났다.

올해 광복절 특집으로 독립유공자 유족과 친일파 유족의 삶을 추적한 기사를 다룬 시사주간지 ‘시사IN’의 취재팀은 “친일파 후손은 선대가 만들어준 ‘요람’에서 근대적 교육기회를 충분히 누리거나 유산 상속 등으로 출발부터가 남달랐다”며 “그들은 대부분 사회 각계에서 엄청난 기득권을 누리며 떵떵거리고 살아 조상의 과거를 부끄러워 하기는커녕 ‘친일파 할아버지, 감사합니다’란 말이 절로 나올 지경”이라고 소개했다.

<유인경 선임기자 alice@kyunghyang.com>

IP : 119.196.xxx.100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8.8.28 12:56 PM (220.122.xxx.155)

    유인경 기자님, 제가 좋아하는 분이십니다.

  • 2. 홍이
    '08.8.28 1:45 PM (219.255.xxx.59)

    ..더러운놈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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