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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감가는, 그리고 부러운 독일 교포의 아이 영어교육기

쎄뚜 조회수 : 769
작성일 : 2008-08-21 18:53:12

인터넷에 '빨간치마네 집'이라는 집을 짓고 참 좋은 글들을 쓰는 임혜지라는 분의 영어 교육기입니다.
영어 광풍에 휩싸인 우리나라 부모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네요. 그녀의 고집과 원칙(?)이 부럽기도 하고..  우리나라 여성들의 야무진 면모도 느껴지고요...

난독증과 영어 공부  
Tuesday, 19 August 2008  
우리 아이들은 둘 다 난독증이 있다. 독일 시댁 쪽으로 난독증의 내력이 있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남편과 남편 형님이 어려서 난독증이었는데 어른이 되면서 사라졌다고 한다. 다행스럽게도 남편은 학생 시절에 증세가 점차 완화되었지만, 형님은 고등학교 졸업 후에야 정상으로 된 탓에 머리 나쁜 열등생의 누명을 벗을 기회가 없었다. 그래서 대학 진학도 포기했다.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가 전부 교사인 집안에 첫 아이로 태어난 형님은 공부에 대한 압박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남편 왈, 그 시대의 독일 교사들은 후천적인 학습으로 인간의 자질마저 바꿀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었단다. 형님이 그다지 행복하지 못한 인생을 산 이유는 대학을 안 나와서가 아니라, 어린 시절에 점수와 능력을 동일시하는 어른들 밑에서 자존의 기쁨을 경험하지 못해서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 아이들이 난독증세를 보였을 때 무조건 시댁의 반대로만 했다. 언젠가 저절로 사라질 수도 있는 난독증 자체에 집중하기 보다는 그로 인해 용기를 잃지 않도록 마음을 썼다. 아이의 약점을 들추어 보통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는 노력을 하기 보다는 아이의 강점을 키우는 초점을 맞췄다. 아이들은 자기가 잘하는 일은 일부러 시키지 않아도 스스로 즐겨 집중하니 성공율도 높았고 성취감도 컸다.

아이들의 학교 성적은 물론 좋지 않았다. 이를 걱정하는 선생님들에게 나는 우리 아이들은 정서가 안정되었기 때문에 언젠가는 공부를 잘할 것이니 너무 심려하지 마시라고 되려 위로했다. 독일 학교의 성적은 주관적인 요소가 많기 때문에 선생님의 재량이 제법 좌우하지만 나는 절대로 점수 흥정은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진정한 언어 실력은 맞춤법이 아니라 정확한 사고에 있으니 부디 선생님께서 아이가 지금의 받아쓰기 성적을 자신의 언어능력으로 혼동하지 않도록 아이에게 용기를 북돋아주십사 당부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공부 못하는 아이 엄마의 부탁치고는 참 엉뚱한 부탁인데 고맙게도 많은 선생님들이 나를 믿어주고 우리 아이들을 믿어주었다.

테스트를 통해 난독증이란 것이 입증되면 받아쓰기와 바로쓰기 점수가 집계에서 제외되어 평균성적이 올라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아이들과 의논해서 이를 거부하기로 했다. 아무도 점수라는 숫자에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핸디캡이 있게 마련인데 자신의 핸디캡이 뭔지 알고 그를 극복하던지 또는 그에 적응하는 경험을 일찌감치 쌓는 것도 인생의 큰 공부라고 생각했다. 부모가 보호하는 울타리 안에서 그런 연습을 자연스럽게 해보는 것도 호재라 여겼다. 그를 위해 나는 아이에게 남보다 많은 자율성과 결정권을 주었다.

그런 자율성은 큰 아이가 한 학년을 꿇는 것으로 나타났다. 아들이 라틴어를 제1외국어로 배우는 김나지움에 가겠다고 했을 때 남편은 가뜩이나 어학에 약한 놈이 죽은 언어인 라틴어까지 배울 필요가 있느냐고, 영어를 먼저 배우는 김나지움에 가기를 강력히 종용했다. 나도 아이가 학문적인 라틴어 대신 실용적인 외국어를 하나라도 더 배우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고, 무엇보다도 라틴어를 먼저 배우는 김나지움이 (같은 공립이라도) 선민의식을 가진 엘리트 집단의 학교라는 면에서 싫었다. 그러나 아들은 친구들이 다 그 학교에 가고, 학교 분위기가 마음에 든다는 이유로 그렇게 결정했다.

그러다가 1년 후에 뮌헨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을 때 또 한번 제 아빠랑 부딪쳤다. 먼저 살던 도시와는 달리 뮌헨의 김나지움에선 나중에 이공계 공부를 하려면 제1외국어로서 영어가 필수였다. 그러니 제 학년(6학년)을 찾아들어가려면 여름방학을 이용해 5학년 영어를 따로 마스터하던지, 아니면 1년 유급하여 영어를 처음부터 배우라는 것이었다. 아들은 단 1초도 망설임 없이 1년을 되풀이하겠다고 대답했다. 여름방학에 노는 것은 학생의 권리라는 것이다. 남편은 펄펄 뛰며 그것 보라고, 자기가 예전에 뭐라 그랬냐고 옛일까지 들치며 나를 들볶았다. 나도 어떻게 해야 좋을지 잘 몰랐다. 하지만 여태까지 너에 관한 일을 너보다 더 잘 알 사람은 없다고 말해온 입에서 갑자기 우리가 너보다 더 잘 아니까 무조건 우리 말을 들으라고 말할 염치는 없었다. 내가 어렸을 때 어른들의 그런 횡포에 묵묵히 순응하면서도 속으로는 경멸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한데...

그 외에도 내가 아이의 결정을 두둔한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가뜩이나 난독증이라는 핸디캡을 안고 있는 아이에게 남보다 불리한 위치에서 영어 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시작부터 불안하면 평생 영어가 불안할 것이었다. 그런데 나의 계산은 금방 틀어졌다. 남들과 동등하게 시작했건만 아이의 영어 성적은 곧 바닥을 기었다. 그래도 항상 낙제만은 면하는 재주가 신기할 지경이었다. 제 학년 찾아 올라갔어도, 아니 월반을 했더라도 영어 성적이 그 이하는 안 됐을 것이 분명했다.

구원은 엉뚱한 곳에서 왔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유일하게 통제한 부분은 컴퓨터 게임이었다. (그때 만약 우리집에 TV가 있었다면 그것도 통제했을 것이다.) 컴퓨터를 이용해 능동적이고 창조적인 일을 할 줄 알면 게임에 빠지지는 않을 것이라 생각하여 남편은 아이에게 프로그래밍을 가르쳐줬다. 아이는 게임을 하고 싶은데 부모가 못하게 하니 게임을 직접 만들어서 가지고 노느라고 프로그래밍에 금새 폭 빠졌다. 7학년(중2)이 되자 아이는 인터넷 프로그래머 동호회에 적극적으로 참여해서 배움으로써 제 아빠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세계 각국에서 접속하는 그 동호회의 언어는 영어였다.

프로그래밍이라는 큰 목적 앞에 영어는 아주 사소한 장애물이었던 모양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들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은 영어로 전부 표현할 수 있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그래도 학교에서 받는 영어 점수는 여전히 하위였던 것이 고학년으로 가면서 서서히 오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자기 실력이 늘어서라기 보다는 학교에서 점수 매기는 패턴이 달라져서 그런 거라고 했다. 저학년 때는 철자법과 바로쓰기에 큰 비중을 두어 성적을 매겼지만 학년이 높아질 수록 문장력과 내용에 더 큰 비중을 두기 때문에 철자가 좀 틀려도 점수를 잘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 마지막에 가서 일어났다. 졸업시험이자 대학 입학시험인 아비투어에서 아들은 영어(쓰기, 듣기, 말하기) 만점을 받은 것이다.

아들의 난독증은 아직도 완전히 가시지 않았다. 하지만 하고자 하는 말을 군더더기 없이 정확하게 표현하고 컴퓨터로 자동교정을 보니 의사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다. 남편은 아직도 가끔씩 아들의 잃어버린 1년을 아까워한다. 멀쩡한 아이를 쓸데 없이 오래 학교에 잡아두었다는 것이다. 나도 아깝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아들이 1년 일찍 졸업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는 아무도 모른다. 정작 본인은 만족해 하는데 괜히 옆에서 가지 않은 길을 미화해서 상상하며 현재의 모습을 비하하는 건 부모로서 예의 없는 짓이 아닐까?

역시 난독증을 보이는 작은 아이, 우리 딸은 또 어땠나? 이공과목에 소질이 있는 아들은 어학이 약해도 주위에서 이해해주고 들어가는 부분이 있었다. 그러나 딸은 자기 취향에 맞는 인문계 과목에서 난독증 때문에 점수가 나쁘니 도무지 뭐 잘하는 게 없는 아이가 되어버렸다. 게다가 독서를 즐기고 글 쓰기를 즐기는 점도 작문시험에서 약점으로 작용했다. 딸은 쓰는 재미에 몰입해서 아주 현란한 작문을 제출하곤 했다. 서론, 본론, 결론의 작문법에 충실하기보다는 제 흥에 겨워 기발한 얘기를 써놓고는 점수가 나쁘다고 투덜거렸다.

나는 아이에게 말했다. "내가 선생님이라면 참신한 아이디어와 비상한 문장력을 높이 사서 만점을 줬을 거야. 하지만 네 선생님이 잘못한 건 아니야. 선생님은 올바른 작문법을 가르칠 의무가 있는 사람이거든. 네가 성적을 잘 받고 싶다면 선생님이 원하는 작문 형식에 딱 맞춰서 쓰면 돼. 그건 네 선택이야. 하지만 내가 너라면 성적 때문에 쓰는 재미를 포기하지는 않을 것 같은데?" 그리고 나는 독일의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토마스 만의 일화를 즐겨 얘기하곤 했다. 토마스 만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의 독일어 선생님이 '이런 독일어 실력으로 이 학생은 앞으로 사회에서 아무런 쓸모있는 일도 할 수 없을 것이다'라는 의견서를 냈다고 한다.

그 외에는 아이가 좋아하는 독서를 방해하지 않도록 노력했다. 한창 허영심에 부푼 시기란 점을 이용해서 유치찬란한 청소년용 여성지를 단지 영어라는 이유로 정기구독하기도 했다. 영화를 원어로 반복해서 보는 취미가 있는 딸에게 우리는 소녀 취향의 DVD를 아낌없이 구해주었다. 또한 말하기를 즐기는 딸아이를 위해서 남편은 하루 세끼 식사를 집에서 함으로써 딸의 스파링 상대가 되어주었고 나는 식탁을 정성껏 차렸다. 딸은 하루에 세 번씩 식탁에서 우리 셋을 상대로 귀가 따갑게 떠들어대더니 어느덧 어떠한 궤변도 그 입에서 나오면 그럴 듯하게 들리게 하는 (못된) 재주를 연마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런 노력이 학교 성적으로 바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아이고 귀 따가워. 실력도 없으면서 시끄럽기만 한 사람이 되는 건 아닐까?'하고 포기하기에 이르러 이변이 슬슬 일어났다. 영어를 비롯하여 많은 과목의 수업 방식이 토론 위주로 바뀌는 고학년이 되면서 아이는 학교 공부에 취미를 붙이기 시작했다. 수업시간에 제 의견을 주장하는 재미에 이제는 숙제도 좀 해가는 모양이었고, 또 필기시험의 체점도 이제는 내용에 초점을 맞추니 성적도 좋아졌다. 때가 되어 그런지 난독증도 서서히 사라졌다. 그간 유치한 잡지나 영화를 보며 얻어들은 영어 단어와 문장은 토론할 때의 자신감을 뒷받침해줬다.

딸은 자기 적성에 맞는 직업이 무엇인지 꽤나 오래 고민했다. 외교관이 적합할 것 같은데 외교관은 국익을 위해선 자기 신념에 맞지 않는 말도 해야한다는 사실이 맘에 걸리고, 또 저를 따라다니며 자녀를 길러줄 남편을 만나야 하는 일이 부담스러운지 포기했다. 그 대신 국제기구에서 일하고 싶다고 잠정적으로 결정을 내린 후 뮌헨의 한 국제단체에서 실습도 하고 자원봉사를 하고 있다. 실습할 때 고참 실습생이 허드렛일을 시키며 구박을 좀 한 모양인지 자기는 기필코 높은 사람이 되어야겠더니 영어공부를 위해 미국에 어학연수를 보내달라고 졸랐다. 우리는 스스로 노력하지 않는 자식을 돈으로 공부시키지 않는다고 거절했더니 열심히 공부해서 영어성적을 올려놓고는 또 졸랐다. 그래서 그 비싼 연수를 한 달 이상은 절대로 보내줄 수 없다고 벌벌 떠는 시늉을 하며 미국에 보냈더니 구두쇠 부모가 큰 마음 먹은 걸 감지덕지하며 열심히 공부한 모양이다. 이제 딸아이는 반에서 영어를 제일 잘하는 학생이 되었고, 아비투어 전공과목으로 영어를 택했다.

나는 우리 아이들의 영어실력이 객관적으로 어느 정도인지 모른다. 중요한 것은 아이들이 영어로 읽고 쓰고 듣고 대화하는 일에 아무런 부담이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 아이들에게 영어 자체가 목적이었던 적은 없다. 영어는 자신들이 추구하는 목적지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인 자동차였을 뿐이고, 목적지에 대한 열정이 크다보니 자동차 운전도 재빨리 배웠을 뿐이다. 사랑을 해본 사람은 열정의 불가사의한 힘을 알 것이다. 열정을 심어주는 것이, 아니, 열정이 저절로 솟도록 용기를 꺽지 않으며 기다려주는 것이 진정한 힘을 기르는 교육이 아닐까?

우리 부부가 처음부터 고상하게 인내하며 아이들을 바른 길로 인도한 건 절대로 아니다. 우리도 평범한 인간들일진데 각박한 경쟁사회에 아이들을 내동댕이쳐놓고 어찌 불안하지 않았겠는가? 불안한 마음에서 아이들을 닥달하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러나 어머니, 아버지, 할머니, 할아버지 선생님들이 한 집에 살면서 합동으로 다그쳐도 아이 하나 공부 시키기 쉽지 않다는 것을 시댁의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또 그렇게 해서 자존심과 자율성을 잃은 인생이 평생 얼마나 고단한지도 직접 보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존재의 기쁨을 경쟁력으로 평가함으로써 소중한 인격체를 부품으로 전락하게 할 수는 없었다. 우리가 자식을 낳아 기르는 목적은 세상에서 부리기 쉽도록 획일화된 일꾼을 양성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 아이들은 획일적으로 찍혀나와 아궁이에 던져져 엔진을 돌리는 연료가 아니다. 고유한 인생을 잘 살아내기 위해 고유한 열정을 싹틔워 올리려는 아이들의 절박한 몸짓이 보이지 않는가?


출처 :  http://www.hanamana.de/hana/index.php?option=com_content&task=view&id=155&Ite...

IP : 152.99.xxx.25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8.8.21 10:13 PM (211.186.xxx.24)

    가슴에 와 닿네요,,
    좋은글 올려 주셔서 감사 드립니다^^

  • 2. ,,
    '08.8.21 10:21 PM (80.143.xxx.157)

    독일의 사회 시스쳄 안에서는 임혜지씨의 이 교육방식이 가능해요.
    적어도 교육의 목표가 어떤 인간을 만들어 낼것이냐는 기본적인 물음에 교육자들이 천착하고 있고
    어떤 것이든 그게 다른 것보다 옳고 합리적이라면 개인의 이해나 권위보다 그걸 선택하는데 주저하지 않는 국민성을 가지고 있거든요.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올바른 선택이고 올바른 선택을 했는데도 다른 이익집단으로 인해서 해서 손해보는 일 따위는 없기 때문에 가능한지도 모르죠.
    어쨋든 저러니 교육사상가가 나오고 각 학교들이 자기 나라 교육 사상가의 이론을 따라서 각자
    각 학교 나름의 커리큘럼을 짜서 학생들을 교육하는 거 보면 진정한 교권과 교사의 자질이 뭔지
    생각해 보게 합니다.
    애의 머리가 좋든 나쁘든 생활환경이 좋든 나쁘든 교육의 큰 목표로 지식량과 타율성이 아니라 자율성과 자신의 삶에 스스로 책임 지는 성인으로 키우는 큰 틀을 보면 부러워요.
    그리고 인문계 고등학교에는 교사중에 박사도 5 분의 1 은 도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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