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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백골단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눈물 조회수 : 397
작성일 : 2008-08-02 14:40:46
사람이 죽고서야 조금 주춤해졌던 경찰의 폭력진압
역사는 백골단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차성은 기자mrcha32@empal.com 1
7월 30일 1,700여명의 경찰관 기동대가 창설됐다. 시민단체 등 진보진영에서는 경찰관 기동대 창설을 백골단의 부활이라며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과거 1980~90년대 시위현장에서 흰색(또는 청색·검정색) 헬멧을 쓴 사복차림의 건장한 남자들이 곤봉만을 든 채 달려들던 모습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경찰관 기동대의 모습을 보며 백골단의 아픈 추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경찰관계자들도 ‘백골단의 부활이 아니냐’는 비판에 ‘아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점점 축소되는 전의경을 대체하기 위해 창설한 것’이라는 변명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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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백골단(경찰관 기동대)의 모습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백골단이란
위키 백과사전에는 백골단에 대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백골단은 80~90년대 사복경찰관으로 구성된 다중범죄 진압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부대를 일컫는 별칭이다. 시위하는 시민을 진압하는 모습이 흰색 헬멧에 일반전경들과 구분되는 청색 자켓 복장 때문에 백골단이란 별칭이 붙게 됐다. 이들은 당시 독재시대를 상징하는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시민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권력이었다. 80~90년대에는 무술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이 특채되어 주류를 이루었다. 1996년 연세대 시위진압을 이후로 서울지방경찰청 내 3개 중대를 남기고 규모가 크게 줄었다”
이렇게 3개 중대로 줄었던 경찰관 기동대, 일명 백골단은 지난 7월 30일 17개 중대 1,700여명으로 확대·창설되면서 명실상부한 백골단의 위상을 되찾게 된 것이다.
1987년 6월, 직격 최루탄에 맞아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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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경찰이 쏜 직격탄에 맞에 쓰러진 이한열 열사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광주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전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죠. 제 이름에 ‘열’자가 바로 매울 ‘열(烈)’자에요. 최루탄과는 불과분의 관계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동지들이 있잖아요.”
이한열(당시 21세)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앞서 평소와 다름없이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한열은 그날 그 집회에서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한열 피격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잔혹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져 6월 항쟁의 거대한 물줄기가 됐다.
1987년 12월, 경찰의 집단구타로 농민 김길호 사망
6.10 항쟁으로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긴 했지만 경찰의 폭력진압은 변화가 없었다.
1987년 12월 20일 전남 무안에서 대통령 선거 무효 투쟁을 벌이며 광주 방면으로 행진을 하던 김길호(당시 34세)는 경찰과 대치하게 됐다. 그는 경찰에 의해 논두렁에 처박혔고 경찰에 둘러싸여 집단구타를 당한 뒤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후유증으로 그 이듬해인 3월 숨을 거뒀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요. 아직 뭐 하나 변변히 바뀐 것도 없잖아요. 나는 할 일이 많은데...”라는 말을 남겼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기독교 농민회에 가입, 86년 7월부터 87년까지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에 열성을 다해 온 김길호는 죽기 직전까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었음을 시사했다.
1991년 4월,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
백골단이 사회적 문제가 돼 공식 해체(?)되기까지는 1991년 백골단에 맞아 죽은 강경대 열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에 다니던 강경대 열사는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쓴 짤막한 쪽지와 함께 “금방 올게요”하고 집을 나선 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5명의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당시 명지대학교 학생들은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학교 밖에서 안팎의 상황을 연락하는 임무를 맡은 강경대는 가장 늦게 학교 담을 오르게 됐고, 이를 보고 뒤쫓아 온 백골단 5~7명은 그의 다리를 잡고 끌어내리면서 쇠파이프로 전신을 구타한 뒤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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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백골단(경찰관 기동대)의 모습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잠시 후 오른쪽 머리와 얼굴이 피범벅이 된 강경대가 담을 넘어 올라왔고 안에 있던 학생들이 부축했지만 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끝내 사망했다.
강경대 열사 치사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한술 더 떠 치안본부는 사건발생 1시간 뒤 해명자료를 내고 “현재로서는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으나, 투석전이 벌어지면서 돌에 맞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자체조사를 통해 강경대 열사를 구타한 경찰을 찾아내 이들의 진술을 받은 뒤에도 “경찰봉으로 때렸다는 것은 확인됐으나 쇠파이프가 사용됐는지는 계속 조사 중”이라며 쇠파이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구타한 경찰들이 “쇠파이프로 때렸다”고 진술한 뒤에 나온 발표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치안본부는 당시 시위진압의 책임을 물어 서부경찰서장과 현장지휘를 했던 김아무개 중대장, 박아무개 소대장을 직위해제하고, 직접 폭행에 가담한 5명의 경찰을 구속했다.
치안본부는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5월 2일 마지못해 백골단(사복체포조)을 해체하기로 했다. 아울러 진압작전도 접근전을 통한 공격적 해산방식을 지양하고 시위대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가두·도심 진출만을 막는 형태로 전환키로 했다.
또 치안본부는 경찰봉, 방패를 제외한 진압장구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시위진압안전대책’을 발표했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조차 “이 같은 경찰의 대책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며 “실효를 거두기 어려우리라는 지적이 많다”고 비판했다.
1991년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 사망
1991년 4월 26일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으로 정국은 소용돌이쳤다. 분신정국이 계속되고 분신 배후를 조작하려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거세지는 가운데 또 한명의 대학생이 경찰 폭력에 사망했다.
5월 25일 ‘공안통치 분쇄 및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위’가 주최한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는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집결했다.
하지만 이날 역시 경찰의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작전이 자행됐으며 경찰에 포위돼 혼란해진 현장에서 김귀정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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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한 시위참가자의 뒤통수를 정확히 겨냥해 방패를 날리고 있다.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1996년 3월, 연세대생 노수석 사망
1995년 연세대에 입학해 풍물패에서 활동하던 노수석은 1996년 3월 29일 서울 종로5가에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주최로 열린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시위에 참가했다. 하지만 이날 경찰은 일명 토끼몰이식 강경진압을 했고 노수석은 경찰에 쫓겨 달아나던 중 을지로5가 한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병원으로 옮기던 중 끝내 숨을 거뒀다.
1997년 3월, 조선대생 류재을 사망
1996년 조선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류재을은 1997년 3월 20일 오후 2시 조선대 1·8극장에서 열린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 주최의 개강투쟁선포식에 참가했다. 그는 행사를 마친 후 가두행진을 시작한 대열 앞쪽에서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커먼 물체에 맞고 주춤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다가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그를 학내 잔디밭으로 옮기고 팔과 다리를 주물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급히 조선대병원으로 옮겨 심폐소생술, 인공호흡, 약물투입, 산소호흡, 전기쇼크 등 응급처치를 했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고, 오후 3시께 결국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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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찍혀 피투성이가 된 한 농민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2005년 12월, 농민 전용철·홍덕표 사망
참여정부에서도 시위대에 대한 경찰 폭력은 국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2005년 11월 15일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된 ‘전국농민대회’. 집회에 참가한 농민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경찰이 휘두르는 곤봉과 날선 방패는 무조건 농민들의 머리를 향했고, 수백 명의 농민들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결국 이날 경찰의 폭력으로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전용철(당시 43세) 농민은 11월 24일 숨졌고, 홍덕표(당시 68세) 농민은 12월 18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 시위 현장에서 두 명의 참가자가 경찰폭력에 의해 사망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은 전용철 농민이 경찰에 맞아 죽었다는 증언들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11월 27일 현장에서 부상한 그를 다른 농민들이 나르는 <민중의소리> 사진이 공개되자 그제야 “당시 집회 현장에서 이 같은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경찰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며 “폭행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전씨가) 간경화 말기인데다 술 먹고 구토하고 쓰러졌을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허 청장은 얼마 뒤 홍덕표 농민까지 사망하고, 인권위 조사를 통해 ‘당시 현장에서의 경찰 폭력에 의해 숨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서야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고 12월 29일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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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폭력에 사망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장례식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시위진압 전문부대에 의한 경찰폭력, 사람이 죽어야 주춤...그마저도 오래 안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경찰폭력진압에 의한 사망사건이 모두 경찰관 기동대 즉 백골단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갖는 공통점은 일반 의경이 아닌 시위진압 전문 부대에 의해 자행된 사망사건이라는 것이다. 모두 직업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수기동대와 강경진압으로 악명 높은 경찰기동대(전경부대)에 의해 저질러졌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경찰의 폭력진압은 사람이 죽어야만 조금 주춤해진다는 것이다. 그마저 오래가지는 않는다.
국민과 시위참가자를 적으로 규정한 경찰관 기동대
이번에 창설된 1,700여명의 경찰관 기동대는 서울 동대문 기동본부에서 열린 창설식 행사에서 어청수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고위간부들에게 시위진압 시범을 선보였다. 언론을 통해 보인 것처럼 이날 시범은 일반 시위대를 상대로 한 진압이라기 보단 테러범을 상대로 한 진압처럼 과격했다. 국민들의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할 경찰이 집회·시위 참가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진압훈련을 한 것이다.
경찰은 8월부터 경찰관 기동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빠르면 당장 2일 개최되는 촛불집회에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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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기동대원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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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기동대의 시위대 진압 시범
ⓒ 민중의소리 김미정 기자
기사입력 : 2008-08-01 15:53:11
최종편집 : 2008-08-02 12:32:58ⓒ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217561.html
역사는 백골단을 어떻게 기억하는가
차성은 기자mrcha32@empal.com 1
7월 30일 1,700여명의 경찰관 기동대가 창설됐다. 시민단체 등 진보진영에서는 경찰관 기동대 창설을 백골단의 부활이라며 강력 비판하고 나섰다.
과거 1980~90년대 시위현장에서 흰색(또는 청색·검정색) 헬멧을 쓴 사복차림의 건장한 남자들이 곤봉만을 든 채 달려들던 모습을 기억하는 국민들은 경찰관 기동대의 모습을 보며 백골단의 아픈 추억을 떠올릴 수밖에 없어 보인다.
경찰관계자들도 ‘백골단의 부활이 아니냐’는 비판에 ‘아니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다만 ‘점점 축소되는 전의경을 대체하기 위해 창설한 것’이라는 변명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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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백골단(경찰관 기동대)의 모습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백골단이란
위키 백과사전에는 백골단에 대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백골단은 80~90년대 사복경찰관으로 구성된 다중범죄 진압 임무를 수행하는 경찰부대를 일컫는 별칭이다. 시위하는 시민을 진압하는 모습이 흰색 헬멧에 일반전경들과 구분되는 청색 자켓 복장 때문에 백골단이란 별칭이 붙게 됐다. 이들은 당시 독재시대를 상징하는 권위의 상징이었으며 시민들에게 공포를 느끼게 하는 권력이었다. 80~90년대에는 무술유단자와 특전사 출신이 특채되어 주류를 이루었다. 1996년 연세대 시위진압을 이후로 서울지방경찰청 내 3개 중대를 남기고 규모가 크게 줄었다”
이렇게 3개 중대로 줄었던 경찰관 기동대, 일명 백골단은 지난 7월 30일 17개 중대 1,700여명으로 확대·창설되면서 명실상부한 백골단의 위상을 되찾게 된 것이다.
1987년 6월, 직격 최루탄에 맞아 연세대생 이한열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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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6월, 경찰이 쏜 직격탄에 맞에 쓰러진 이한열 열사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광주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데 전 도대체 뭘 하고 있었던 걸까요.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죠. 제 이름에 ‘열’자가 바로 매울 ‘열(烈)’자에요. 최루탄과는 불과분의 관계죠. 하지만 걱정 마세요. 동지들이 있잖아요.”
이한열(당시 21세)은 자신이 죽음을 맞이하게 된 1987년 6월 9일, ‘6·10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에 앞서 평소와 다름없이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동료들을 안심시켰다. 하지만 이한열은 그날 그 집회에서 경찰이 쏜 SY-44 직격 최루탄을 맞고 쓰러진 뒤 숨을 거두고 말았다.
이한열 피격 사건은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잔혹성을 다시 한 번 확인시켰으며 이 사건을 계기로 국민들의 분노는 들불처럼 번져 6월 항쟁의 거대한 물줄기가 됐다.
1987년 12월, 경찰의 집단구타로 농민 김길호 사망
6.10 항쟁으로 노태우가 6·29선언을 발표하긴 했지만 경찰의 폭력진압은 변화가 없었다.
1987년 12월 20일 전남 무안에서 대통령 선거 무효 투쟁을 벌이며 광주 방면으로 행진을 하던 김길호(당시 34세)는 경찰과 대치하게 됐다. 그는 경찰에 의해 논두렁에 처박혔고 경찰에 둘러싸여 집단구타를 당한 뒤 입원치료를 받았지만 후유증으로 그 이듬해인 3월 숨을 거뒀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이렇게 죽을 수는 없어요. 아직 뭐 하나 변변히 바뀐 것도 없잖아요. 나는 할 일이 많은데...”라는 말을 남겼다. 80년 광주항쟁 이후 기독교 농민회에 가입, 86년 7월부터 87년까지 ‘농산물 제값받기 투쟁’에 열성을 다해 온 김길호는 죽기 직전까지 아직도 가야할 길이 멀었음을 시사했다.
1991년 4월, 백골단의 쇠파이프에 맞아 명지대생 강경대 사망
백골단이 사회적 문제가 돼 공식 해체(?)되기까지는 1991년 백골단에 맞아 죽은 강경대 열사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1991년 4월 26일 당시 명지대에 다니던 강경대 열사는 “엄마 아빠 학교 다녀오겠습니다”라고 쓴 짤막한 쪽지와 함께 “금방 올게요”하고 집을 나선 후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그는 5명의 백골단이 휘두른 쇠파이프에 맞아 숨을 거두었다.
당시 명지대학교 학생들은 ‘학원자주화 완전 승리와 노태우 군사정권 타도 및 총학생회장 구출을 위한 결의대회’를 열고 경찰과 대치하고 있었다. 학교 밖에서 안팎의 상황을 연락하는 임무를 맡은 강경대는 가장 늦게 학교 담을 오르게 됐고, 이를 보고 뒤쫓아 온 백골단 5~7명은 그의 다리를 잡고 끌어내리면서 쇠파이프로 전신을 구타한 뒤 달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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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백골단(경찰관 기동대)의 모습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잠시 후 오른쪽 머리와 얼굴이 피범벅이 된 강경대가 담을 넘어 올라왔고 안에 있던 학생들이 부축했지만 바로 정신을 잃고 말았다. 그는 병원으로 이송되는 도중 끝내 사망했다.
강경대 열사 치사사건이 발생하자 경찰은 “쇠파이프에 맞아 죽었을 리 없다”고 주장했다. 한술 더 떠 치안본부는 사건발생 1시간 뒤 해명자료를 내고 “현재로서는 정확한 사인을 알 수 없으나, 투석전이 벌어지면서 돌에 맞았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발표했다.
경찰은 자체조사를 통해 강경대 열사를 구타한 경찰을 찾아내 이들의 진술을 받은 뒤에도 “경찰봉으로 때렸다는 것은 확인됐으나 쇠파이프가 사용됐는지는 계속 조사 중”이라며 쇠파이프를 사용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미 구타한 경찰들이 “쇠파이프로 때렸다”고 진술한 뒤에 나온 발표였다.
사건이 확대되자 치안본부는 당시 시위진압의 책임을 물어 서부경찰서장과 현장지휘를 했던 김아무개 중대장, 박아무개 소대장을 직위해제하고, 직접 폭행에 가담한 5명의 경찰을 구속했다.
치안본부는 여론의 비난이 거세지자 5월 2일 마지못해 백골단(사복체포조)을 해체하기로 했다. 아울러 진압작전도 접근전을 통한 공격적 해산방식을 지양하고 시위대와 일정거리를 유지한 채 가두·도심 진출만을 막는 형태로 전환키로 했다.
또 치안본부는 경찰봉, 방패를 제외한 진압장구의 사용을 금지하는 등의 ‘시위진압안전대책’을 발표했지만 특별한 내용은 없었다. 당시 <조선일보>조차 “이 같은 경찰의 대책은 특별히 새로운 것이 아니다”며 “실효를 거두기 어려우리라는 지적이 많다”고 비판했다.
1991년 5월, 성균관대생 김귀정 사망
1991년 4월 26일 강경대 폭행치사 사건으로 정국은 소용돌이쳤다. 분신정국이 계속되고 분신 배후를 조작하려는 노태우 정권에 대한 비판과 저항이 거세지는 가운데 또 한명의 대학생이 경찰 폭력에 사망했다.
5월 25일 ‘공안통치 분쇄 및 민주정부 수립을 위한 범국민대책위’가 주최한 ‘공안통치 민생파탄 노태우 정권 퇴진을 위한 제3차 범국민대회’에는 수천 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집결했다.
하지만 이날 역시 경찰의 무차별적인 폭력 진압작전이 자행됐으며 경찰에 포위돼 혼란해진 현장에서 김귀정은 시신으로 발견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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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이 한 시위참가자의 뒤통수를 정확히 겨냥해 방패를 날리고 있다.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1996년 3월, 연세대생 노수석 사망
1995년 연세대에 입학해 풍물패에서 활동하던 노수석은 1996년 3월 29일 서울 종로5가에서 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 주최로 열린 ‘대선자금 공개와 교육재정 확보’를 위한 시위에 참가했다. 하지만 이날 경찰은 일명 토끼몰이식 강경진압을 했고 노수석은 경찰에 쫓겨 달아나던 중 을지로5가 한 인쇄소 안에서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그는 병원으로 옮기던 중 끝내 숨을 거뒀다.
1997년 3월, 조선대생 류재을 사망
1996년 조선대 행정학과에 입학한 류재을은 1997년 3월 20일 오후 2시 조선대 1·8극장에서 열린 광주전남지역총학생회연합 주최의 개강투쟁선포식에 참가했다. 그는 행사를 마친 후 가두행진을 시작한 대열 앞쪽에서 깃발을 들고 있었는데 갑자기 시커먼 물체에 맞고 주춤거리며 뒤로 몇 발자국 물러서다가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주위에 있던 학생들이 그를 학내 잔디밭으로 옮기고 팔과 다리를 주물렀지만 소용이 없었다. 급히 조선대병원으로 옮겨 심폐소생술, 인공호흡, 약물투입, 산소호흡, 전기쇼크 등 응급처치를 했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고, 오후 3시께 결국 숨을 거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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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의 곤봉과 방패에 찍혀 피투성이가 된 한 농민이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다.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2005년 12월, 농민 전용철·홍덕표 사망
참여정부에서도 시위대에 대한 경찰 폭력은 국민을 죽음으로 몰고 갔다.
2005년 11월 15일 서울 여의도에서 개최된 ‘전국농민대회’. 집회에 참가한 농민들에 대한 경찰의 진압은 상상을 초월했다. 경찰이 휘두르는 곤봉과 날선 방패는 무조건 농민들의 머리를 향했고, 수백 명의 농민들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결국 이날 경찰의 폭력으로 중상을 입고 사경을 헤매던 전용철(당시 43세) 농민은 11월 24일 숨졌고, 홍덕표(당시 68세) 농민은 12월 18일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한 시위 현장에서 두 명의 참가자가 경찰폭력에 의해 사망한 초유의 사건이었다.
당시 허준영 경찰청장은 전용철 농민이 경찰에 맞아 죽었다는 증언들에 대해 부인으로 일관했다. 그러나 11월 27일 현장에서 부상한 그를 다른 농민들이 나르는 <민중의소리> 사진이 공개되자 그제야 “당시 집회 현장에서 이 같은 불상사가 일어났을 것이라는 생각은 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경찰과의 직접적인 충돌은 없었던 것으로 파악됐다”며 “폭행 흔적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오히려 그는 “(전씨가) 간경화 말기인데다 술 먹고 구토하고 쓰러졌을 개연성이 높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허 청장은 얼마 뒤 홍덕표 농민까지 사망하고, 인권위 조사를 통해 ‘당시 현장에서의 경찰 폭력에 의해 숨진 것’이라는 결론이 나와서야 “책임을 통감한다”고 밝혔고 12월 29일 사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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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11월 농민대회에 참가했다가 경찰폭력에 사망한 전용철, 홍덕표 농민의 장례식
ⓒ 민중의소리 자료사진
시위진압 전문부대에 의한 경찰폭력, 사람이 죽어야 주춤...그마저도 오래 안가
물론 위에서 언급한 경찰폭력진압에 의한 사망사건이 모두 경찰관 기동대 즉 백골단에 의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이 갖는 공통점은 일반 의경이 아닌 시위진압 전문 부대에 의해 자행된 사망사건이라는 것이다. 모두 직업 경찰관으로 구성된 특수기동대와 강경진압으로 악명 높은 경찰기동대(전경부대)에 의해 저질러졌다.
또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 경찰의 폭력진압은 사람이 죽어야만 조금 주춤해진다는 것이다. 그마저 오래가지는 않는다.
국민과 시위참가자를 적으로 규정한 경찰관 기동대
이번에 창설된 1,700여명의 경찰관 기동대는 서울 동대문 기동본부에서 열린 창설식 행사에서 어청수 경찰청장을 비롯한 경찰 고위간부들에게 시위진압 시범을 선보였다. 언론을 통해 보인 것처럼 이날 시범은 일반 시위대를 상대로 한 진압이라기 보단 테러범을 상대로 한 진압처럼 과격했다. 국민들의 집회·시위의 자유를 보장하여야 할 경찰이 집회·시위 참가자를 적으로 규정하고 진압훈련을 한 것이다.
경찰은 8월부터 경찰관 기동대를 시위현장에 투입하겠다고 밝혔다. 빠르면 당장 2일 개최되는 촛불집회에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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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기동대원들이 시위대를 진압하는 시범을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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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관 기동대의 시위대 진압 시범
ⓒ 민중의소리 김미정 기자
기사입력 : 2008-08-01 15:53:11
최종편집 : 2008-08-02 12:32:58ⓒ민중의소리
http://www.vop.co.kr/A00000217561.html
IP : 121.151.xxx.149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ㅠ_ㅠ
'08.8.2 2:43 PM (59.3.xxx.240)살인면허 받은 경찰이라는 말인가요 ㅠ_ㅠ 저들도 남의 귀한 아들일테고 언젠가는 한 여자의 남편이 되고 아이들의 아빠가 될텐데 나중에 아이들에게 자신처럼 되라고 할까요
그나저나 궁금한게 백골단은 지원자 모집인가요 아니면 선발형 모집인가요2. 눈물
'08.8.2 2:46 PM (121.151.xxx.149)지원한겁니다 작년 겨울에
명박이가 당선되고 나서 바로 한것이 백골단 부활이라네요 ㅠㅠ
우리정도의 반발은 다 생각하고잇었던것같네요3. 좋아요~
'08.8.2 2:46 PM (218.48.xxx.112)기사가 살짝 잘못됐네요. 투입될 가능성도 있다... 라고 되어 있는데,
투입된지 벌써 3-4일 넘었어요. 지금은 한총련때문에 용산에 있는걸로 알고 있어요.
어떻게 아냐구요? 좀전에 백골단에서 일하는 친구랑 통화했거든요
너라도 제발 사람때리지 말라고 눈치껏 피해라라고 계속 말은 하고 있는데.. 답답하네요4. 눈물
'08.8.2 2:48 PM (121.151.xxx.149)좋아요님 그렇군요
아마 지금 이런사태인지 알앗으면 사람들이 지원하지는않았겠죠
이것이 더 답답합니다5. 광팔아
'08.8.2 3:22 PM (123.99.xxx.25)예전에 전각하 있을때 저곳 근무자 진급 잘된것 같았습니다.
고가 점수?6. 그러니까
'08.8.2 3:26 PM (123.111.xxx.223)지금은 시민들의 자발적 집회를 무력진압을 하면 안되죠. 파이도 안들고 촛불들고 참석하는 사람들을. 옛날처럼 강경진압하면 대규모 유혈사태 납니다.
7. 백골단
'08.8.2 4:12 PM (58.236.xxx.241)저번 주 7월 26일에도 실습 나왔고 여러 명 연행했어요.
가까이서 봤는데 어린 나이는 아니고, 체격이 상당히 좋더군요.8. 부산맘
'08.8.2 4:13 PM (122.254.xxx.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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