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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특집 - " 아주 기쁜 난처함"

베를린 조회수 : 1,684
작성일 : 2008-02-07 02:20:47
Http://www.mediamob.co.kr/sanha88/Blog.aspx?ID=193380

2008-01-25 01:04  by 산하의 썸데이서울


도봉동 4.19 묘지에서 쭈욱 내려오다보면 덕성여대 가는 작은 사거리가 있죠. 그 모퉁이에 나폴레옹인가 하는 과자점이 있는데 그 옆으로 난 아주 좁고 짧은 골목길 끝에 한 식당이 숨어 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식당같지도 않은 곳이죠. 가정집 앞에다가 70년대식 입간판 하나 세워 놓은 것이니까.

  그곳은 70 가까운 노부부 두 분이 운영하고 계셨는데 칼국수 보쌈에 만두국을 손님들에게 내고 여름에는 콩국수도 곁들이는 곳이었습니다. 그 노부부 가운데 바깥 양반... 부리부리한 눈매에 입술 양쪽이 아래를 조금 처지는 것이 '나 고집 세다'를 얼굴에 써놓은 경상도 할아버지였죠.

"이 골목에 대체 어떤 사람들이 알고 찾아와요?"라는 인터뷰 질문을 던졌습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모르는 사람은 옆집에서 10년을 살아도 모르고, 아는 사람은 제 발로 찾아오고............."

  그러고 있는데 한 손님이 찾아들었습니다. 원래 이집은 이른바 뜨내기 손님이 없습니다. 머리카락 보일까 꼭꼭 숨은 이 식당이니 어련하겠습니까. 헌데 이 가게를 처음 들어선 듯한 티를 여지없이 드러내는 뜨내기 손님은 할아버지와 비슷하게 나이를 먹은 할머니였습니다. 헌데 첫마디의 억양이 그 출신을 즉각 드러나더군요.

"국수 팝니까? 찬 국수요..."

그 독특한 하지만 이제는 귀에 익은 연변 말투였지요. 뜻하지않은 뜨내기손님의 출현에 할
아버지도 뜨악합니다.
"우리는 찬 국수라면 콩국수인데...."

"콩국수? 그게 뭐입니까? 냉면하고는 다른 거입니까?"
"냉면 우리는 안해요. 콩국수 안먹어 봤어요?"

할아버지 이때까지 경상도틱한 무뚝뚝이었습니다. 헌데 제가 그림을 만들어 보려고 할아버지한테 이렇게 귀엣말을 했을 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아버님. 저 할머니 중국에서 오신 것 같은데 콩국수값 제가 낼 테니까 한 번 돈 받지 말아 보셔요. 촬영을 위해서요.."

사실 이 정도 상황설정은 한 번씩 써먹던 겁니다. 그래서 종종 제가 식당 주인한테 대신 돈 낸적 많죠. 손님이 고마와하고 주인은 인심쓰는 척하고, 그렇게 물흐르듯 가면 되거든요.

  헌데 이 할아버지 갑자기 뭐에 맞은 듯한 표정입니다. "아하.. 맞다 아하 맞다.."를 연방 토해내더니 예상치 못한 발언을 합니다. " 당신 말이 맞다. 내 오늘 사람 노릇 못할 뻔 했다. 나는 그냥 웬 뜨내기고..하고만 생각하고 있었다. 내 장사하는 동안 사람 완전히 베려 부렸구만. 맞다... 아하 맞다.."

이거 또 불안해집니다. 웬 오버? 고향은 연길이고, 지금 한국에서 어린애 봐 주는 일로 직업을 삼고 있다는 연변 할머니가 평생 처음 먹어 본다는 콩국수를 맛있게 드신 후에 꼬깃꼬 "할마이. 그냥 가이소. 오늘은 내가 대접할께."

"아니오.. 무슨 말씀을... 여기 있슴다."
"허허 아이라카이... 오늘 콩국수 첨 먹었다카이 내 기분이 좋아서.,.."

이쯤 되면 할머니가 머리를 깊게 숙이면서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나가 주면 PD의 연출 의도와 맞아 떨어지는데 이 할머니도 보통 할머니가 아닙니다.

"내 태어나서 지금꺼징 공짜 밥 먹은 적 없슴다. 받아 주세요."
"아따 할마이 참말로... 그냥 가라카이."

두 분다 정색을 합니다. 할머니는 기필코 돈을 내겠다는 것이고 할아버지는 그 돈 받으면 큰일난다는 듯 손사래를 칩니다.

"이 돈 낼만큼은 나도 돈 법니다."
" 나도 할마이 돈 안받아도 먹고 살만큼은 벌어요." 경상도 할아버지답게 금방 언성이 높아집니다. 내가 들을 때 할머니가 기분 나쁠 정도로 말입니다. 잘못하면 분위기 이상해지겠다 싶어 할아버지 옆구리를 찔렀지요. "너무 무리하게 하시지는 마세요." 그러자마자 할아버지 내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어이 PD 양반. 내가 지금 당신 촬영하라고 내 이러는 줄 알아. 사람을 뭘로 보고 이러는 거야."

PD로서 젤 무능해 보이는 순간은 아무런 개입도 못하고 눈앞에서 일어나는 장면들에 카메라만 왔다갔다 하는 때죠. 두 노인의 실랑이는 끝없이 계속됐습니다. 나중엔 할아버지가 주방으로 도망가버립니다. 할머니가 옳다구나 싶어 테이블 위에 돈을 내려놓고 나가려 하자 이번엔 부엌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득달같이 달려옵니다. "빨리 가라 카이 뭐하능교." 싸움은 연변 할머니가 "난 밥 얻어먹는 거 싫습니다."라고 자존심을 내세우자 경상도 할아버지도 목소리를 높입니다.

"지금 할마이가 불쌍해 보여서 내 이라는 거 아니요. 보아하니 내하고 동갑뻘인데 우리 또래 참 힘들게 살았잖아. 할마이는 또 고향 떠나와서 고생하잖아. 우리도 아직 일 못놓고 장사하잖아. 동갑내기 친구한테 밥 한 그릇 대접하겠다는데 그기 그리 고깝소?"
"그래도..... "
"그래도는 뭐가 그래도야. 지금 할마이 내를 뭘로 보고 이러는 기야."

순간 할머니의 눈에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습니다. 이제는 돈을 그냥 쥔채 할아버지의 말을 듣고 섰습니다. 할아버지는 계속 씩씩거리면서 뭐라뭐라 말씀을 계속하십니다. 그걸 들으면서 할머니의 굳은 얼굴이 펴지는 것을 봅니다. 나이 일흔에 조국은 조국이되 만리타국보다 못한 조국을 찾아와서 친손주도 외손주도 아닌 남의 손주를 보면서 돈 50만원 받고 있는 한 할머니, 사소한 호의에도 자기를 무시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민감함으로 날이 서 있던 할머니의 태도가 그제야 누그러지는 것을 느낍니다.

결국 할아버지가 이겼습니다. 몇 번이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를 되풀이하던 할머니는 결국 돈을 치마 주머니에 되돌리고 식당에 들어올 때의 그 쭈뼛함 대신 가벼운 발걸음으로 문 밖으로 나섰습니다. 그때 할머니의 그렁그렁해진 눈망울과 뭔가가 치오르는 것을 억지로 누르는 듯 꿈틀대던 입술을 생각하면 지금도 가슴 한켠이 짠해 옵니다.  할아버지는 그때 할머니에게 당신의 지갑을 여는 대신 마음을 열어 달라고 그렇게 승강이를 벌였고, 결국 그 진심이 할머니에게 전달된 셈이었지요.  사람의 마음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광경을 눈 앞에서 지켜보았던 그날의 오후는 제게 좀처럼 잊을 수 없는 기쁜 추억으로 남았습니다.

얼마 전 다시 그 식당을 들렀을 때 저는 그 할머니가 다시 오신 일이 있는가를 여쭈었습니다. 아닌게아니라 할아버지도 그 할머니를 꽤 기다렸다지요. 언제 다시 오면 보쌈이라도 대접하려고 그랬는데..... 하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번도 그 할머니는 오시지 않았답니다. 지금 그 분은 중국으로 돌아가셨을까요. 아니면 서울 하늘 아래 어딘가에서 어떤 갓난 아이와 씨름하고 있을까요.



* 이 글을 보다가 눈물이 주루룩 흘러버렸습니다. 그냥 여기에 퍼왔습니다. 70대 식당 할아버지의 말에 묻어(o) (뭍어 (x)) 있는 인생의 깊이를 가늠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저는 아직 인격수양을 더 많이 해야 할 것 같습니다.

* 링크된 원글자는 '긴급 출동 SOS 24' 의 PD중 한 분인 것 같더군요.
IP : 134.155.xxx.220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저도
    '08.2.7 3:28 AM (67.85.xxx.211)

    다른 곳에서 읽었는데 다시 읽어도 눈시울이 뜨듯해지는군요.
    김형민 피디십니다. 저도 이분 글, 참 좋아합니다...

  • 2. ....
    '08.2.7 2:29 PM (211.48.xxx.113)

    좋은글 감사합니다..
    저는 아직 젊다면 젊은데..요즘 왜이리 눈물이 많아 지는지 모르겠어요.
    어젠..아이에게 플란다스의 개를 읽어주다가 제가 대성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ㅠㅠ..

  • 3. 베를린
    '08.2.7 6:08 PM (134.155.xxx.220)

    다른글님의 댓글은 비록 김형민 피디의 글이긴 하지만 제가 옮긴 본문과 상관없는 정치적인 글을 링크하셔서 삭제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여기 글에 왜 민노당 해산에 관한 글을 링크시키는거죠?

  • 4. 다른글
    '08.2.7 6:14 PM (195.214.xxx.122)

    죄송합니다. 글 삭제했습니다. 원글님 의도와 다른 댓글 올린 점 사과할게요.

  • 5. 흠..
    '08.2.7 7:00 PM (59.6.xxx.207)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듯 합니다.
    심성수련이 따로 없네요.
    갑자기 제 가슴까지 촉촉해져옴을 느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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