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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민, 나는 야구선수였다(펀글) 엄청 길어요...
풍운아의 사전적인 의미는 ‘좋은 때를 타고 활동하여 세상에 두각을 나타내는 사람’이지만
요즘에는 ‘우여곡절을 겪은 사람’의 의미로 바뀌어 쓰이는 게 일반적이다.
‘야구선수 조성민’은 세상에 두각을 나타냈고 ‘야구인이 아닌 조성민’은 세상의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올해를 끝으로 유니폼을 벗게 된 조성민은 야구선수로 남고 싶어 한다.
영광과 좌절을 뒤로 한 채 조성민이 지난 20년의 시간을 떠올리며 마침내 입을 열었다.
조성민은 약속장소에 먼저 나와 있었다. 약속시간은 오후 2시.
시곗바늘은 오후 1시 45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하얀색 재킷에 청바지를 입은 조성민의 얼굴은 밝았다.
키가 190cm를 넘는 한국인은 흔치 않다. 조성민의 키는 194cm다.
멀리서도 그는 한눈에 들어왔다.
11월 8일 서울 압구정동의 M카페에 들어서자 사람들이 “조성민”이라고 소곤대는 소리가 들렸다.
이때 조성민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조성민의 목소리만 들렸다.
“이사 잘했냐. 목소리가 피곤하네. 넌 뭐 연락 없어? 인터뷰 중이니까 다시 전화할게.”
카페 M
@친구의 전화인가.
(백)재호다. 챙기는 후배가 재호 한 명밖에 없다.
@한국시리즈를 봤나.
2승2패까지 봤다. 시리즈 일정을 잘 몰라 월요일에 쉴 줄 알았는데. 5차전 이후에는 보지 못했다.
@한화가 플레이오프에서 탈락해 아쉽지 않았나.
내가 뛴 것도 아닌데. 솔직히 아쉽지 않았다.
@올해 한화 노장투수들의 투구는.
올시즌은 확실히 구위가 많이 떨어졌다.
(송)진우 형은 스피드가 아닌 제구력으로 승부했는데 타자들이
스트라이크존에서 조금 빠지는 공에는 손을 안 대니까 불리할 때가 많았다.
겨울 캠프 때도 아파서 공도 많이 못 던졌고. 그래도 베테랑답게 팀에 보탬이 되는 투구를 했다.
@노래와 색소폰 연주 실력이 상당하다.
색소폰은 일본에서 잠시 배웠다.
1998년 TV 프로그램 〈이소라의 프로포즈〉에 출연해 연주한 적이 있다.
초보라 내 색소폰을 써야 했는데 미처 준비하지 못해서 방송 관계자들이 급하게 빌려 왔다.
역시 손에 익지 않아 잘 안 됐다.
영화 〈타이타닉〉 주제가를 불었는데 관객들이 멜로디를 제대로 알아 듣지 못했다(웃음).
이후로는 색소폰을 배우지 못했다.
노래는 최근에 거의 하지 않았다. 이제는 여유도 없고.
노래를 듣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는데 힘든 일이 많다 보니 노래 듣는 것도 귀찮고.
요즘에는 팝송을 다운받아 듣거나 좋아했던 일본노래를 듣는 정도다.
한국가요는 아는 곡이 없다. 가수들 이름은 아는데 그 노래가 그 노래 같아 곡명을 모르겠다.
이제 아저씨가 다 돼서.
@최근에는 어떻게 지냈나.
10월 22일 구단 (방출)발표가 났지만 내가 그 전에 구단에 통보했다.
최동원 2군감독과 면담하면서 “그만 하겠습니다. 몸도 안 좋고 3년 공백이 컸습니다.
극복한다고 제 나름대로 한다고는 했는데 노력으로 되는 게 아닌 것 같습니다”라고 말했다.
1년 동안 어딘가 비비고 들어가 야구를 할 수도 있겠지만
내가 나서는 것보다는 어린 선수들이 경험을 쌓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음을 접었다.
한화에서 느낀 점도 많았고. 최근에는 쉬면서 미래에 대한 구상을 하고 있다.
@한화에서 느낀 점이 많았다고 했다.
한화 2군에 있으면서 선수들이 훈련하는 것을 봤는데
‘아, 저 선수는 조금만 신경 쓰면 굉장히 잘될 선수인데 기회가 없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말하면 뭐하지만 제대로 된 지도를 받지 못해 고생하는 선수들이 많았다.
그러다 방출되는 거 보면 가슴 아프고. 한화는 베테랑들이 많아
자리 하나 차고 들어가기가 힘들다. 기회가 없다.
야구가 그렇다. 1군에 있으면 1군, 2군에 있으면 2군 선수가 된다.
2군 선수들도 그냥 2군에 안주한다. 어떤 선수는 1군에 올라가기 싫다고 말하기도 했다.
선배들 심부름만 하니까.
한화는 중간이 없다. 선수 능력도 차이가 크게 난다. 내가 볼 때는
2군 코칭스태프가 실력도 있고 훌륭한 분들이지만
인력이 달려 세밀하게 선수들을 지도하고 관리하기가 힘든 것 같다.
내가 사라진다고 크게 티가 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조금이나마 도움을 주고 싶었다.
@윤규진이나 김경선 등이 예가 될 수 있다.
베테랑들이야 그동안 해온 노하우가 있지만 어린 선수들은 자기 것이 없다.
슬럼프가 오면 길고, 좋을 때와 안 좋을 때 왜 그런지 이유를 모른다.
그러다 보면 기복이 심해지는데 이것을 잡아 줄 코치가 부족하다.
제구가 들쭉날쭉한 (윤)규진이는 투구폼을 교정하고 기본기를 가다듬으면 잘할 수 있는 선수다.
좋은 체격이 아닌 (김)경선이는 좋은 공을 던지는데 이것만으로도 타고난 선수다.
경험과 배짱을 키우다 보면 성과가 있을 것이다.
반복된 이야기지만 다른 팀은 몰라도 한화는 이런 선수가 많다.
그러나 프로의식이 결여돼 있는 일부 선수도 있다. 나는 일본에서 2군에 있으면서 많은 선수를 봤다.
그때 열심히 땀을 흘린 선수들은 지금 요미우리 1군에 자리를 잡았다.
스즈키 다카히로는 드래프트에서 꼴찌였는데 현재 요미우리 외야수로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스즈키는 발이 아주 빨랐고 매우 열심히 했다. 남들이 잘 때 새벽 1시까지 훈련했다.
황금세대 92학번
@어릴 때부터 투수에 매력을 느꼈나.
투수에 끌렸다기 보다는 유치원 때부터 야구와 가깝게 지낸 게 야구를 하게 된 계기가 됐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플라스틱 방망이와 공을 선물하셨는데 발판을 밟으면
공이 공중으로 튀어올라 때릴 수 있게 만든 장난감이었다.
용마초등학교 1학년 때는 야구만 하고 놀았다. 이웃 동네로 경기를 하러 가기도 했는데
그때 고교 선배인 박재용(전 해태)을 만났다. 4학년 때 둔촌초등학교로 전학가 야구부에
들면서 본격적으로 야구를 했다.
1980년대 야구의 인기는 대단했다. 10명을 뽑는 야구부 모집에 여학생 2명을 포함해 100명이 몰렸다.
당시 체육부장이 키(149cm)가 큰 나를 보고 “꼭 야구부에 오라”고 했다.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뛰다 6학년 때 투수를 맡았다.
@투수가 좋았나.
야구는 에이스와 4번 타자 아닌가. 투수도 좋았지만 강한 펑고를 받는 내야수가 싫었다.
신일중에 입학해서 선생님이 어떤 포지션을 봤냐고 얘기하라고 했는데 “외야수와 투수를 했다”고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팔꿈치가 아팠다.
친구들과 비치볼로 배구를 했는데 무리하게 팔을 쓰다 뼛조각이 떨어져나갔다. 그때부터 침을 맞았다.
@야구 우상은 누구였나.
투수는 박철순(전 OB)과 김시진(현대 감독)이었다.
김시진은 삼진 잡는 능력이 뛰어났다. 타자는 김봉연(전 해태)과 이만수(SK 코치)를 좋아했다.
@재활에 도움을 준 최동원 2군 감독은.
난 그 시절 롯데를 좋아하지 않았다. 최감독님이 던지는 폼이 내가 보기에는 웃겼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던질까”하고 궁금해 했다.
1980년대 인기만화 〈공포의 외인구단〉에 나오는 마동탁과 최감독님이 닮았다.
난 마동탁이 싫었는데 안경을 쓴 최감독님은 완벽한 현실의 마동탁이었다.
한화에서 만났을 때는 이런 이야기를 안 했다(웃음).
@신일고 시절 조성민은 최고의 투수였다.
그땐 내가 최고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때가 가장 제구력이 좋았다.
슬라이더는 스트라이크와 볼을 자유자재로 넣을 정도였으니.
투심도 배웠는데 유리한 카운트에서 던지면 무조건 3루땅볼이었다.
직구와 슬라이더, 투심만으로 얼마든지 타자를 상대할 수 있었다.
누구든 내 볼을 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신일고 야구부 생활은 어땠나.
타자들이 잘 쳤다. (설)종진(현대 2군매니저)이가 주장을 하고 1번 타자를 맡았다.
선수들이 정말 착했다. 집과 학교, 야구밖에 몰랐다. 팀 연습이 끝나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오후 9시까지 불을 켜놓고 자발적으로 운동했다.
다른 학교 선수들은 여학생도 만나고 담배도 피우고 그런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우리는 정말 야구밖에 몰랐다.
@신일고에는 2년 후배인 김재현(SK)과 조인성(LG)이 있었다.
(조)인성이는 고교 때 손목이 좋지 않았다. 힘은 좋았는데 송구가 약했다.
1991년 3학년 때 장명부(전 삼미) 씨가 인스트럭터로 온 적이 있었는데 그때 많이 배웠다.
손목을 세우고 고정해 던져야 한다는 것을 배우고 나더니 그때부터 ‘앉아 쏴’가 됐다.
(김)재현이는 뺀질뺀질했다(웃음). 그러나 재능이 있었다.
3학년 외야수들이 부진할 때 1학년인 재현이가 출전해 다이빙 캐치도 하고 장타도 치면서 두각을 나타냈다.
@1990년대 초반 임선동(휘문고), 손경수(경기고)와 고교투수 ‘빅3’로 꼽혔다. 타자로는 광주일고 박재홍이 있었다.
사실 나는 그때 (손)경수는 생각도 안 했다.
물론 스카우트들이 경수의 공이 빠르다는 점을 봤겠지만 제구력이 좋지 않았고
그렇다고 경기에서 특출나게 던지지도 않았다. 경기고 성적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전국 고교에 스타가 한 명씩 있었다.
서울에는 신일고에 나와 종진이, 휘문고 임선동, 경기고 손경수, 배명고 김상엽, 중앙고 유진호가 있었다.
지방으로 가면 광주일고 박재홍, 부산고 염종석, 경남상고 곽재성과 차명주, 원주고 안병원, 경북고 최재호, 대구상고 전병호, 춘천고 박태순, 인천고 최원호, 대전고 정민철, 공주고 박찬호와 노장진 등이 있었다.
그때는 찬호보다 장진이가 더 잘 던졌다. 그리고 또 누가 있었더라. 그
때는 어느 학교와 붙어도 지금 이야기한 친구들만 잡으면 이긴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최고의 라이벌은 임선동이었나.
나는 (임)선동이만 생각했다. 선동이는 볼이 빠른 데다 제구력까지 좋았다.
그래서 휘문고와 상대할 때는 선동이 볼에 적응하려고
우리 팀 투수들이 마운드 앞에 나와서 던지는 공을 타자들이 때리는 연습을 했다.
1991년 제21회 봉황기대회 8강전에서 선발 맞대결을 벌인 적이 있는데 우리가 4-1로 이겼다.
나는 그때 선동이에게 1점 홈런을 맞고 승리투수가 됐다.
봉황기대회 결승에서는 선린상고를 12-1로 꺾고 우승했고
황금사자기대회 결승전에서는 재홍이가 있는 광주일고에 14-2로 크게 이겼다.
1991년 봉황기와 황금사자기 2관왕은 지금도 기억에 남는다.
@그런데 MVP는 늘 설종진이던데.
당시에는 MVP를 감독이 뽑았다. 박천서 감독이 봉황기가 끝나고
내게 “네가 최우수투수상을 받고 MVP는 종진이를 주자”고 했다. 종진이가 잘하기도 했지만
주장이라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황금사자기를 우승했는데 또 MVP를 종진이를 주더라.
그땐 내가 패할 뻔했던 8강전 한서고전에서 동점홈런도 쳤고 결승전에서
승리투수도 돼 ‘이젠 나를 주겠거니’ 했는데 아니었다.
그래서 어린 마음에 완전히 삐쳤다. 지금도 그때 우승사진을 보면 얼굴이 삐친 내 사진이 나온다(웃음).
너무 열이 받아 우승 축하연에 참가도 안 하고 그냥 집으로 가버렸다.
@1991년 청소년대표로 미국에 가면서 외국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었다.
미국에서 열렸던 한미일 고교야구선수권대회였는데 나와 (박)찬호, 선동이가 눈에 띈 모양이다.
LA 다저스에서 신분 조회가 들어왔고 찬호는 그때부터 미국에서 작업이 들어갔다.
그때 우리는 연고가 있는 집에 민박을 했는데 찬호가 묵었던 집이 스티브 김의 집이었다.
찬호가 그때 아마 미국 진출에 관한 이야기를 했을 것 같다.
나는 막연히 그냥 야구 잘해서 나중에 해외에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대학 3학년 때부터 스카우트들이 접근하기 시작했다.
@1996년 발행된 박찬호의 자서전 〈Hey, Dude〉에는 박찬호가 조성민에게 전화를 걸어 운동여부를 확인하는데.
난 그것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아 찬호와 사이가 안 좋다.
찬호는 어떻게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나는 찬호에게 감정이 좋지 않다.
청소년대표 시절 찬호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에 올라왔는데 잘 곳이 없었다.
그래서 내가 우리 집에 가자고 해 이틀을 재워준 적이 있다. 대학가서도 찬호에게서 자주 전화가 왔다.
통화내용은 “넌 뭐하냐”(박찬호) “어, 나는 집에서 쉬고 있어. 아픈 데 없냐”(조성민) 등의 대화였다.
나는 정말 친구로서 찬호의 어깨가 아픈 것을 걱정하고 챙기고 그랬는데
나중에 책이 나오고 아는 기자를 통해 알아본 결과
내가 운동 하나 안 하나를 확인하려고 찬호가 전화를 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찬호가 미국에 가는 것도 신문을 보고 알았다.
찬호가 미국으로 떠나는 날 신일고 동기들과 송년회를 했는데 동기인 종진이가 늦게 왔다.
이유를 물었더니 종진이가 “너 몰랐어? 찬호, 미국 들어가잖아” “뭐?”
다음 날 신문을 보니 ‘찬호, LA 입성’이라고 대문짝만하게 실려 있었다.
그때 나는 찬호를 친한 친구로 생각했는데 공항간 친구는 종진이와 차명주밖에 없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찬호한테 이 정도밖에 안 되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지만. (잠시 침묵하다)친구한테 배신 당한 느낌이었다.
@고려대 시절은 어땠나.
고교 때보다 구속은 빨라졌는데 고교 졸업 이후 허리수술을 받아 제구력과 변화구는 나빠졌다.
허리수술 이후 3주쯤 지나 피칭을 하는데 슬라이더와 투심의 투구감이 사라졌다.
슬라이더 각도 이상했고 투심도 그냥 평범한 직구처럼 날아갔다.
1994년과 1995년 고려대는 2년 연속 대학 3관왕에 올랐다.
내가 1학년 때 (이)상훈(전 LG) 형이 있었는데 우승 복이 없었다. 준우승만 4번 했다. 2학년 때도 우승을 못했는데 3학년 때부터 나와 후배인 (손)민한이가 마운드를 책임지며 우승 횟수가 늘었다. 당시 사령탑이던 조두복 감독이 4학년 때 나를 마무리투수를 시켰는데 목표였던 30승에 2승만을 남겨 놓고 있는 상황이어서 아쉬웠다.
테마곡 애국가
-일본행을 결정한 이유는.
처음에는 미국에 가고 싶었다. 메이저리그 토론토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나섰다.
1994년 대학 3학년 때는 집으로 스파이크와 티셔츠를 보내주기도 했다.
스카우트와 만나기도 했는데 아버지가 갑자기 요미우리 이야기를 했다.
나는 요미우리가 명문이라고 알고는 있었지만 일본야구는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께 “무슨 요미우리”냐고 했는데 이미 가계약이 끝난 상황이었다.
거기서 내가 뭐라 하겠나. 아버지는 “일본 갔다가 미국가면 된다”고 설득하셨고
옆에 계신 어머니는 “일본이 가깝고 좋잖아”라고 거드셨다.
당시 찬호가 미국에 갈 때 10억 원을 받고 갔는데 나는 찬호보다 많이 받지 않으면 가지 않겠다고 했다.
마침 요미우리가 13억 원 선을 이야기했고
“미국에 가면 찬호 다음이지만 일본은 네가 처음”이라는 아버지의 설득에 홀라당 넘어갔다(웃음).
-만약 일본이 아닌 메이저리그로 갔다면.
미국에 갔다면 또 달랐을 수도 있겠다.
결과론이지만 부상도 빨리 오지 않았을 것 같다. 일본에 가서 좋아진 것도 물론 있다.
단순히 찬호와 비교한다면 찬호는 1994년에 공이 빨랐지만 일본에서 찬호 정도였으면 경기에 못 나갔다.
내가 활동했던 1990년대 중반 요미우리의 나가시마 시게오 감독은 볼넷을 아주 싫어했다.
투수들이 볼을 던지면 더그아웃에 있는 감독 눈치를 볼 정도였으니까. 찬호였다면 교체됐을 것이다.
내가 볼 때 찬호는 토미 라소다 감독이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점수를 주든 볼넷이 나오든 경험을 쌓게 해준 게 오늘의 찬호를 있게 했다고 생각한다.
내가 미국 갔으면 또 모른다. 미국은 투구수를 관리해 주니까.
나는 일본에서 한 경기에 많으면 130개 이상, 조금 던져도 110개를 던졌다.
1998년에도 한 경기를 빼고는 이긴 경기에서는 거의 완투했다.
-1995년 요미우리와 계약한 뒤 1년 반 동안 2군 생활을 했다.
2군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관계자들이 하는 말이
“어떻게 이런 몸을 갖고 야구를 했는지 불가사의하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의미로 들렸다.
첫 번째는 “이 몸으로 볼을 던진 게 놀랍다”는 것이고 두 번째는 “이게 무슨 몸이냐”는 것이었다.
요즘도 해외에 진출하는 선수들에게 이야기하지만
요미우리 선수들은 몸이 안 된 상태에서도 피칭을 세게 하는 경우가 있다.
요미우리 연습장의 포토 라인에서는 사진기자들이 투수가 공을 들기만 해도 찰칵찰칵 사진을 찍는다.
그때 감독이 뒤에서 보고 있으면 선수는 뭔가를 보여줘야 한다.
나도 몸은 안 됐지만 힘차게 던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무리해서 던지니까
몸이 좋지 않았지만 어떻게 보면 데뷔 초기에 2군에 있었던 게 내게는 득이 됐다.
-어려움은 없었나.
알고 보니 요미우리에는 라인이 있었다.
나를 반대한 라인은 선동열 선배를 주니치에 빼앗기고 문책 당한 뒤 새롭게 들어선 라인이었다.
그러니 내가 얼마나 눈엣가시였겠나.
나중에 그 라인이 2군 코치까지 내려왔다. 그래서 내가 2군에서 열심히 공을 던졌는데도
1군에 “조성민은 형편 없다”고 허위 보고를 했다. 이것 때문에 내 통역원이 많이 싸우기도 했다.
-1997년 후반기 마무리로 뛰었다.
1997년 2군에서 19이닝 동안 무실점하고 있는데 1군 마무리 쪽에 기회가 생겨 올라갔다.
7월 초 삿포로 순회경기인 주니치전에서 2-1로 앞선 9회 등판해
선동열 선배가 지켜보는 가운데 첫 세이브를 올렸다.
-
1998년 전반기에만 7승을 올리며 주목을 받았다. 당시 피칭스타일은.
마무리투수일 때는 시속 153km까지 나왔다. 선발로 뛰던
1998년에는 시속 146~147km의 공을 던졌는데 중계를 보면
공 끝이 워낙 좋아서 공이 살아 들어오는 것 같았다.
포수가 직구 사인을 낼 때는 안쪽 바깥쪽 없이 그냥 직구였다.
타자들이 치면 파울 아니면 헛스윙이었으니. 카운트를 잡기도 쉬웠다.
유인구로 포크볼을 던지면 방망이가 그냥 따라 나왔고 직구를 던지면 내야플라이였다.
야구를 참 즐겁고 재미있게 했다. 나는 테마곡으로 애국가를 골랐다.
도쿄돔에 “피처, 조성민”이라는 아나운서의 목소리와 함께 애국가가 울려 퍼지게 하고 싶었다.
-타격에도 소질이 많았다. 일본통산 타율이 3할4푼1리(44타수 15안타)다.
1998년 5월까지 타율이 7할이었으니까. 투수는 완투해도 많아야 2번이나 3번 타석에 들어선다.
5타수 5안타까지 쳤다. 한번은 야쿠르트전에서 상대 투수가 8번 타자를 피하고 9번 타자인 나와 맞섰다.
그때 ‘너희들이 나를 우습게 봐’라는 마음이 생겼다. 내가 전 타석에서 삼진을 두 차례 당했는데
모두 슬라이더가 승부구였다. 또 슬라이더를 던질 거 같아 기다리고 있다 중전안타를 쳤다.
그때 포수가 일본프로야구에서 가장 머리가 좋다는 후루타 아스야여서 기분이 좋았다.
야쿠르트전에서는 타석에서 포수의 움직임을 힐끗 보곤 했다. 코스를 예측하려고 그랬는데
그럴 때면 후루타가 “어이, 성민이 그만 좀 보지”라고 말했다.
그해 히로시마전에서 요미우리가 대승할 때 타석에 들어서려 하니
나가시마 감독이 “그냥 삼진 먹고 나오라”고 했다. 난 그때 방망이를 잡으면 미친 듯이 치고 싶었다.
그래서 안타를 치고 출루했는데 공교롭게 우리 팀 1번 타자가 빈볼을 맞았다.
공수가 교대되고 욕을 바가지로 먹었다. “쓸데없이 안타를 쳐 동료가 맞았다”는 것이었다.
일본 해설가들도 그때 조성민은 투수이면서도 공격을 좋아한다고 말하곤 했다.
만약 내가 5년만 젊어 한화에 입단한다면 타자로 전향하고 싶다.
한화에서도 더그아웃에서 타자들을 보면 “왜 저 볼을 못 치나”하고 답답한 적이 있었다.
그래서 조언도 했는데 그 말을 듣고 잘 치는 타자도 있었다.
-당신의 공을 가장 잘 공략했던 타자는.
야쿠르트의 내야수 도바시 가쓰유키다.
방망이를 짧게 잡고 볼카운트가 불리하면 쳐내는 스타일이라 상대하기가 힘들었다.
외국인선수들은 크게 휘두르기 때문에 포크볼을 던지면 대부분 삼진이었는데 도바시는 그렇지 않았다.
-정민철은 SPORTS2.0과의 인터뷰에서 요미우리만의 이상한 차별이 있다고 했다.
요미우리만의 문제는 아니다. 한국에도 있다. 한국이 더 심하다.
요미우리는 선수끼리는 그런 게 없다. 이런 말 하면 뭐하지만 한국은 선수끼리 따돌린다.
-정민철, 정민태와 같은 팀에서 경쟁 했는데.
처음에는 (정)민철이가 요미우리에 오는 게 싫었다.
같은 나라 선수끼리 자리를 놓고 경쟁하는 것은 좋지 않다. 민철이가 올라가면
내가 내려가고 그 반대의 경우도 있었다.
나중에 민철이가 (정)민태 형이 오는 것을 싫어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민태형이 올 때 싫었던 건 인터뷰 내용 때문이었다. 자신만 생각하고 프로 세계는 냉정하다는 식의 내용이었는데 그런 선후배 관계가 어디 있나.
한국인 투수 3명이 싸우면 희생되는 것은 결국 한국인이다.
(이)병규(주니치)와 (이)승엽이가 같은 팀에 있다고 생각해 보라. 민철이와는 잘 지냈다.
-다치기 쉬운 투구폼이라는 말이 있었다.
나는 하체를 많이 쓰는 투구폼이 아니다.
밸런스를 잡아도 상체만 잡지 하체는 잡지 않았다.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상체만 맞추면 잘 던졌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하체를 안 잡고 상체로만 던지려고 하니 공의 스피드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정말 중요하게 느낀 게 하체였다.
일본에서 던질 때는 하체가 좋아서 상체만 쓰면 됐는데 한국에서는 상체만으로는 안 됐다.
나는 팔꿈치를 유난히 많이 쓰는 편이었다.
-요즘 이승엽의 활약을 보면 어떤가.
옛날 생각 난다. 한창 잘할 때니까 좋을 것이다. 일본에서는 잘하면 엄청 띄운다. 아마 승엽이도 부진할 때 느꼈을 것이다. 병규도 잘하니까 좋다.
-1998년 7월 올스타전에서 오른쪽 팔꿈치를 다쳐 시즌을 마감했다.
결국 마지막 불꽃이 됐다. 사실 올스타전 전부터 팔꿈치가 좋지 않았다.
투수가 갑자기 좋아지는 경우가 있는데 그때 갑자기 좋아진 공을 던지면 끝나는 거다.
좋아졌던 것은 다치려고 그랬던 거다.
갑자기 공 스피드가 나오는 듯하지만 다음 날 어깨가 나간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안 던지고 관리했으면
그 시즌은 마무리하지 않았을까 하는 마음이 든다.
외국에 있다 보니 매스컴이 선수를 망치는 경우가 많다. 유명인도 매스컴이 만들지 않나.
조금 더 여유 있게 재활했다면 롱런할 수 있었는데
한국 언론은 ‘조성민, 언제 부활하나’ 등 찬호와 비교하는 기사를 많이 썼다.
나도 마음이 급해지니까 빨리 던져야 했고. 재활기간을 길게 가졌어야 했는데.
-일본야구의 특징은.
나중에 후배들에게 일본에서 배운 내용을 가르쳐 주고 싶다.
일본어를 배운 것도 도움이 될 것이다. 일본야구는 한마디로 철저하다.
투수들이 상대타자의 약점을 집요하게 파고든다.
-한국으로 돌아와 일본에서 스트레스가 많았다고 했다.
스트레스를 받고 즐거운 야구가 안 되니까 화가 났다.
내가 하고 싶은 야구가 이런 것이 아닌데. 더 했다가는 성격만 버리겠다 싶었다.
그래서 요미우리에 먼저 퇴단을 요청했다.
계약기간은 1년이 남았지만 나머지 연봉을 포기했다. 요미우리는 나를 보내면서 조건을 걸었다.
한국이든 미국이든 어디를 가든 입단 협상을 할 때 요미우리를 통할 것
그리고 일본 구단과는 1년 안에 절대 계약하지 못한다는 거였다.
-2003, 2004년 프로야구 신인드래프트를 신청했다.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사실 미국에 가려고 마음먹고 있었다.
지인을 통해 미국의 스프링캠프에 테스트를 받아 들어가려고 했는데
한국에 와 좋지 않은 일이 터지면서 시기를 놓쳤다.
미국에 가지 못해 드래프트를 신청했다.
하루라도 빨리 구단에 속해 몸을 만들고 싶었다. 혼자 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
-어떤 구단도 눈여겨보지 않았다. 야속하지 않았나.
내가 20년 동안 야구를 했는데 석 달 동안 일어난 일 때문에
야구선수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 가장 실망스러웠다.
한국 야구판이 이 정도밖에 안 되나라는 생각도 들었다.
-최고였다가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은 힘든데.
힘든 일을 겪으면서 주변을 정리했다.
-2005년 한화와 계약했다. 김인식 감독과 어떤 이야기를 했나.
해설을 하다 비가 와서 경기가 재개되기를 기다리다가 더그아웃에서 감독님과 이야기를 나눴다.
전날 어느 투수가 형편 없이 던져 감독님께 “제가 던져도 그 투수보단 잘 던지겠어요”라고 말했는데
감독님이 “그래? 그럼 준비하고 있어. 아깝잖아”라고 하셔서 입단을 준비하게 됐다.
-특별한 노력이 필요했을 것 같다. 그때 심정은.
그때도 그랬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내가 야구를 다시 시작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 ‘야구선수 조성민’이라는 이름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최진실 전 남편 조성민’“아, 좋지 않은 그 조성민”뿐이었다.
나는 없어졌다. 나를 찾고 싶었다. 그래서 단 한 개의 공을 던져도 후회가 없었다.
-올해 5월에 부활하는 듯했는데.
그랬는데…. 여러 가지 복합적인 것이 있겠지만 운이 따라 주지 않은 것도 있었고.
잘 모르겠다. 아쉬웠던 점은 조금 더 확실한 기회가 있었다면 나은 결과가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내가 주위의 기대에 못 미친 투구를 해 그런 결과가 나온 것이다.
만족스럽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성민은 야구선수였다는 사실을 야구팬에게 심어준 것으로 만족한다.
나에게 기대를 건 분들은 더 큰 결과를 원하셨겠지만
몸 상태 등 여러 가지가 한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더해 봐야
자존심만 상하고 추해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구인으로 하고 싶은 일은.
기회가 된다면 후배 양성에 힘을 쏟고 싶다.
자신도 있고 후배들에게 어떻게 야구를 가르쳐야 하는지 나 나름대로 갖고 있는 게 있다.
아쉽게 사라져가는 후배들이 줄어들었으면 한다.
일단은 먹고 살아야 하니 나름대로 안정이 되면
어렵게 운동하는 선수들에게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
글러브를 벗고
-기억에 남는 책이나 영화는.
최근에는 〈말을 듣지 않는 남자, 지도를 읽지 못하는 여자〉라는 책을 읽었다.
‘남자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을 여자는 저렇게 여기는구나’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영화는 〈패션 오브 크라이스트〉를 가슴 아프게 봤다.
-잘생긴 외모가 짐이 됐나 아니면 무기가 됐나.
글쎄, 짐이 된 적은 없다. 무기까지는 그렇고 득을 본 것은 있다. 사회가 그렇지 않나.
첫인상이 깔끔하고 외모적으로 뛰어나면 이런저런 이득을 본다.
내가 사기꾼이나 제비처럼 생긴 것은 아니니까(웃음). b
-여전히 여성팬들이 많다.
잘 모르겠다. 외모로 좋아하는 분도 있겠지만
야구선수로 좋아해주시는 분이 정말 좋다.
신일고 시절에도 따라다니는 여학생들이 없었다.
근처 여학교에서 들은 ‘조성민이 유명하다’는 얘기 정도였다.
-기억에 남는 팬은.
일본에 있는 팬 가운데 두 명이 있다.
여성 두 분이었는데 한 분은 키가 아주 크고 한 분은 키가 아주 작았다.
요미우리에 입단해서부터 지금까지 팬이다. 가끔 한국에도 오고 결혼식 때도 왔다.
내가 일본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는 공항에서 울고불고했다.
-8월에 전 부인인 최진실 씨가 TV 프로그램 〈무릎팍도사〉에 출연했다. 혹시 봤나.
무릎팍도사는 보지 않았다. 난 최진실 씨가 방송이나 신문을 통해 무슨 말을 하든지 신경 쓰지 않는다.
-그 프로그램에서 최진실 씨는 아들 환희가 유치원에서 따돌림을 당했다는 이야기를 했다.
환희를 보지 못한 지 오래됐다. 찾아가지 않는 이유도 있지만
찾아가서 괜히 얼굴보고 싸우는 것이 싫어서. 좋게 헤어진 것도 아니고.
좋지 않게 헤어졌기 때문에 현재 감정도 좋은 것은 아니어서 부딪치는 게 싫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생각한 게
내가 나중에 아이들이 커 아버지에게 찾아왔을 때
떳떳하고 잘된 아버지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나중에 아이들이 내가 하는 이야기를 이해해줄 수 있으면 좋겠다.
환희, 보고 싶다. 보고 싶지만 참고 있는 거다. 남들은 자식 한번 안 찾아간 아버지라고 욕할지 몰라도 내 가슴은 아프고 걱정도 많이 된다.
-최진실 씨와 헤어진 결정적인 이유는.
나도 쌓인 게 많았고. (잠시 침묵하다가)일단은 성격차이다.
그 안에 내포된 게 많았고 내가 원하는 것과 그 사람이 원하는 것이 다르고.
서로 채워주지 못하고 그런 것들이 쌓이다 보니 어떠한 계기로 (쌓인 게)분출됐다.
그쪽에서 먼저 갈라서자고 했다. 서로 싸우는 과정에서 아이를 생각해 참고 가려고도 해봤는데.
엄마 입장에서 아이들 이야기 많이 하지만
나는 자식 때문에 내 인생 포기해가면서 행복하지 않은 삶을 사는 것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요즘에는 초등학교만 들어가도 자기 인생이다. 잘 자라게끔 해주는 게 부모의 역할이다.
그렇다고 애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자발적으로 커가게끔 키우고 싶다.
내가 힘든 생활을 하다 보면 자식들이 보고 배우는 게 뭐겠나.
-친권을 포기했는데.
친권이라는 게 매우 크게 느껴질 것 같은데 법적으로 알아본 결과
아이가 성인이 될 때까지 거주지에 대한 권리이지
친권을 포기한다고 내 자식이 아닌 것은 아니기 때문에 그때는 친권을 크게 생각 안 했다.
지금도 그렇고. 그냥 성격 모난 거 없이 잘 키워주고 자라주기를 바랄 뿐이다.
-사생활 문제로 네티즌들에게 많은 공격을 받았다.
‘부부 일은 당사자들만 안다’라는 댓글이 있었는데 그게 맞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욕을 하는 사람들은 막상 내 앞에 오면 욕 못한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러면 말 못한다.
왜? 모르니까. 세상 일의 몇 퍼센트를 언론이 담을 수 있겠나.
그 일로 많이 힘들었다. 대인기피증을 겪었다.
예전의 조성민은 하루만 만나도 친구가 됐다.
나는 성격이 낙천적이라 처음 만나도 형, 동생하고 친구하고 그랬다.
그러나 지금은 사람을 가리고 경계한다. ‘나한테 왜 접근했을까’ 하는 식으로 변했다.
지금은 주위에 만나는 사람이 없다. 친구도 진짜 친구라고 생각하는 친구 한두 명이다.
자연스럽게 정리가 된다. 나는 예스면 예스, 노면 노다. 아니라고 하는 사람은 쳐다보지도 않는다.
-언론 보도 가운데 오해되거나 잘못된 내용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잘못된 보도라기보다는 당시 기사가 거의 최진실 씨 입장에서 나왔다.
그쪽은 회사에서 집단으로 대응했지만 나는 언론 대처 능력이 없었다.
나는 수세에 몰렸고 그러다 보니 현재의 아내와 가깝게 되면서 같이 헤쳐나가게 됐다.
아내가 많이 위로해주고 힘들 때 옆에서 많은 힘을 줬다.
-재혼을 했는데.
법적으로는 부부인데 결혼식만 안 했다.
결혼식 계획은 세웠는데 이것저것 하다 보니 틀어지고, 결혼식을 후딱 할 수도 없는 일이고 해서
내년쯤 할 생각이다.
-원래 연상을 좋아하나.
특별히 그런 것은 없는데 (연상이)나랑 맞나 보다.
어린 친구와 만나면 내가 답답하다. 대화할 때도 그렇고
나는 어느 정도 자기가 알아서 할 수 있는 여자가 좋다.
그런데 어린 친구는 100% 내가 챙겨야 한다.
내가 어떤 판단을 하면 “그건 아니다. 힘내라”라고 말하는 사람이 좋은데
어린 친구는 다 나한테 의지하려고 한다.
좋아하는 여성상은 편안한 여자, 남자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여자다.
-슈크림 체인점 사업은.
야구하면서 다 정리했다.
드래프트 신청할 때 마음에 걸린 게 “아니, 무슨 사업하면서 운동을 하느냐”는 말이었다.
정확하게는 테이크 아웃 프랜차이즈 슈크림 파이였다.
빵이라고 하면 그 업계 사람들에게 욕 먹는다.
앞으로도 프랜차이즈 사업 쪽을 생각하고 있다. 배운 것도 많고 하니.
-슈크림 업종을 선택한 이유는.
슈크림을 좋아했다. 일본 슈크림은 맛있다. 크림이 풍성하고 맛도 있다.
마침 내가 고른 브랜드가 일본에서 뜨고 있었다. 매장에 나가서 관찰하니 사람들이 줄을 서서 먹었다.
가장 안 팔려도 3천 개, 많이 팔리면 하루 9천 개였다.
최소 3천 개를 잡고 시작했는데 음식문화가 다르다 보니까….
그게 제대로만 됐어도. 아주 좋은 아이템이었는데.
앞으로 요식업이나 의류 쪽으로 생각하고 있다.
돈을 벌어야지 후배들도 양성한다. 어쨌든 지금은 당장 돈을 벌어야 한다(웃음).
-다시 유니폼을 입고 싶은 생각은 없나.
(단호하게)없다. 몸이 이제는 안 된다. 아픈 것을 참고 하는 것도 한계가 있고 결과도 좋지 않다.
기술로 버틸 수는 있겠지만 그렇게 버텨서 나에게 남는 게 뭐가 있겠나.
-연예계에서 접촉은 없었나.
있었다. 일본 연예계에서 제의가 있었는데 그쪽으로는 별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의 접촉은 없었다. 한국에서 누가 날 쓰겠나. 연예인들 실물로 보면 얼마나 멋진 사람 많은데.
-조성민은 어떤 선수로 기억되고 싶나.
열심히 했던 선수,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던 선수. 그렇게 기억되고 싶다.
많은 사람들이 나를 놀고 먹다가 이렇게 된 줄 안다.
“걔가 뭐 한 게 있는데 일본에서 뭐” 그러는 분들이 있는데 난 노력 많이 했다.
나를 아끼는 팬들은 내가 어떤 삶을 살더라도 응원해 주셨으면 좋겠다.
약력
생년월일 | 1973년 4월 5일
약력 | 둔촌초-신일중-신일고-고려대-요미우리(1996년)-한화(2005~2007년)
주요경력
1991년 봉황기대회 최우수투수상, 최다홈런상, 황금사자기 우수투수상
1992년 대통령배대회 감투상
1994년 백호기대회 최우수선수상, 대학선수권대회 우수투수상
일본야구 통산기록 53경기 11승10패11세이브 방어율 2.84
SPORTS2.0 제 77호(발행일 11월 12일) 기사
1. 이거
'07.11.21 9:26 PM (58.76.xxx.205)http://news.naver.com/sports/index.nhn?category=general&ctg=issue&mod=read&is...
2. 신일고 주변에서..
'07.11.21 10:25 PM (222.101.xxx.187)야구를 너무 좋아하는데다... 신일고 주변에 있는 여고를 나왔습니다.
정말 대단한 선수였죠.
제가 인생을 그렇게 많이 산 건 아니지만...
근데 "그때 최고"였던 거지...
"영원히 최고로 남을" 선수는 못되는 이유가 인터뷰에서도 나타나는 거 같네요.
전설의 92학번 중에 현역으로 제대로 뛰는 선수... 몇 안되는 건...
정말 안타까워요.
박찬호선수도 안좋은 소리 들리고... 그나마 선발로 뛰던 정민철 선수 마저 플레이오프에서 삐끗하고... 임선동 선수도... 차명주 선수도...
한국 야구... 어쩌고를 떠나... 제 인생에서 찬란하게 빛나던 시절의 별들인데..
잘 살고 있다는 뒷얘기를 들을 수 있으면 좋겠네요.
자동차 영업 잘하고 있다는 마낙길 선수처럼요... ㅎㅎㅎ3. ..
'07.11.21 10:44 PM (211.207.xxx.157)과거야 어떻든 전 야구선수 조성민으로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
4. 나의
'07.11.21 10:48 PM (59.186.xxx.147)행복한 인생을 위해서 아이들을 버린다. 정말 괘씸한 발언이군요,. 그렇다면 이 세상 모든 아이들은 다 버려도 되는건가. 악질 여성들도 있긴하지만 .
5. 진짜로
'07.11.21 11:33 PM (61.104.xxx.201)야구선수로만 보면 조성민씨 참 아까워요.
조성민 정말 대단했던 선수였거든요..고교야구 조금만 관심있던 분이라면 다 알죠.
정말 날았습니다. 게다가 얼굴도 잘생기고요. 야구 만화책에 나오는 딱 그 모습이었거든요.
우리나라 야구계...대학교 야구가 선수관리를 어떻게 하나...정말 막굴립니다...
그 최대 피해자가 조성민같습니다.
최진실씨도 그렇고, 조성민씨도 그렇고 그냥 과거 잊고 다 잘살았으면 좋겠어요.
옥소리&박철도 그렇고...애들이 웬 죄래요? 불쌍해요..6. 그러게요
'07.11.22 10:01 AM (218.232.xxx.165)모든거 잊고 잘 살았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