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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진이 전체 줄거리(스포 만땅)

드라마 조회수 : 2,677
작성일 : 2006-11-23 09:14:18
16세기 최고의 명기 황진이(기명 明月)는 가야금의 달인인 악기(樂妓)현금과 황진사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당시는 종모법(從母法/어미의 신분에 따라 자신의 신분이 결정되는 것)이 엄연했던 사회였으므로 그녀는 기녀로 살아가야할 명운이었다. 그러나 하나뿐인 여식을 사내들의 노리개요, 노류장화의 인생인 기녀로 키우고 싶지 않았던 어머니 현금은 성거산(개경에 있는 산) 깊숙한 암자의 노승에게 황진이를 의탁하게 된다. 그러나 쉬 거역할 수 없는 것이 운명이었다.

어느 날, 노승의 시선을 따돌리고 동자승 서넛과 몰래 소풍을 나갔던 황진이는 만월대 너른 마당에서 화려한 연희를 보게 된다. 꽃처럼 고운 여인네들의 흐드러진 한바탕 춤과 소리, 그리고 전아한 악기들의 음률. 긴긴 밤, 처음 접한 예술에 대한 감동으로 뒤채이던 황진이는 산사를 탈출, 제 발로 송도 교방으로 찾아가 재주를 배우겠다 나서기에 이른다. 이미 7세에 교방에 들어 재예에 이미 눈뜬 동기가 수두룩한 교방에서 진이는 낯선 이방인이었다.

그러나 악기(樂妓)인 현금의 피를 이어받아 재주를 타고 났을 뿐 아니라, 한 번 흥미를 느낀 일에는 무섭도록 파고드는 집중력을 지닌 탓에 진이는 3년의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송도교방의 가장 빛나는 동기(童妓)로 우뚝 서게 된다.

그로부터 6년 후, 그녀의 나이 십육 세, 황진이는 반가의 자제 은호와의 첫사랑에 빠져든다. 오즉여여즉오(吾卽汝汝卽吾), ’너는 나고 나는 너라’ 수만 겁을 떨어져 있던 천생의 인연을 만난 듯 두 사람은 마음을 나누고 공들여 서로를 보듬었다.

그러나 기녀와 반기의 자제의 사랑은 신분질서가 엄연한 당시 조선사회로서는 용납될 수 없는 일이었다. 세상이 정한 권위와 법도라는 둔중한 벽에 부딪히게 된 사랑, 그러나 권위와 법도에 굴복하기엔 그들의 사랑이 너무 깊고 컸다. 마침내 황진이와 은호는 사랑을 지키고자 야반도주를 결행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행수기녀 백무와 은호의 어미 차씨의 방해로 그 뜻을 이루지 못한다. 세상은 어린 연인의 사랑을 자르고 생이별을 강요했다. 결국 상사지정을 이기지 못한 은호는 그 명줄을 놓아버렸다. 혹독한 우중에 생가를 떠나 장지로 가던 은호의 상여는 진이의 집 앞에서 오래 움직이지 못했다. 망자는 그 깊은 사랑을 끝내 거둘 수 없었던 모양이었다.

황진이는 그런 연인의 상여에 처연히 제 저고리를 벗어덮어주었다. 지상에 머무는 망자의 무거운 마음을 거둘 길은 오직 그에게 제 사랑이 아직도 크고 장함을 보여주는 길 뿐이라 믿었던 것일까. 그제야 망자의 상여는 집 앞을 떠났다. 이 어린 연인들의 별리를 지키던 지인들은 그 사랑이 애달파 고개를 돌렸다. 비는 억수로 내렸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은 그렇게 지고 있었다.

이날 황진이는 제 진정을 짓밟은 세상과 행수 백무에게 제 명이 다하는 그날까지 맞서고 또 맞설 것을 결심하게 된다. 깊은 슬픔이 양분이 된 것인가. 황진이가 혹독한 수련에 빠져 살기를 수삼 년, 그녀의 재예는 범인(凡人)들은 쉬 넘볼 수 없는 경지에 이르게 된다. 전아한 시와 한이 깊이 밴 애틋한 선율을 뿜어내는 거문고 가락. 누구든 황진이의 시와 음률을 접하면 그 감동으로 인해 유구무언이었고, 오랜 상사의 밤을 지새웠다.

그러나 황진이의 행실은 높은 재예와는 달리 거칠고 물색없었다. 단지 자신의 미색을 탐해 그녀를 청하는 자가 있으면, 분단장은 고사하고 소세도 하지 않고 연석(宴席)으로 나아갔고, 시나 음률을 다룸이 비루한 자가 청한 자리에는 소복을 입고 나아가 ’이 땅의 시와 풍류가 죽었다’며 구슬픈 곡성을 올리기 일쑤였다. 사내들은 그녀를 사랑할수록 모욕을 당했으나 그 모욕감이 크면 클수록 황진이를 그리는 마음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황진이는 그런 사내들을 보며 통쾌하기는커녕 마음이 불편했다.

자신에게 그리도 큰 절망을 준 세상, 그 세상에게 선택받은 반가의 사내란 자들은 하나 같이 허술했다. 일휘(一揮)에 그대로 무너지고 마는 상대를 향해 불태우는 전의는 허망하기 짝이 없었다. 좀처럼 무너지지 않는 것은 저 백무였다. 재예의 길을 가기 위해서라면 사랑쯤은 얼마든지 잘라 내도 좋다고 믿는 백무, 진이는 어떻게 해서라도 그녀를 무너뜨리고 싶었다. 그러나 백무는 늘 꼿꼿했다. 진이가 난행을 일삼아도 그로 인해 반가의 사내들에게 하루에도 열두 번 진이를 대신하여 닦아 세워지고 몰려도 눈썹하나 치뜨는 법이 없었다. 늘 여유롭고 적당한 비웃음을 머금은 표정으로 진이를 지켜볼 뿐이었다. 진이에게 백무는 어떤 반가의 사내보다 무너뜨리기 어려운 산이었다.

그러므로 진이에게 매향의 출현은 매우 반가운 일이었다. 매향. 그녀는 전날 송도 교방의 이인자였으며 이제는 선상기가 되어 도성에서 여악을 관장하고 있는 무기였다. 또한 백무가 인정하는 유일한 라이벌이기도 했다. 정재무의 달인과 검무의 달인 백무와 매향. 오래 송도를 떠나있었던 매향은 제 수하의 경기들을 이끌고 송도로 왔다.

명목은 명국 사신 장명의 전별연을 관장하기 위해서였으나 그녀의 속셈은 다른 데 있었다. 백무를 꺾어 그녀에게서 행수자리를 빼앗고 퇴기로 만들어버리려는 심산이었다. 매향이 이런 독기를 품게 된 데는 그만 연유가 있었다. 매향은 백무에 비해 세상에 밝았다. 언제나 이팔의 아름다움을 간직할 수 없는 것이 기녀의 명운이라면 재물과 권력을 쥐고 싶었다. 그런 그녀에게 백무는’재주를 파는 것이 예기(藝妓)이거늘, 웃음을 파는 창기가 되려 하느냐’며 몰아세웠다. ’대쪽같이 곧아봐야 세파에 부러지기 밖에 더하나, 세상을 지혜롭게 건너가는 혜안은 곧은 것이 아니라 유연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 적당히 휠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 세상이다.’백무를 파멸로 이끌겠다 결심한 매향의 생각은 그랬다.

백무에게 갚아줄 것이 있다는 데서 진이와 매향은 뜻이 맞았다. 매향은 진이를 수제자로 삼겠다했고, 진이는 마다치 않고 응했다. 그러자 매향은 백무를 상대로 정면 승부를 청하고 나섰다. 백무와 함께 관장을 마주한 매향은 황진이가 제 뜻대로 검무를 배우고, 일점일획도 어긋나지 않는 군무를 추게 된다면 행수자리를 제게 주고 백무를 퇴기로 삼아달라는 것이었다. 제 수하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이를 어찌 행수라 하겠느냐는 것이 그녀의 논리였다.

백무는 분기를 감추려는 듯, 이를 지그시 물었으나 유수는 흔쾌히 허락했다. 백무를 향한 깊은 분기를 제대로 풀 기회를 잡은 진이는 검무 수련에 혼신을 다해 매달렸다. 백무는 때때로 허탈해 졌고, 매향은 흡족했다. 그러나 이 수련의 과정에 의외의 복병이 있었다. 매향의 수제자 부용(春月)이었다. 매향의 가장 인정받는 수제자였던 부용. 그녀에겐 확신이 있었다. 매향이 이끄는 여악도 그 여악을 운영하며 따라 붙는 권세도 스승이 은퇴를 하면 온전히 제몫이 될 것이었다.

그러나 진이의 출현으로 모든 것이 무위로 돌아갈 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밀려왔다. 진이는 백무를 무너뜨리기 위해, 부용은 그런 진이를 꺾어 넘기기 위해 모진 줄다리기를 시작했다. 욕망과 분노가 씨줄과 날줄로 얽힌 혼탁한 시간이 흘렀다. 마침내 진이와 매향의 제자들이 검무를 추는 그날이 왔다. 매향은 득의에 찬 표정으로 백무는 무표정하게 군무(群舞)를 지켜보았다. 그러나 이날의 승부는 철저히 매향의 패배로 끝을 보았다.

진이에 대한 지나친 경쟁심을 이기지 못한 부용 등이 춤을 추는 중 진이를 군무에서 떼어내 버린 것이다. 그러자 이 위기를 돌파할 심산으로 진이는 즉흥적으로 독무를 추기 시작했고, 부용과 그의 동료들이 추는 군무는 그만 빛을 잃고 말았다. 매향은 진이에게 재주를 가르치는 것에는 성공했으나, 정작으로 자신의 수제자들에게 군무를 추는 자의 기본 마음가짐을 가르치는 것에 실패하고 만 것이었다.

그런 그녀였으니 백무에게 행수의 자리를 내어 놓으라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 검무를 추던 연석. 황진이에게 마음을 빼앗긴 두 사내가 있었으니 그들은 벽계수와 김정한이었다. 벽계수는 왕실의 종친으로 거문고를 제 몸처럼 다룬다는 칭송을 받는 당대 최고의 풍류객이었으며, 김정한은 약관의 나이에 이미 출사하여 서른도 되기 전에 당상관에 오른 수재임과 동시에 시심과 음률을 고르는 솜씨가 남달라 조선 최고의 시객이라 칭송받는 자였다.

어린 날, 죽마를 희롱하던 지기 사이이기도 한 두 사람. 이들이 황진이를 처음 본 것은 전날 명사신 장명을 전별하는 자리였다. 황진이의 호방한 시심과 가슴을 에이는 거문고 선율에 매료된 두 사람은 사신 전별을 마치고 도성으로 돌아간 뒤에도 그녀의 잔영으로 오래 뒤채였다. 결국 송도로 길을 잡아 오게 되는 두 사람. 그러나 벽계수와 김정한은 오랜 지기였으나 매우 다른 사람들이었다.

권세와 재물을 넘칠 만큼 가진 벽계수. 그는 그것들이 가진 힘을 누구보다 잘 아는 이였다. 만인지상인 권좌를 제외하고는 재물로 살 수 없는 것이 그에게 없었다. 그러므로 계집도, 사랑도 사 모으면 그만이라고 믿었다. 그에게 황진이는 지금까지보다는 값이 좀 더 나가는 수집품일 뿐이었다.

그는 비단바리에 명국에서 들여온 값나가는 장신구들을 연일 황진이에게 보냈다. ’나의 여자가 되라. 그러면 이 화려함이 다 네 몫이다.’그러나 선물은 포장도 뜯지 않은 채 되돌아 왔고, 벽계수는 당혹했다. 지금까지 재물로 살 수 없는 여자는 없었다. 아니 꼭 재물이 아니라도 자신의 권세와 외모에 혹해 거침없이 옷고름을 풀어버리던 계집이 어디 한 둘이었던가. 그러나 황진이는 그의 재물 앞에 외눈하나 깜빡하지 않았다. 벽계수는 부아가 났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황진이에게 마음이 갔다.


그러나 황진이의 마음은 도무지 그에게 건너오지 않았다. 제 연심을 외면당한 밤이면 벽계수는 황진이의 가장 절친한 지기 단심을 안았다. 단심을 안고 그랬다. ’그녀의 마음으로 가는 길을 열어라.’벽계수의 갈증은 오롯이 단심의 아픔이 되었다. 어렵사리 기녀가 되긴 했으나 출중한 미색도 재주도 갖지 못한 그녀는 송도 교방에서 주목받지 못하는 꽃이었다. 외면당한 자의 설움을 누구보다 잘 아는 단심이었다.

분기로 떠는 벽계수를 품에 안고 단심은 긴 속울음을 울었다. 자신의 미색과 재주에서 황진이의 반만 되었어도 얼마나 좋았을까. 그러면 벽계수는 황진이를 향하는 그 헛된 미망을 끊고 자신의 곁에서 편안할 수도 있었을 것인데 . 그러나 단심은 그것이야말로 벽계수의 것보다 더 부질없는 미망임을 모르지 않았다.

분기로 잠든 벽계수의 품을 빠져 나와 단심은 현금을 찾았다. 그리곤 울면서 그랬다. ’벽계수가 진이의 마음을 잡을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달라.’벽계수가 슬퍼하는 걸 보느니 차라리 그를 잃는 쪽을 선택하는 것, 그것이 단심의 사랑법이었다.

현금은 단심의 이 사랑을 외면키 어려워 그녀가 이끄는 대로 벽계수와 마주 앉았다. ’여식은 대현을 주로 쓰니 유현을 자유자재로 다루면 아이의 발길은 잡을 것’이라 운을 뗀 현금은 그러나 무엇보다 중한 것은 ’재주로 말고 마음으로 소리를 고르는 것’이라 했다. ’서둘지 말고 음률이 깊어지듯 마음을 깊이하면 다른 이의 마음은 자연 얻어지는 것’ 이라고도 했다.

벽계수는 깊이 주억거렸고, 현금은 마음결로 그런 벽계수의 열망을 읽었다. 열망을 진심으로 바꾸면 어쩌면 그는 사랑을 얻을 것이었다. ’허면 단심이 이 불쌍한 아이의 연정을 어쩌나.’ 제 자리를 찾지 못하고 얽히는 마음들이, 그 안에 도사린 다정(多情)이 참으로 큰 병이 아닐 수 없었다.

깊은 밤, 어느 한적한 정자. 벽계수는 유현으로 ’영산회상’을 타고 있었다. 단심은 그런 벽계수의 곁으로 황진이를 이끌었고, 일단 그녀의 관심을 끄는 데까지는 성공했다. 그리고 ’성마르게 다가서려 들면 달아나고 마는 아이니, 여유를 가지고 천천히 다가서라.’는 현금의 경고를 접한 터라, 진이에게 큰 수작을 걸지 않고 자리를 벗어났다. 그러나 벽계수는 조바심이 일었다. 어렵게 만든 자리였다.

제 연주에 명월의 마음이 동한 듯도 했다. ’이럴 때 확 밀어 붙여야 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벽계수는 이 마음을 잠재우고 제가 임시로 거처하는 와가로 발길을 옮겼다. 그러나 그 발길이 가벼울 리 없었다. 그런 벽계수를 보는 황진이는 의아했다. 제법 명사의 흉내를 내고 있긴 한데, 또한 유현을 자유자재로 만지는 품이 풍류를 아는 자이기는 한데, 그러나 어쩐지 그에게는 진정성이 없어보였다. 겉멋만 있을 뿐, 깊이가 없는 소리. 흥에는 겨우나 한이 빠져 있는 반쪽짜리 소리였다. 깊은 소리는 재주가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주는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아는 황진이였다. 그러므로 자신의 앞에서 보이는 벽계수의 행동이 도무지 진심으로 느껴지지가 않았다. 이에 진이는 한수의 시조로 벽계수를 희롱하고 시험했다.

"청산리 벽계수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오기 어려워라./ 명월이 만공산 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쉬어가라. 오늘 밤 내 그대의 여인네가 될 수도 있으리라.’ 은밀한 유혹이었다. 깊은 소리를 얻지 못한 시름에 겨운 자라면 돌아설 리 없었다. 그러나 그것이 그저 진이의 환심을 사기 위한 거짓 행각이었다면 못이기는 척 돌아서 긴긴밤 그녀와 운우지락을 나누고자 할 것이 분명했다.

벽계수가 발길을 돌이켰음은 불문가지였고, 결국 그는 황진이에게 큰 비웃음을 샀다. ’일찍이 벽계수를 명사라 이르는 소리를 여러 차례 들어 이리 우연히 만나진 것도 인연인 듯싶어 교유코자 하였으나 명사가 아니라 그저 풍류랑일 뿐’이라 했다. 매몰차게 돌아서 가버린 황진이.

이날 모멸감에 몸을 떨던 벽계수는 황진이를 제 계집으로 취하지 못한다면 그녀를 철저히 짓밟아 버리기라도 하겠다고 결심하기에 이른다. 그는 사랑을 모르는 자였다. 그러므로 그가 사랑이라 믿는 비틀어진 욕망을 오랫동안 황진이를 괴롭혔다.

한편, 김정한에게 황진이는 취하고 싶은 여인네가 아니라 탐나는 문우(文友)였다. 조선 최고의 시객이자 가객이라 찬을 받은 그였으나, 그의 시는 진이의 그것 앞에서 빛을 잃었다. 인생의 단 한 달, 아니 단 하루라도 그런 문우와의 깊이 교유하고자 하는 욕심이 그에게 있었다. 그러나 막상 송도로 오자 김정한은 선뜻 황진이의 앞에 나서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제가 쓴 시를 수십 번, 수백 번 퇴고 하고 또 퇴고하며 자신의 엷은 시심을 한탄하는 것으로 시간을 죽이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다 도무지 마음에 차는 시를 얻을 길이 없자, 김정한은 황진이와 단 한 차례도 만나지 않은 채 다시 도성으로 갈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이른 새벽, 도성으로 가는 길 위에 선 김정한. 이런 그의 발길을 잡은 것은 황진이였다. 전날 벽계수는 황진이의 환심을 사고자 김정한의 시를 제가 쓴 것인 양 그녀에게 보낸 바 있었다. 그러나 벽계수의 사람됨을 짐작한 황진이는 제가 받아든 시가 벽계수의 것이 아님을 직감한다.

수십 번, 수백 번의 제 시를 퇴고할 수 있는 김정한의 성의는, 그 열정은 진이에게 감명을 주기에 충분했다. 김정한은 은호가 간 후, 황진이의 진심을 두드린 첫 남자였다. 시미놀이. 길재에서 원천석으로, 두보에서 이백으로, 월산에서 성삼문의 시를 넘나드는 두 남녀의 교유는 깊었다. 진이는 김정한의 시에서 끊이지 않는 경세에의 욕구와 자기수양의 철저함을 읽었고, 김정한은 진이의 시에서 세상에 뿌리박지 못하고 허공을 주유하는 슬픈 여인의 심상을 읽었다. 김정한이 할 일은 진이의 몸과 영혼에 끈덕지게 늘어붙어 다니는 슬픔을 온전히 거둬내는 것이었고, 진이의 일은 김정한의 희망과 열정을 지키는 가장 튼실한 지지자가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 어느 쪽도 두 사람이 이룰 수 없는 허망한 꿈일 뿐이었다. 황진이가 김정한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기에는 여전히 망자가 된 은호의 그림자가 너무 컸다. 어쩌면 진이는 김정한의 모습에서 성년이 된 은호의 모습을 찾고 있었을지 몰랐다. 그러므로 그녀가 마음에 품고 시를 나눈 것은 김정한이었지만 그가 아니었다. 김정한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벗의 소리를 귀신같이 가려내었다던 종자기 같은 벗을 얻고자 떠나온 길이었고, 황진이는 자신의 지음(知音)이 되기에 충분한 벗이었다. 그러나 그의 마음은 어느 결엔가 지음의 도를 넘어서고 있었다.

황진이와 교유가 아닌 사랑을 하고 싶어졌고, 작첩이라도 하여 오래 함께 하고 싶었다. 그러자면 먼저 망자와의 숨 가쁜 일전을 치러야 했다. 그러나 그의 연적(戀敵)인 은호는 결코 만만한 자가 아니었다. 진이와의 사랑을 지키기 위해 사대부의 체통도 버리고 야인으로 살 마음을 품었던 자라 했다. 연인을 잃은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세상을 버릴 만큼 그 사랑은 지독했다 했다. 그러나 이때의 김정한에게 그와 같은 용기가 없었다.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지기엔 그는 겁나는 것이 너무 많은 자였다.

출사하여 경세를 꾀하고자 하는 욕구를 쉬 자를 수 없었을 뿐 아니라, 국법마저 어기고 기녀를 데려다 작첩을 할 만큼의 용기가 아직 그에게는 없었다. 결국, 진이와 김정한은 한 달여 만에 짧은 사랑의 끝을 보게 된다. 그러나 이 두 남녀의 별리라고 쉬운 것은 아니었다. 매몰차게 발길을 돌렸던 김정한은 눈물겨운 표정으로 다시 진이에게 돌아와

"몸은 가나 마음만은 그대의 곁에 남겨두고 싶다."애틋한 정회를 표했고, 진이는 그가 가고 처연한 시조를 하나 지어 가졌다."어져, 내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다냐./이시라 하더면 가랴마  제 구 야/보내고 그리  정은 나도 몰라 하노라."

김정한이 도성으로 돌아간 후에도 벽계수는 송도를 뜨지 않고 있었다. 황진이를 제 계집으로 삼고자 하는 욕망을 잠재우지 못한 탓이었다. 왕실의 종친이라는 권위를 빌어 송도유수를 회유하고 또한 백무와 교방의 다른 기녀들을 협박했다. 이런 벽계수의 난행을 수도 없이 접한 황진이는 못이기는 척 그가 청한 주연에 나아가 벽계수의 지인들과 송도 향반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일국의 종친이라는 자가 어찌 한낱 기녀하나를 얻고자 수많은 백성을 곤경에 빠뜨릴 수 있는가.’ 따가운 일침을 놓고 자리를 떠버렸다. 마음을 짓밟히고, 모욕마저 당한 벽계수의 분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는 황진이에게 풀지 못한 분기를 송도교방의 기녀들을 창기 취급하는 것으로 풀었다.

무기들의 정재무에 반주를 하던 악공들의 악기를 마구 부숴 버렸으며, 하잘 것 없는 춤이라 몰아붙이며 무기들의 춤을 중단시켰다. ’춤은 시작을 했으면 그 끝을 보아야 한다’고 점잖게 이르는 백무에게 감히 천기 따위가 양반을 가르치려 든다며 술잔을 던지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그러자 백무는 벽계수 앞에 놓인 술상을 그대로 엎어 버렸다. "천출들이 하는 것이라 하여 재예마저 천한 것인 줄 아는가? 춤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백무는 당찬 일성을 내질렀다.

그러나 벽계수는 왕실의 종친에게 위해를 가한 천기의 죄를 죽음으로 묻겠다 버텼다. 결국 백무는 옥방에 갇히게 되었고, 다음 날이면 동헌으로 끌려 나가 뭇사내들이 보는 앞에서 속곳만 입은 채 태형의 굴욕을 감내해야할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황진이는 얼음같이 차가운 낯색으로 일관했으나 적잖이 당혹했다. 저 은호와의 일로 백무에게 깊은 원한을 품은 황진이였으나 벽계수의 술상을 엎어버린 백무의 심경만은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예인에게 재예는 목숨과도 같이 중한 것이다. 그런데 그 재예를 소홀히 여기고 능멸조차 하는 자를 어찌 용서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래서 진이는 백무가 갇힌 옥방 앞을 오랫동안 서성였다. 처음으로 백무가 측은해 졌고, 그래서 사과가 하고 싶어졌다.

그러나 그렇게 다가서기에도 황진이와 백무 사이에 놓인 갈등의 골은 너무도 깊어져 있었다. 결국 발길을 돌리고 마는 황진이. 그리고.. 영영 진이는 백무에게 사과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그 밤 백무가 제 스스로 목숨을 거둬 버린 탓이었다.

친분이 있는 옥리를 설득하여, 단 하루 밤만 혼자 있을 말미를 달라 청했던 백무. 그녀는 달빛 좋은 예성강의 절벽위에서 이생의 마지막 정재를 추었다. 그리고 복수할 기회도 또한 사과할 기회도 허락지 않은 채 황진이의 스승이었던 그 백무는 미련 없이 강으로 제 몸을 던져 버렸다. 낙화. 당당하고 결 졌던 한 떨기 해어화가 진 것이었다.

백무는 예성강 그 푸른 물줄기에 뿌려졌다. ’내 죽으면 울렁울렁 춤추듯 우쭐대는 강물이 되고자 하니 나를 예성강에 뿌려 달라’는 백무의 유지를 받든 것이었다. 이날, 진이는 소복단장을 마다하고, 꽃단장을 하고 그 강가에 섰다. 그리고 오랫동안 정재를 추었다. 벽계수에게 능멸을 당해 잇지 못한 정재의 마지막 대목이었다.

그런 진이의 몸짓에 처음에는 돌이라도 들어 그녀를 치고자 한 다른 기녀들도, 하늘도 초목도 함께 울었다. 이 모습을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길이 있었다. 이생이었다. 황진이가 백무가 갇힌 옥방 앞을 오래 서성이다 돌아오던 그 밤, 그녀는 벽계수가 보낸 십여 명의 칼잡이들과 마주서야 했다. 백무를 가두고도 분기를 잠재울 수 없었던 벽계수가 종당에는 그녀의 목숨을 거두겠다 나선 것이었다. 이때 그녀의 목숨을 구한 것이 바로 이 이생이었다.

권력을 위해 가장 절친한 지기였던 정암의 목숨마저 거둬버린 비정한 자를 아비로 가진 사내. 그리하여 제 뒤에 붙은 이름자를 부정해 버리고 세상을 등진 비운의 사내가 바로 그였다. 만일 백무가 세상을 버리지 않았다면, 그 주검 앞에서 백무는 자신의 분노의 대상이자 가장 큰 연민의 대상이었노라 울부짖는 황진이의 모습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생은 주유하던 발길을 송도에서 멈추지는 않았을 것이다. 황진이가 강한 척은 독판하면서도 저를 망치는 것으로 망자에게 사죄하고자 하는 어리석은 마음을 품는 반편이만 아니었어도 발길은 쉬 떨어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황진이는 반편이였고,

그런 그녀는 자신의 모습과 매우 닮아있었다. 자신이 그녀의 위로가 된다면, 그 또한 그녀에게 위로받을 수 있을까. 상처 입은 짐승들이 그 상처를 서로 핥아 주듯 그렇게 서로가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질 수도 있는 것일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이생은 그예 황진이의 기방 행량에 눌러 앉아 버렸다. 이생은 그녀의 친구를 자처했고 재주 팔러 가는 길을 지키는 호위무사가 되었다. 두 사람은 서로에게 으르렁 거리며 서로의 상처를 헤집었다. 그러면 그럴수록 우정은 깊었다. 우정이라고...그렇게 믿었다.

그러나 이생은 점점 황진이에 대한 자신의 감정이 지기에게 느끼는 그것과는 빛깔과 향취가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를 깨달았을 때 황진이의 마음에는 이미 다른 사내가 자리한 후였다. 사내는 김정한이었다.

황진이가 김정한과 살았던 그 육년을 뭐라 이름해야 할까. 백무가 가고, 저를 괴롭히던 벽계수도 제풀에 지쳐 떠나 버린 송도. 교방은 전날의 격정과 애욕을 잊은 듯 평화로웠다. 점고에서 수련, 연희로 이어지는 백날이 하루 같은 지리한 일상. 결기가 있었을 땐 그래도 좋았던 것일까. 분기를 예술로 화하여 찍어 누를 백무가 있었을 때는 그래도 싱싱한 삶의 의미가 있었던 걸까. 벽계수가 제게 대서고자 했을 때는 그를 예술로 맘껏 농락하며 그녀는 저도 모르게 제 사는 의미를 느꼈던 것일까. 결기가 마음에서 걷히자 황진이의 재예는 어딘지 힘을 잃었다. 더는 시를 생산하지 못했으며, 음률도 춤에도 마음 붙이지 못하는 하루하루가 갔다.

이때 김정한이 노래와 함께 다시 돌아왔다. 김정한은 황진이에게 그랬다. ’이제는 그대를 이대로 두고 떠나가지 않겠다. 할 수만 있다면 해도 된다면 그대의 속울음을 내가 잠재우고 싶다.’ 그러나 황진이는 그 마음 앞에서 여전히 허망했다. ’내 여직 기녀의 속울음을 온전히 거두는 사대부는 본 바가 없노라. 풋정을 사랑이라 착각치 마라.’ 그러나 진이의 이런 마음을 비웃기라도 하듯 김정한은 제 몫의 사랑을 질기게 치렀다.

황진이를 얻기 위해 송도 유수의 앞에 무릎 꿇는 것을 마다치 않았고, 부모네를 기망하는 것도 서슴지 않았다. 제게 기부가 되라 하면 그 또한 마다치 않겠다고도 했다. 사랑을 위해서라면 양반의 허울쯤 내려놓을 수 있노라고...... 그러나 기부는 되지 않겠다고 했다. 체면이 중해서가 아니라, 그녀의 그늘이 되기 위해서라고 했다. 힘써 일하고 제 손으로 아낙을 먹이는 사내가 되고 싶다. 그래서였을까. 황진이는 지친 심신을 이 사내 앞에 내려놓고 싶어졌다.

그래서 김정한을 따라 도성으로 갔다. 그리고 육년, 결코 짧지 않은 세월을 그의 아낙으로 살았다. 한동안 김정한과 황진이는 여느 사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으로 살았다. 아침이면 출사하는 남정네 김정한과 그 남정네의 의대를 곱게 수발하는 아낙 황진이가 있는 풍경. 비록 제 속으로 낳은 아이는 아니나, 황진이를 어미라 부르는 똘망한 애 녀석들이 있고, 가끔은 발뒤꿈치도 밉다 타박하는 시어미도 있고, 그런 시어미에게 ’지나치게 엄하게 며늘아기 잡는다’ 타박하며 막아서는 시아비가 있는 너무나 평범하고 정겨운 풍경. 황진이는 제게도 이런 삶이 주어질 수 있나 의아했으나 행복했다.

그러나 가끔 아주 가끔씩 허기가 밀려왔다. 자정 넘은 시각 상도 보지 않고 정주간 부뚜막에 앉아 나물밥을 한 함지 비벼먹어 보아도 여간해선 잠재울 수 없는 허기. 그러나 황진이는 이 허기의 진원지를 알지 못했다. 적어도 황진이와 김정한이 곱게 그려둔 풍경화에 얼룩이 지기 전까지는 말이다. 얼룩을 만든 것은 벽계수였다.

오매불망, 제가 그리도 제 계집으로 취하고자 했으나 끝내 거역하고 말았던 황진이가 김정한의 아낙이 되어 살고 있더라는 것을 가복 칠성을 통해 전해들은 벽계수는 오래 잊었던 분기를 다시 퍼 올렸다. 제 몫이 되지 않는 사랑이라면 그 사랑을 부숴버리겠다는 참으로 가당치 않은 오기가 아직 그의 마음에 남아 있었다. 벽계수는 포청에 ’김정한이 기녀를 데려다 작첩을 했다.’ 익명 고변을 했으며 포청은 김정한에게 국법을 어긴 죄를 물어 수인이 되라 했다.

시부모는 집안 망했다 하늘을 쥐어박고 땅을 쳤으며, 그날로 황진이와 눈길 한 번 마주치는 일이 없었다. 아이들도 슬금슬금 새 어미를 피했다. 황진이는 서럽고 노여웠으나 그보다 중한 것은 김정한을 구명하는 일이었다. 황진이는 벽계수를 찾아가 사정도 해 보았고, 포청 대장을 찾아가 탄원도 해 보았다. 그러나 벽계수는 제 계집이 되라 하며 더러운 시선을 보냈고, 포청대장은 국법이 중하니 ’네년까지 잡아넣기 전에 송도로 돌아가라’ 얼렀다.

결국 황진이는 매향을 찾았다. 마지막 승부수를 띄울 심산이었다. 매향은 여전히 도성에서 궁중연희의 여악을 관장하는 행수였다. 황진이는 군왕이 베푸는 연희에 저를 내보내 달라 청했다. 황진이의 의도를 간파한 매향과 부용은 저어했다. 그러나 그예 허락하고 말았다.

한 번쯤 저희들과 그 신분이 다르지 않은 황진이가, 제 힘으로 사랑을 찾는 것을 보고자 하는 강한 열망이 작용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매향의 허락이 떨어지고 수삼일 황진이는 무섭도록 수련에 매달렸다. 그녀는 춤이 몸으로 쓰는 시가 되어 주기를, 아니 몸으로 쓰는 간절한 망부가(亡夫歌 )가 되어주기를 바랐다. 그리고 진이의 열망은 현실이 되었다.

그녀의 춤을 보던 군왕 중종은 눈물을 흘렸다. 무색해 하는 신하들의 시선에도 군왕의 용안은 오래 오래 젖어 있었다. 그 밤, 군왕은 그녀를 가까이 불렀다. 네 춤에서 가슴 저린 그리움을 읽었노라 했다. 전날 군왕의 길을 가기 위해 버린 사가의 아내 심씨가 떠오르더라는 말도 했다. 네 그리움은 누구인가. 군왕은 물었고, 황진이는 하냥 울었다.

승지를 포청에 보내 전후내막을 알게 된 군왕은 황진이에게 밀지를 내렸다. "네 사랑이 내 사랑보다 장하다."는 내용이었다. 그리고 김정한은 방면되었다. 이날 방면된 것은 김정한만은 아니었다. 김정한을 구하고자 그러자면 군왕부터 감복 시켜야 했기에 죽을 듯이 매달린 수련이었지만 그 수련에 임하면서 진이는 그제야 고봉밥으로도 해결나지 않는 허기의 진원지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녀는 예술가였다. 재예 없이 하루도 자유로울 수 없는 그런 예술가 말이다. 김정한의 방면과 함께 재예에 대한 제 깊은 애정을 다시 불러낸 황진이. 이것이 결국 두 사람의 마음을 자르게 될 날 선 검이 될 것임을 그들은 아직 몰랐다. 김정한이 방면된 그날로, 황진이의 빼어난 재주와 김정한에 대한 사랑은 미담이 되어 도성 장안을 가득 메웠다.

세인들은 용안에 폭포수 같은 옥루를 뿌려놓았다는 그 춤을 보고 싶어 안달을 했다. 하여 김정한과 일면식이라도 있는 이는 천하절색인 첩실의 시심과 음률 그리고 춤을 볼 기회를 달라 졸라대기에 이르렀다. 하는 수 없이 김정한이 어렵사리 황진이의 의향을 물어왔다. 그러자 황진이는 주저치 않고 연석으로 나아와 거문고를 타고, 제 시심을 가감 없이 보였다. 그 자리에서 황진이가 어김없이 빛났음은 불문 가지였다.

이즈음 김정한은 노여웠다. 제 앞에서만이 아니라 다른 사내 앞에서도 빛나는 황진이가 노여웠고, 그런 그녀가 노여운 제 자신이 더욱 노여웠다. 때때로 사내 된 자의 체면도 내려놓고 황진이에게 대 놓고 강짜를 부렸다. 그러면 황진이는 아이 달래듯 그랬다.

’시심 나누고 거문고 가락 어루만지며 그 정회를 나누는 일에 남녀를 가릴 것이 무에 있는가. 예술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에 남녀가 따로 있는가.’그러나 김정한은 황진이를 세상과 나누고 싶지 않았다. ’세인들 앞에서 재예를 선뵌다 하여 내 사랑이 반감되는 것은 아니라’ 황진이의 강변은 길었으나 그마저 귀 닫고 듣지 않았다.

이런 황진이의 강변을 배반키라도 하듯 황진이를 제 노리개로 취하고자 탐욕스런 눈길을 보내는 사내들이 나섰다. 김정한은 그 때마다 것 보라고 세상은 그저 너의 재주를 노리개 삼고자 할 뿐, 있는 그대로의 가치로 인정해 주지 않는다 또 강변했다. 그 뿐이 아닐 것이라고, 재예는 그 탐욕의 너머 진정으로 아끼는 자들과 함께 넉넉히 나누는 것이니 그 실현을 위해 함께 싸워 줄 수는 없느냐고 간절히 청도 해 보았다 .

그러나 그럴수록 김정한의 마음은 굳게 닫혔다.’사내만 열 계집 마다치 않는 것이 아니라 계집도 열 사내 마다치 않는가.’혹언도 마다치 않았다. 그렇게 그들은 멀어졌다. 제 원대로 상대를 조종코자 하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는 것을, 있는 그대로의 상대를 인정하고 그가 사랑하는 것을 함께 사랑하며 하여 상대를 자유롭게 해주고, 기껍게 해 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을 김정한이 모를 리 없었다. 그러나 앎과 행함은 어느 만큼 거리가 있는 법인가 보다. 김정한은 끝내 보다 큰 사랑을 실천치 못했고, 그리하여 결국... 사랑을 잃었다.

김정한을 떠나 황진이는 먼길을 참으로 오래 주유했다. 사랑이 이다지도 허망한가. 지치도록 걷고 비 가릴 초막을 찾아들어 밤새 숨죽여 우는 실연의 나날들. 돌아갈 수 없음을 뻔히 알면서도 "동짓달 기나긴 밤을 한 허리를 버혀내어, 춘풍 니불아래 서리서리 넣었다가 어론 님 오시는 밤이어든 굽이굽이 펴리라." 연모의 시를 퍼 올리기도 했다

. 그러나 그녀의 상처는 쉬 아물지 않았다. 이 상처안고 떠도는 주유의 길을 지켜준 이는 이생이었다. 아니 그저 동행했다 해야 옳을까. 이생도 제 몫의 상처를 안고 떠나간 길이니 . 황진이가 김정한과 부부지연으로 행복할 즈음, 이생은 도성의 협객들과 어울려 비틀어진 오늘을 바로잡을 궁리로 분주했었다.

정암을 모해한 훈구세력을 몰아내고, 어심을 바로잡아 다시 개혁의 정사를 도모하는 꿈. ’훈구에게 철퇴를!’생사를 같이하자 드는 칼로 약지를 그어 피로써 한 결의. 그러나 이생은 그 결의를 끝까지 이행치 못하고 도망자가 되어야 했다. 또다시 아비 때문이었다.

’대의 앞에 사감은 무익’하다는 것을 모르지 않았으나 그래도 마지막으로 한 번 그는 아비에게 기회를 주고 싶었었다. 그래서.. 이생은 아비를 찾아가 그랬다. ’피로써 얻은 권력을 무의미하니, 세상에 사죄하고 그만 낙향하는 것으로 그 죄를 씻으라.’ 그러나 아비는 아들의 동지들을 낱낱이 잡아들여 살뜰하게 도륙하는 것으로 이생의 고언에 답했다. 살아남은 동지들은 그 아비의 심장에 비수를 꽂으라 했으나, 이생은 그만은 거절했다.

결국 배신자로 낙인찍혀 동지들에게 칼을 맞을 수 밖에 없었던 이생, 서너 되는 족히 되는 피를 쏟으며 이생이 피해든 것이 황진이의 집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주유천하의 벗이 되었다. 유구무언. 제몫의 상처를 안고 오랜 주유를 계속하던 어느 날, 두 사람은 각각 바람결에 부모 네의 소식을 접하게 된다. 황진이의 어미 현금의 목숨이, 그리고 이생의 아비 이정승의 목숨이 경각에 달렸다는 소식이 그것이었다. 황진이는 송도로 길을 잡았다.

이생은 그 길에도 동행하고자 했으나 황진이는 그저 묵연히 고개를 가로 젓고 도성 쪽으로 이생의 등을 떠밀었다. ’새는 죽을 때 그 노래가 슬프고, 사람은 죽을 때 그 말이 착해지는 법’ 아비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라는 것이 그녀의 뜻이었다. 그래서 그들의 길은 임진나루에서 각각 도성과 송도로 갈렸다. 도성으로 돌아온 아들 이생을 잡고 아비는 ’아들이 제 권세를 등에 업고 경세하는 것이 원이라’ 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죽을 때마저 그 말이 착해지지 못한 아비로 인해 아들은 섧게 울었다.

그리고... 황진이의 어미 현금은 죽음 앞에서도 ’이 한 생의 사랑은 네 아비 하나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의 사랑을 얻는 데는 실패했다. 부디 너는 한 남자의 아낙으로 행복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뜬 눈으로 세상을 등졌다. 이 얼치기 기녀의 딸은 죽는 그날까지 허망한 사랑에 목을 맨 제 어미의 한심함이 슬퍼 또한 섧게 울었다.

어미를 묻고 온 날, 황진이는 엄수를 찾았다. 평생을 제 어미인 현금만을 바라보며 외사랑을 키웠던 엄수의 마음을 위로코자 함이었다. 그러나 엄수는 이미 송도에 없었다. 그저 그가 머물던 방안에 무참하게 현이 잘린 길 잘 든 가야금 하나 놓여있을 뿐이었다. 깊은 의혹을 안고 앉은 황진이에게 수만은 느릿하게 말을 건네왔다. 현금이 가기 며칠 전 현금이 엄수에게 그랬댔다.

’한 생에 사랑은 그저 하나뿐이라 믿은 반편이인 자신을 용서하라고, 다음 생이 있으면 그땐 어르신의 여자로 살고 싶다고 ’ 엄수는 그것으로 충분해 보였다 했다. 어쩌면 그의 음악은 수많은 사람을 흥지게 했으나 한 사람에게로만 향하고 있었는지 모르겠다고, 그러니 어쩌면 절현은 당연지사라고, 너는 이해할 수 없을지 모르나 그렇게 반편이 같은 사랑을 안고 사는 축도 한 둘은 이 세상에 있는 법이라고

. 이날 황진이는 서화담을 찾아가 길게 울었다. 사람살이 도무지 알 수 없노라. 돌아앉은 사내와 세상을 원망치 않고 그저 그리움 속에서 살다간 어미의 삶이 옳은 지, 세상이 저를 자르면 저도 맞서 세상을 자르겠다 한 백무의 삶이 옳은 지, 평생 안고 살던 가야금을 여인네 하나 잃었다 동댕이친 엄수의 삶이 옳은지, 세상도 사랑도 다 잊고 오직 재예에 정진하는 자가 옳은 지, 재예를 귀하다 하면서 그 재예를 안고 구르는 기녀며 악사들을 천하다 하는 세상은 또 뭐라 여겨야 하는지, 그 세상 어찌 살아내야 삶에 정답지를 낼 수 있는 지 참말로 모르겠다 했다.

화담은 그런 황진이의 등을 쓸어주고 또 쓸어주며 ’그저 도는 하나’라 했다. 사람으로 세상에 나면 다 귀하니, 제 좋은 일 힘써 하고, 그 일로 사람을 이롭게 하면 그 인생이 가장 가치 있고, 자유롭다 했다. 그러자 길고 장하게 이어지던 황진이의 울음 끝이 조금은 잦아드는 듯 했다.

몇 년 후, 세인들은 저자에서 한 여인네를 쉬 만날 수 있었다. 때로는 거문고 선율을 내어 놓기도 하고, 때로는 시와 구래(舊來)하는 민요도 썩썩 내어놓기도 했으며 놀이판 흥이 오를 대로 오르면 맨발로 춤을 추는 자유로운 여인. 제가 먼저 자유로워 다른 이에게 자유의 감흥과 위로를 한껏 안겨주는 멋들어진 여인네, 그녀는 황진이였다. 어느 날, 황진이는 흥을 돋우는 북장단 하나 없이 흐드러지게 춤을 추고 있었다.

이때 한 사내가 장고를 치며 섞여 들었다. 그는 이생이었다. 흐드러진 놀이판을 파하고 거친 술 한 잔 안고 앉아 이생은 그랬다. ’경세는 세상을 이롭게 하는 것인데 어찌 피 위에 쌓은 권력으로 도모할 수 있는가. 사람들 얼굴에 드리운 그늘을 잠시나마 거둬 주는 것, 그것이 진정한 경세(經世)’라 ’이것이 아비가 그예 하지 못한 착한 말이니, 제가 대신 한다’고 .

저자에서 그들은 오래 흥지고 자유로웠다. 저자에서 그들을 만나 놀았던 수많은 이들이 덩달아 흥지고 자유로웠음은 불문가지다.
IP : 222.237.xxx.134
1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00
    '06.11.23 9:51 AM (59.9.xxx.56)

    아 재밋다. 감사해요 영화 한편 본것 같네요. 좋은 아침되세요.

  • 2. ㅎㅎ
    '06.11.23 9:54 AM (61.97.xxx.123)

    저도 감사.. 반만 읽었어요.. 두고 두고 봐야겠는데요.^^.

  • 3. ^^
    '06.11.23 9:54 AM (203.226.xxx.239)

    정말 재미있네요.... 잘 봤습니당

  • 4. ^^
    '06.11.23 9:55 AM (68.147.xxx.10)

    저도 감사해요.
    궁금했던 황진이의 결말을 보고 갑니다.

  • 5. 황진이팬
    '06.11.23 10:27 AM (125.242.xxx.138)

    긴글 잘 보았습니다. 로그인이 다 풀려버리네요. 고맙습니다.

  • 6. ㅎㅎㅎ
    '06.11.23 10:36 AM (219.250.xxx.64)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공감가는 부분도 많고...
    진짜 로그인이 풀려버리네요. ㅎㅎ

  • 7. ^^
    '06.11.23 11:02 AM (222.106.xxx.148)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해요~ ^^

  • 8. ^^
    '06.11.23 11:27 AM (211.45.xxx.198)

    감사해요.
    궁금했었는데 정말 잘 읽었어요.

  • 9. 오렌지
    '06.11.23 11:38 AM (211.215.xxx.184)

    넘 잘읽었어요,,,,,,,^^감사해요

  • 10. 아..
    '06.11.23 12:09 PM (211.215.xxx.5)

    넘 잘 읽었답니다~~~

  • 11. ^^
    '06.11.23 1:32 PM (220.86.xxx.57)

    잘 읽고 갑니다. 벌써 마지막 장면이 그려지네요.

  • 12. ..
    '06.11.23 4:23 PM (58.226.xxx.212)

    으아..엔터좀 쳐주시지..ㅎㅎㅎ
    족히 30분은 걸렸네요.. 누가쓴글인지 글솜씨도 참 똑떨어지네요..
    재밌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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