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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만하게 생긴 죄

슬픈임산부 조회수 : 2,070
작성일 : 2005-09-10 20:27:36
오늘 아침, 무거운 몸을 이끌고 딸 손을 잡고후배네 딸내미 돌잔치에 다녀왔습니다.
평소 같으면 차가 없을 때는 이꼴저꼴 보기 싫어서 어지간한 장거리(서울 안이지만)는 택시를 이용하곤 했는데, 지갑 사정이 딸랑거려서 그냥 버스를 탔죠.

배가 배인지라(임신중) 좌석버스에서 5살짜리 딸은 자리에 앉히고 저는 따로 앉아서 가는 중이었어요. 저희 집이 종점이라 앉아서 가는 건 문제가 안되거든요.

한 중간쯤 갔나...? 어떤 아주머니가 다짜고짜 제 발에 묵직한 짐을 턱 올려놓는 겁니다. 얼굴을 힐끗보니 '굳이 자리양보는 하지 않아도 될 정도'였던 데다가 힘들게 임신을 한 터라 제 몸보신 차원에서 자리를 비켜드리지 않았지요. 사실 더 큰 이유는 당당하게 자리를 요구하는 듯한 태도(발에다 짐을 내려놓질 않나, 팔꿈치로 머리를 툭툭 건드리질 않나(전날밤 야근을 해서 졸고 있었습죠)..)에 팩~ 한 제 못된 성격 탓도 있을 겁니다.

결국 그 아주머니, "자리좀 같이 앉지?" 하고 빈정거리는 투로 말하더군요. 짐이 없었으면 모를까.. 저도 한 짐 지고 있던 차였던 데다가 5살짜리기는 하지만 꽤나 묵직한 아이를 임신한 제 배 앞에 앉고 가는 건 한계가 있을 것 같아서 "죄송합니다. 제가 임신을 해서요.."했더니 "그래서 못하겠다고?"하더군요...-.-;

사실 그 아주머니가 제게 불쾌감만 주지 않았더라면 제가 먼저 비켰을지도 모르는데... 딴에는 제게 눈치를 준다고 한 것이겠지만 역효과가 난 거지요... 아무래도 만만하게 생겨서 그런 것 같아요. 결혼 전에는 제하철에서 어른한테 자리 양보도 안 하냐'며 할아버지한테 작대기로 맞은 적도 있거든요. 그 할아버지, 그 많은 팔팔한 젊은 애들은 다 놔두고 제일 '약하게 생긴' 저를 잡으려 들더군요. 그것도 7사람 앉는 자리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는데(그 전날도 야근이었군요-.-;).... 그 얘기를 당시 남자친구인 현재 신랑한테 했더니 '그런 사람들은 혈기왕성한 남자한테는 꼼짝도 못한다'더군요-.-; 만만하게 생긴 어린애를 하나 잡아 호통치는 게 순서라지요....

하여간... 그래서 집에 돌아올때는 택시를 타야지 했는데 딸이 "엄마 지하철탈래"하는 바람에 지하철을 탔습니다. 예전엔 아무리 딸을 데리고 있어도 노인들 앉으시라고 일부러 노약자자리 근처에는 안  갔는데, 오늘은 발도 띵띵 붓고 허리도 아프고 그래서 일부러 노약자좌석으로 갔습니다. 몇달 전에 한번 지하철을 딸을 데리고 탔다가 40분가량 서서 왔던 끔찍한 경험이 있어서... 거기 보면 '장애인, 노약자, 임산부 좌석'이라고 되어 있잖아요.

다행히 자리가 있길래 딸을 안고 앉았습니다. 지하철에 사람이 꽤 있어서 한 분이라도 앉히기 위해서요. 그랬더니 옆에 계신 할머니께서 "아이구, 짐도 많은데 애는 그냥 옆에 앉히라"고 하시길래 애는 또 따로 앉혔습니다. 그리고 한숨을 돌릴 무렵...

한 두 정거장 지났을까요? 어떤 장애인(다리를 약간 절름거리고 말이 어눌한)이 제 앞에 떡 서더니 "여기 장애인 자리, 아줌마 비켜"라는 겁니다. 그래서 어찌할 바를 몰라 멍하니 있는데(정말 아무 생각이 안 나더군요. 할아버지한테 작대기로 맞은 것도 모자라 이젠 장애인까지 자리를 내놓으라고 성화니)... 한 2초쯤이나 지났을까요? 맞은 편에 계시던 젊은 할아버지(50대로 보였지만 70대일지도 모르죠)가 일어나시더군요.

순간 저는 그 할아버지한테 자리를 양보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양보를 하자니 '저 여자 왜 장애인한테는 양보를 안 했대? 지금 일어서는 걸 보니 그나마 일말의 양심은 있나보네' 하는 눈으로 볼 거고 양보를 안 하자니 '역시 뻔뻔하군'하는 소리를 듣겠더군요.

주변의 눈을 보니 임산부임을 알아보는 몇몇 할머니들 외엔 저를 엄청 어이없는 눈(특히 평소엔 자리양보 한번 안해본 뻔뻔한 남자들)으로 보고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아이고... 내 몸도 힘든데 그냥 다리라도 편하자 싶어서 그냥 눌러앉아있었지요... 사실은 일어설 기운도 없었습니다

그 장애인, 나중에 내리면서 큰 소리로 이러더군요. "거기 앉은 아줌마, 지하철 타지마! 탈 자격 없어"라고. 어이가 없었습니다. 황당해서 입을 떡 벌리고 있으려니 옆에 계시던 할머니가 말씀하시더군요. "많이 놀랐지? 저 사람 좀 이상한 사람이야. 내가 장사다니느라 맨날 보는데, 어떨 땐 돈도 달라고 그러고 그래. 그냥 무시하는게 상책이야"라고.

제가 만만하게 생겨서일까요? 왜 나만 갖고 그러는 건지 원... 그 주변엔 저보다 훨씬 젊고 멀쩡하고 자리양보쯤 해도 아무 탈없이 건장하게 버틸 장정들이 여럿 있었단 말입니다!!!

근데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오는 길에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만약 저도 '개똥녀'처럼 누군가의 폰카에 동영상으로 찍혔다면 저는 엄청 못된 여자꼴이 될 거라고요....
이마에 임산부라고 써붙이고 다닐 수도 없고(사실 배 보면 다 알만큼 알잖아요)...
아~~~ 차 없을땐 택시를!!! 특히 임신했을 땐 더더욱.- 오늘의 교훈이었습니다.
IP : 221.151.xxx.154
9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이궁...
    '05.9.10 8:31 PM (211.204.xxx.127)

    많이 힘드셨겠어요.
    전 너무나 당연한듯이 눈치주고 콕콕 찌르고 하는 사람한테는 절대 양보안합니다. ㅡㅡ;;
    그런사람들은 양보해줘도 고마운걸 몰라요.
    그나저나 몸도 힘드신데 맘도 무거우셨겠네요.
    힘내시고 건강한 아이 낳으세요~~

  • 2. 어쩌면
    '05.9.10 8:31 PM (210.91.xxx.97)

    개똥녀도 재습게 걸렸다고 볼 수 있는데요
    사후 뒷처리가 문제였던거죠(본인은 당황해서라고 했지만...)
    앞으론 쟈철이나 뻐스 타시면...배를(안그래도 부르신 배겠지만) 더더욱 뽈록~하게 하세요
    더더더욱 크 보이게요..임신하면 몸상태가 약해지는 거 맞잖아요..노약자에 속하는거죠
    그리고 4가지엔 4가지로 대응하세요...

  • 3. 님...
    '05.9.10 10:09 PM (222.107.xxx.102)

    만만하게 생겨서...라고 넘 자학하지 마세요...그냥 재수가 없었다고 생각하시고 얼른 잊어버리세요..
    저두 4개월째로 접어드는 임산분데 제가 다 속상하고 화가 나네요...
    정말 꼭꼭 택시를 타던지..아님 남편 손 꼭 붙들고 다녀야 겠어요....
    으.....무서워라..~~~

  • 4. 악몽
    '05.9.10 11:10 PM (211.247.xxx.172)

    저희 어머니 환갑 한참 넘으셨는데,노약자석에 앉혀드리고 전 서있었거든요..어떤 할아버지,다짜고짜로, 욕을하면서,지팡이로 절때리기 까지..ㅜ_ㅜ;; 저 삼십대고,제 큰오빠가 올해 딱 사십입니다...저희 어머니 환갑한참 넘으셨으나,곱게 해서 다니시거든요..저희 엄마를 보고,나이도 젊은데 노약자석에 앉았다고 난리난리....저 맞는거야,괴팍한 노인한테 한대 맞았다 생각하면 그만이지만,어머니한테까지 욕퍼붓고,참을수가 없어서,'할아버지...저희 엄마 여기 앉아도 충분히 되실나이예요'해도 막무가내.....엄마가 참다못해서 몇마디 하니 다음정거장에서 욕하면서 내리더라구요.정말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게만드는 노인네들 참 많아요.....지하철 타면 그래서 저도 노약자석 근처도 가기싫어요....

  • 5. 딸가진 맘
    '05.9.10 11:50 PM (221.164.xxx.143)

    저도 그런 경험있어요
    그래서 절대 지하철 노약자석 안 갑니다

  • 6. 저도 진심으로
    '05.9.11 9:56 AM (18.98.xxx.231)

    동감합니다. 제가 다 속이 터지려고 하네요.

    그리고;;; (같이 만만하게 생긴 입장에서) 정말 만만하게 생긴 사람이 따로 있는 것같아요.

    저는 강남역 스타벅스에서 웬 할아버지한테 제대로 당한 적이 있어요.
    (이 할아버지 강남역 스타벅스에 매우 자주 출몰하십니다;;;)

    빈 자리가 한 눈에 봐도 여럿인데, 제가 혼자 푹신한 소파가 있는 테이블에 앉아서 책도 보고 뭣도 쓰고 하고 있는데
    늙으신 할아버지 한분이 맞은 편 자리에 앉아도 되겠냐고 하시더군요.
    딱딱한 의자가 불편해서 그러시나 보다 해서
    그러시라고 그랬더니 그 다음부터 당장 반말로 테이블도 반은 내 차지니 네 책을 치워라,
    무슨 초등학생들이 책상에 금 긋는 것처럼 제 책을 밀어버리고 앉더군요.
    너무나 기가 막혀 짐 챙겨서 일어나니 어딜 째려보냐면서 주먹질까지 -_-;;;

    만만하게 생긴 경우엔 만만하지 않다는 것을 온 몸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는 것같아요.

  • 7.
    '05.9.11 12:33 PM (211.215.xxx.2)

    딸내미가 7살 때 발목을 다쳐 반깁스 한채로 전철을 탔는데 어떤 할머니께서
    노약자석에 앉아 계시면 옆에 빈자리에 저희 딸내미보고 앉길 권했습니다.
    노약자석이라 앉으면 안된다고 배운 아이는 싫다고 했지만
    다리를 다쳤으니 앉으라는 할머니 말씀에 엉거주춤 걸터 앉아서 갔습니다.
    세정거장쯤 갔나... 할머니(50대쯤, 이런분 평소엔 할머니라고 부르면 난리를 치다가도
    전철이나 버스에선 꼭 할머니 행세를 하십니다.) 한분이 타시더니 저희 딸내미
    머리를 한대 쥐어 박으며 어른이 왔음 일어나야지 앉아있다고 호통을 치더군요.
    전 너무 어이가 없어서 그 놈의 성질 머릴 못이기고 냅다 소릴 지르고 말았습니다.
    "일어나라고 말로 하지 왜 때리냐"구요.
    쌍욕을 무지막지하게 하더군요.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옆자리 할머니께서 젊은 할머니를 야단치자 그 할머니한테도
    "늙은이는 입 닥치라"고 하더군요.
    세상에 그런 사람도 있습니다.
    아이랑 함께 자리에 앉아 가면 꼭 끼어앉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전 왠만하면 아이랑 함께 서서 다닙니다.
    아이는 그 이후로 노약자석 근처에도 안가구요.
    제가 안만만하게 생겼는데 이래요.

  • 8. ..
    '05.9.11 10:44 PM (211.215.xxx.20)

    세상엔 이상한 사람이 더 많아요.
    저희가 상식적이라고 생각하는 보통 사람이..어쩌면 상위 5프로 안에 드는 예의바른 인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종종 합니다.
    저는 아이가 살짝 그런 일을 경험하면.. 그런 식으로 이야기 해줍니다.
    세상엔 네가 이해가 안되고 너무 이상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3분의 1은 된다고
    엄마아빠 같은 사람만 있는건 아니라고..

    전 요즘 좀 강해졌거든요.
    그리고 나서 돌아보니까요.. 바로 윗분이 적어주신 그런 정말 무대뽀들 빼놓고는..
    정말 강한 사람앞에서 강한 사람은 없더군요.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약자에게만 강해요.

    힘을 기르세요.
    눈에 힘주는 연습도 하시구요.
    임산부시니까.. 배를 더 내밀고 다니시고 대중교통이용하면서 더 당당하세요.

    전 8개월때 좌석탔는데..글쎄 아저씨 한명이 안으로 안들어가고 절더러 들어가라고 하는데..
    그 좌석이란곳이 엔진때문에 불룩 튀어나온 곳이었어요.
    도대체 사람이 앉을수 없는곳이었죠.

    배가 엄청 나왔는데도 그런 인간이 있어요.
    저 바로 내렸잖아요. 운전 기사분께 큰소리로 그사람 들으라고 한소리하구요..
    바로 택시로 갈아탔어요.

    너무 힘든 하루셨겟어요.
    여기다 가끔 맘 털어노시고 힘내세요.

    상위 5프로인 우리가 참자구요.

  • 9. ..
    '05.9.12 7:47 PM (211.217.xxx.26)

    모양이 안 이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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