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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부럼

제제 조회수 : 887
작성일 : 2005-02-23 00:00:09
오늘도 야근을 하고 있었습니다.
바쁜데 전화 건다고 면박을 하도 많이 줘서
우리 엄마 왠만하면 전화 안하시는데
오늘 모처럼 전화가 왔습니다.

한창 회의 중이었던 터라 또 슬며시 짜증이 나기 시작했습니다.
"바쁜데 왜?" 하고 퉁명수럽게 전화를 받았더니
엄마가 미안해 하시며 급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도 늦나? 그럴 거 같아 오곡밥이랑 나물 몇개 해서 갖다 놨다.
부럼도 넣어 뒀으니까 내일 아침에 일어나서 이서방이 꼭 부럼 깨라."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팀원들도 있고 해서 급히 전화를 끊었습니다.

그리고 집에 와서 식탁을 보니
오곡밥을 비롯해 취나물, 무나물, 씨레기나물, 고구마순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나물 두어 가지가 놓여 있었습니다.
또 언제 만드셨는지 깨강정, 땅콩강정, 밤,
그리고 껍데기를 직접 벗긴 듯 조금씩 상처가 난 호두까지 가지런히 있었습니다.
울컥 눈물이 났더랬습니다.
맨날 화만 내는 딸이 뭐가 이쁘다고 바리바리 싸들고 오셨는지....

엄마를 해마다 부럼을 챙겨 주셨습니다.
아주 어려서 직접 깨물지 못할 때는 엄마가 대신 깨물고 "우리 ****이 부럼이다." 외치셨다 했고,
자라고 나서는 눈비비며 일어나는 저에게 땅콩이랑 밤을 내밀며 부럼을 깨게 시키셨습니다.
잠이 덜깨 귀찮아 밀어내도 기어코 부럼을 깨물게 하시곤
"우리 **** 올해도 건강해라. 학교 가서 더위사지 말고." 말씀하셨었지요.

결혼을 하고 올 정월대보름은 그냥 지나치나부다 했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가져다 놓은 오곡밥과 나물, 부럼을 보니
새록새록 옛기억이 떠오르며 가슴 한켠이 아릿아릿 저려왔습니다.
앞으로 엄마가 없는 정월대보름은 어떻게 지내나,
이맘때쯤 땅콩이나 밤, 호두를 볼 때마다 눈물이 나면 어쩌나....

그러지 않기 위해서 자주 엄마 얼굴 보러 가고
살갑게 전화도 걸어 수다도 떨고, 목욕탕도 함께 가야지
엄마 행복하게 해드리는 방법까지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 냉정한 딸 그게 잘 안됩니다.
엄마 돌아가시고 나서 가슴을 치며 후회할 거 잘 알고 있으면서도
괜히 부끄러워, 괜히 내 모습이 아닌 거 같아
이 바보 같은 딸은 그게 잘 안됩니다.
그저 마음만으로 너무 감사하고, 안타깝고,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바랄 뿐인 저는
정말 바보 같은 딸입니다....
IP : 59.187.xxx.194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05.2.23 1:22 AM (61.84.xxx.24)

    그런 어머니...저는 정말 부럽네요.^^......
    어머님께 다정하니 고맙다는 전화 한통 꼭 드리시구요.
    ........어머님 소원처럼 올 한해 건강하시구요..

  • 2. .....
    '05.2.23 2:37 AM (218.237.xxx.193)

    넘 부러워요^^

  • 3. ...
    '05.2.23 8:21 AM (220.118.xxx.89)

    저도 부럽네요. 모든 어머니가 제제님 어머님 같지는 않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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