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가 초등 2학년 때였어요.
당시 음악잡지에서 일하는 후배가 공연티켓을 자주 주어서
아이와 저는 연극관람, 전시회관람, 음악회 등 문화혜택을 맘껏 누릴 수 있었습니다.
그 후배가 하고많은 지인들 중에서 특별히 나에게 티켓을 많이 준 이유는 아마
감상 후의 감동을 열심히 표현했기 때문일 겁니다. ㅎㅎㅎ
그걸 보고 온 다음날 전화해서는
너무너무 좋았다, 억수로 재밌었다, 아이가 정말 좋아하더라, 진정 유익했다, 행복했다.....
표현도 다양하게 감동을 전했으니 후배에게는 주는 기쁨이 충만했으리라고 봅니다.
(표현하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
러시아에서 왔다는 어떤 저명한 지휘자(이름을 잊었어요)가 이끄는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세종문화회관에서 관람할 때의 일입니다.
흐르는 곡이 귀에 익숙한 음악이었기도 했지만
우리는 근사한 백발이 돋보이는 연주자가 멋진 폼으로 지휘봉을 휘두르는 광경에 압도되어 있었지요.
한참 몰두해 있는데 옆에 앉아 있던 아이가 듯 벌떡 일어나더니
"나 오늘 일기 쓰고 잘꺼!"
하고 소리치는 겁니다. 어린 마음에 얼마나 감동을 받았으면....
주변에 사람들이 쳐다보길래 황급히 아이를 앉히기는 했지만.
이런 이야기를 그 후배에게 전했으니 후배에게는 얼마나 보람찬 일이었을지....
연주회 시간을 기다리던 그날은 마침 국화전시회가 있었습니다.
세종문화회관 뜰에 형형색색으로 피어 있는 넙적넙적한 국화를 보더니 아이가
꽃구경 좀 하고 오겠다며 뛰어갔습니다.
저는 아이의 책 한 권을 손에 들고 건성으로 넘기고 있었지요.
한참 후 아이가 다가오더니 시를 한 편 지었다며 빨리 받아적으라는 겁니다.
저는 읽던 책 제일 앞 면지 부분에 아이가 부르는 대로 받아적었습니다.
가장 먼저 핀 꽃은
꽃씨를 날리며
세월을 보낸다
이게 아이가 읊은 시 전문입니다.
당시에는 시가 뭐 이래? 하는 맘이었는데
세월이 지날수록 입가에 미소를 짓게 하는 시입니다.
음악회 간다고 꼬마양복에 나비넥타이에 구두에....
나름대로 차려입은 아이가 뒷짐을 지고 시선을 석양에 둔 채 시를 읊는 모습은
지금껏 시 자체보다도 훨씬 이쁜 이미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게 서울나들이를 하고 오는 날이면 우리는 교보문고 등 대형서점에 들러
함께 고른 책을 아이가 가지고 간 베낭 가득 넣어 짊어지고는 돌아오는 전철에서 읽곤 했습니다.
덕분에 지금 아이는 엄마 아빠보다 독서량이 훨씬 많습니다.
아이의 서가에는 지금도 면지에 아이의 처녀시가 씌어진 그 책이 꽂혀 있습니다.
그 끝에 " 음악회를 기다리며 치화가 짓고 엄마가 받아적다 " 라는 엄마의 사족이 덧붙여진 채로....
오늘 저녁답에 무심코 그 책을 펼쳐보고는 옛생각이 나서 이리 수다를 떨었습니다.
덧붙이자면, 요즘 아이가 쓰는 글을 보면
기대와는 다르게 문장도 엉망, 글씨도 엉망, 도무지 맘에 드는 구석이 없습니다.
아이의 소질을 개발해주지 못했다는 자책 때문에 아이에게 몹시 미안합니다.
덕분에 중3이 끝나가는 아이에게는 아직 이렇다 할 특기가 없어서 많이 걱정스럽습니다.
여러 맘님들,
가급적 빨리 아이의 소질을 찾아내서 개발해주시라고 권해 드립니다.
아이의 소질은 누구보다 엄마의 눈에 더 잘 띌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개편이전의 자유게시판으로 열람만 가능합니다.
아이의 처녀詩
강금희 조회수 : 880
작성일 : 2004-11-01 02:33:39
IP : 211.212.xxx.177
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안나돌리
'04.11.1 9:19 AM (218.39.xxx.173)깜짝 놀랬어요~~~ 어찌 어린 아이의 시가??
지금도 책을 열심히 읽고 있다니 앞으로라도 시인이 될 가능성이? 있으리라
생각되네요.. 꼭 시인이 아니더라도 사려깊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커준다면야~~
자신의 소질을 개발시켜 나가지 않겠어요?2. 퐁퐁솟는샘
'04.11.1 11:37 AM (61.99.xxx.125)어린애가 쓴시 같지 않네요^-^
저도 제 작은 아들 열씸히 전시회에 공연에 음악회에 끌고 다니고 책 많이 읽게 했더니 지금은 공부도 잘하고 글짓기로 상도 타오고 그리고 어려운 단어도 툭툭 튀어나와요
애들은 엄마가 정성들이기 나름인것 같아요
제 아이도 일기에 시를 써갔는데 담임 선생님께서 그 시 어디서 옮겨 적었느냐고 메모하신적 있어요
할수없이 그 시의 배경이 되는 책의 제목과 작가에 대해 쪽지에 적어보내서 오해는 풀렸지만
사실은 저도 그시 읽고 깜짝 놀랐거든요
그리고 아이가 글썼을때 문장이 어색하더라도 그냥 잘했다고만 칭찬해주세요
계속 책읽다보면 어색한 문장은 저절로 고쳐지거든요
오히려 엄마가 문장 어색한걸 지적하면 글쓸때 문장에 신경쓰느라 생각하는 힘이 떨어질수가 있답니다3. candy
'04.11.1 2:40 PM (220.90.xxx.34)아이이름이 치화?
이름이 멋지네요!~혹..동생이름이 휘화? 아닌가요?
제가 아는 분이 아닌가 해서요?4. 강금희
'04.11.1 3:34 PM (211.212.xxx.177)candy 님, 아이가 한 마리밖에 없어요.ㅎㅎ
퐁퐁님, 훌륭한 지적입니다. 명심할께요.5. candy
'04.11.3 10:07 AM (220.90.xxx.34)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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