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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났쇼' (강석진) -펌
http://home.freechal.com/sjkang/
우리 아이가 중학교 1학년이 되었을 때의 얘기다. 어느 새 훌쩍 커버린 키, 조금씩 검게 솟아나는 콧수염 등을 보며 나는 아이가 커 가는 것에 대한 대견함과 함께 어떤 상실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러다가 꽃피는 4월이 왔다. 소풍을 간다 어쩐다 즐겁게 생활하는 것 같더니 이제 중간 시험을 치른단다. 나는 생각했다. 이제 드디어 때가 왔다. 녀석에게 ‘진짜 공부’가 무엇인지, 극기란 무엇이며 절제란 무엇인지, 승부란 무엇이며 경쟁이란 무엇인지를 가르쳐야 할 때가 왔다고 느낀 것이다.
내가 맨 처음 시작한 일은 아이가 시험 공부를 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추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도대체 아무런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것이었다. 중학생 수준에서 중간 고사 준비란 간단한 것이다. 우선 교과서와 선생님이 가르친 내용이 잘 정리된 노트가 있어야 한다. 그 다음엔 (출제를 하는 선생님에 따라 다르지만) 교과서를 중심으로 내용 정리가 잘 되어 있고 적절한 문제 풀이 연습을 할 수 있는 참고서가 있어야 한다.
그런데 우리 아이는 노트도 부실해 보였지만 어떻게 된 영문인지 참고서가 한 권도 없었다. 이런 건 학기초에 공부 잘 하는 아이들과 정보 교환을 한 후, 직접 서점에 가서 자기가 볼 때에도 납득할 만한 참고서를 사 놓았어야 한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어렸을 때 완전정복, 뉴 스터디 북 등 얼마나 많은 참고서들에다가 밑줄을 그어대며 공부를 했었는지를.
나는 매우 답답하고 화가 났지만 한편으로는 내가 이 세상에 존재해야만 하는 필연적인 의미를 절실히 느끼며 서점으로 갔다. 어렸을 때 공부를 아주 잘 했던 사람의 비상한 안목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위한 참고서를 골라내고 있는데 웬 여인이 자꾸 딴지를 건다. (나는 딴지 거는 사람이 제일 싫다.) 다 읽어보지도 않고 풀어보지도 않을 걸 뭣하고 그렇게 많이 사느냐는 것이다. (이 분은 우리 집 종손의 생모인 것이 확실하지만 때때로 혹시 계모가 아닐까 의심이 갈 때도 있다.) 권력의 중심에서 밀려나 있는 나는 할 수 없이 아이가 ‘초절정’ 고수가 되기 위해서는 꼭 필요했던 참고서 몇 권을 빠뜨린 채 ‘그저 고수’가 될 만한 것만 골라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 온 나는 아이에게 공부하는 요령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우선 국어와 수학과 영어는 평소에 어느 정도 기본 실력이 쌓여 있어야 하며 시험보기 오래 전부터 틈틈이 준비를 해 놓았어야 한다. 시험이 다가왔을 때에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을 확실히 복습하고 혹시 전혀 새로운 문제가 나올 지도 모르니까 만일에 대비하는 심정으로 문제집을 한 번 풀어 봐야 한다.
과학 과목은 뭐 평소에 그렇게 아주 열심히 해 놓을 필요는 없겠지만 수업 시간에는 확실하게 이해해 놓고 있어야 한다. 한꺼번에 벼락치기로 이해하기에는 내용이 너무 어렵기 때문이다. 미안한 얘기지만 암기 과목은 수업 시간에만 잘 듣고 있으면 된다. 별로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도 없고 설사 잘 모르는 채 그냥 넘어가더라도 시험 전에 한번 읽어보면 대부분 이해할 수 있다.
자, 그럼 시험 공부를 시작해 보자. 우선 교과서를 두 번 읽고 선생님의 노트를 두 번 읽은 후 참고서의 내용을 두 번 읽어라. 혹시 그것들 사이에 내용이 서로 상반되는 점이 있으면 선생님 노트 >교과서 > 참고서의 내용 순으로 신뢰를 갖도록 해라. 물론 이론적으로는 교과서 > 선생님 노트 > 참고서의 내용 순으로 하는 것이 올바른 얘기겠지만, 실제로는 나중에 ‘법정에 설 일이 생길 경우’ 나는 선생님의 노트에 나온 대로 썼을 뿐이라고 소명을 할 수가 있다.
그 다음엔 참고서에 나온 문제를 풀어 봐라. 이때에 주의할 점은 문제지에 답을 표시하지 말고 다른 종이에 표시한 뒤 해답과 대조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당연히 틀린 문제가 여럿 나올텐데 그때는 해당 내용을 교과서, 노트, 참고서에서 확인 한 후 문제집의 문제를 전부 다시 한번 풀어 본다. 만일 이미 문제집의 답에 동그라미를 쳐 놓았다면 두 번째 푸는 것이 그저 암기가 되고 만다. 정말 자기 실력을 테스트하고 싶으면 문제집에 답을 표시하면 안 된다.
이렇게 녀석에게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녀석의 표정을 보니 뭔가 지루해 하고 동의하지 않는 듯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이 중요한 순간에 진리를 전파하는 복음 말씀을 전달하는 과정을 멈출 수는 없으므로 나는 꿋꿋이 이어갔다. 만일 중간 시험 기간이 3일이라면 약 일주일 전에 시험 공부를 시작하는 게 좋다. 너무 일찍 하면 다 잊어버린다. (물론 나는 시험 전날이 되기 전까지는 공부를 하지 않았다. 공부하기도 싫었지만, 시험을 여러 날이나 앞두고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라고 생각하던 철없는 시절이 있었다.) 우선은 시험 보는 각 날짜마다 공부하기 제일 어려운 것들을 골라 미리 공부를 한다. 다른 것들은 최악의 경우 그 전날 벼락치기를 하면 된다......
이렇게 중간 시험 대비를 위한 오묘한 비책을 쏟아 놓고 있으려니 우리 집 종손의 엄마 되는 사람 가라사대, 그런 요령을 학창 시절에 미리 알았더라면 자기가 나보다 훨씬 더 공부를 잘 했을 거란다. 그런데 그때 우리 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어 왔다.
“아빠, 꼭 그렇게 치사하게(!!) 공부를 해야 돼요?”
결정적인 한 방에 그로기 상태에 빠져버린 나는 “그럼 니가 알아서 해라!” 하고 삐진 소리를 내며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드디어 시험 전날이 되었다. 녀석의 노는 꼴을 보아 하니 열심히 TV만 보고 있다. 아니 내일이 시험인 녀석이 지금 TV를 보고 있으면 어찌할 것인가. 할 수 없이 참견을 했다.
“너 공부 다 했어?”
녀석의 대답이 돌아 왔다.
“네 다 했어요.”
나는 이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 정말 싫어하지만 우리 땐 정말 이런 반응을 보인 적이 없다. 아무리 천재라도 어떻게 시험 공부를 다 할 수가 있겠는가? 시험 공부를 다 했다는 것은 이제 그 시험은 만점을 맞을 각오가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기상천외한 심리 상태를 가진 선생님들이 요상한 문제집을 베껴 거기서 한 번 더 비비꼬아 내는 문제들을 어떻게 만점을 맞는단 말인가? 나는 “야, 이 시건방진 놈아!” 하고 야단을 치고 싶었지만 초인적인 자제력을 발휘하여 마음을 달랬다. 그래, 꼭 1등을 해야 하는 거 아니잖아? 마음의 여유를 갖는 게 좋지. 그래서 나는 다음과 같이 부드럽게 말하며 마무리를 지었다.
“그래도 한 번 만 더 정리를 하렴.”
물론 속으로는 ‘설마, 2등은 하겠지’ 하는 마음이 있었다.
사건은 그 다음날 일어났다. 학교에 출근한 이후 불안과 초조감에 사로잡혀 전전긍긍하던 내가 점심 시간이 지나자마자 집으로 전화를 한 것이다.
“너 오늘 시험 잘 봤니?”
“음...... 그냥 그래요.”
뭔가 불안한 느낌이 든 나는 동네 아줌마들이나 하는 유치찬란한 질문을 해댔다.
“100점 맞은 거 몇 갠데?”
“없어요.”
그 소리가 내겐 천둥소리처럼 들렸다. 눈앞이 아득했다. 그날 녀석은 사회를 비롯하여 세 과목의 시험을 봤었다. 나는 좀 더 파고들었다.
“사회는 몇 개나 틀렸는데?”
“열 한 갠가?”
순간 나는 이성을 잃었다.
“뭐? 열 한 개?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내가 얼마나 큰 소리를 질렀는지를 글로 나타낼 수가 없어서 답답하다.)
“우리 반 애들 다 그래요?”
“아니, 너희 반엔 다 맞거나 한 두 개만 틀린 애 없어?”
“있어요.”
“그런데 넌 왜 그렇게 많이 틀려?”
“두세 명 빼면 다 그렇다니까요?”
그게 바로 초점이다. 내 말은 어찌하여 네 녀석이 소수에 속하지 않고 다수에 속하느냐는 거다. 그러나 그 순간 강의를 하러 갈 시간이 됐으므로 내일 시험은 절대로 잘 봐야 한다고 윽박지르고 전화를 끊었다.
누구나 자기가 이런 유치한 부모가 되는 건 견디기 어렵다. 오후 내내 흥분을 가라앉힌 나는 일찍 (그러니까 보통 때보다 일찍......) 퇴근하여 아이와 조용히 얘기를 했다. 시험 문제를 직접 들여다 본 것은 물론이다. 솔직히 그 중의 서너 개는 매우 애매했다. 그래도 열 한 개씩이나 틀린 것은 용납할 수가 없었다. 나는 조용한 얘기를 포기하고 훈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나도 “아빠가 어렸을 때는 말야” 하며 시작하는 잔소리를 아이들이 제일 싫어한다는 것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이상하게도 자꾸만 그런 방향으로 말투가 흘러갔다.
“아빠는 중학교 다닐 때 (비록 축구반 수준이었지만) 축구부 생활을 하면서도 그렇게 많이 틀려 본 적이 없다. 너는 어떻게 아빠가 전 과목에서 틀린 것보다 훨씬(?) 더 많이 한 과목에서 틀릴 수가 있니? 응? 아니, 도대체 어떻게 그럴 수가 있니?”
나는 집안이 떠나가도록 일장 훈시를 한 뒤 이쯤 했으면 녀석도 깊이 반성했겠지 하고 돌아섰다. 그때 녀석이 담요를 푹 뒤집어쓰며 무겁게 내뱉었다. (아주 나직한 소리였지만 나는 분명히 들었다.)
“잘 났쇼~~~!!”
에필로그: 그 순간 나부터 웃음이 터져 나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어쨌든 아빠에게 “잘 났쇼”라는 말을 함부로 하는 놈이 제대로 된 인간이 될 리는 없으므로 시간이 지난 후 조용히 따로 불러 아빠에게 그런 생각,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되는 법이라고 타일렀다. 그래서 그 문제는 해결된 것 같다. (다시 내게 그런 적이 없으니까.) 그런데 다른 문제는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1. 잘난엄마 --;;
'04.7.21 5:08 PM (211.204.xxx.11)아주 감동(?) 적입니다 ^^;;
저희집에 있는 E모군 소리를 내어 말하지않았지만
그 녀석 맘속에선 벌써 오~~래전 수없이 했을법한 말 "잘났쇼~~~"
남의 일이 아닌것같아 자는 녀석 잠꼬대도 귀기울여들어볼랍니다2. 다시마
'04.7.21 5:36 PM (222.101.xxx.87)저희 집 풍경이랑 너무나 흡사해서 놀라움와 함께 위로를 받았답니다.
혼자서 알아서 해주면 좋으련만 부모노릇 하기가 왜 이리 어려운지요.
그저 건강하게만 자라다오.. 해야 할까요?3. 날으는 원더우먼
'04.7.21 5:51 PM (61.100.xxx.225)공감대가 팍팍!!! 와~닿습니다.
ㅋㅋㅋ4. Jessie
'04.7.21 5:57 PM (211.201.xxx.10)야. 진짜 멋진 사람이네요. 홈피도 가봤어요.. 이글도 제 홈피로 퍼갈께요..
5. ㅎㅎㅎ
'04.7.21 7:59 PM (221.138.xxx.104)강석진님이 제가 개인적으로 아는 분이라는 얘기를 막 하고 싶네요...
직접 보면 더 멋진 분이세요~~~6. 치즈
'04.7.21 9:07 PM (211.194.xxx.182)이해해주길 바란다는게 아니라
올케 언니들이 자꾸 아이에 대해서 저한테 훈계? 간섭을 하니 그러는 거죠.
아이는 언제 갖냐 빨리 낳아라~7. 달개비
'04.7.22 12:06 AM (61.80.xxx.24)아직 어린 딸자식을 둔 저도 공감대 팍팍 형성됩니다.
울딸 이제 초1인데도 저런 느낌 들어요. 우짤까나?8. jasmine
'04.7.22 1:19 AM (218.238.xxx.174)내 아들 얘기네요.....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는건지...앞이 캄캄합니다.....ㅠㅠ
9. 밴댕이
'04.7.22 4:04 AM (68.78.xxx.20)멀지않은 일인거같아 막막하네요...에효...
10. 라일락
'04.7.22 9:23 AM (211.172.xxx.67)또 돈이 있는 사주입니다. 그냥이 아니고 상당히 많다고 봐야 합니다.
관성(정관, 편관)도 있으니 돈을 지킬 능력도 있으며....
식신이 편관을 봤으니.... 식신제살, 영웅격, 용감성도 있습니다.
공부를 안하는 것은 인성이 없어 그런건지....?
자신이 임수라서 지혜에 해당되니 때가 되면 하겠죠.
인성이 없는게 재성(돈)의 입장에선 좋은 점이 됩니다.
인성이 있으면 강한 재성이라 인성을 파괴? 하는데 힘을 사용하게 됩니다.
(재극인)11. 양파부인
'04.7.22 10:13 AM (222.101.xxx.243)제 가슴을 콕,콕,콕 찌르는 아주 감동적인 그러면서도 유쾌한 글이네요.. 홈피가야겠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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