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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告解)

귀여운토끼 조회수 : 878
작성일 : 2004-06-30 15:06:27

<안에서 맞는 바깥 바람은 차가운데
바깥에서 맞는 바깥 바람은 차갑지 않다.>

들꽃이 좋아 온 들을 헤매던 때가 있습니다.
화원에서 익숙하게 보았던 장미나 백합의 아름다움과는 다른
보아 주는 이 없고 보살펴 주는 이 없지만
들바람에 온몸을 맡기며 함초롬한 자태는 그지없이 아름다워
온 들을 헤맵니다.

바위에 눌려 살려달라 외치는 이도 있고
잡초 속에 뭍혀 세상 구경하고 싶다고 짧은 목을 길게 빼는 이도 있습니다.

누군가 저에게 결혼식 축시를 써달라고 부탁하면 저는 항상 들꽃을 소재로
시를 씁니다.
아름다운 자태야 온실 속의 꽃이 으뜸이겠지만 아무리 아름다운 꽃도
며칠의 짧은 시간이 지나면 버려지는 아름다움이 되지요.
하지만 들꽃은 생명력이 있습니다.
이미 버려져 있기에 살아가는 방법을 알고 주어진 아름다움을 소중하게 지키는
법도 압니다.

비를 맞고 찾아 간 납골당은 고즈넉한 고요가 살갗을 에이는 듯
처련하게 머물러 있었습니다.
들꽃과 조화가 어지럽게 흩어져 있는 곳에 산자의 눈에 잠든 자의 상처를
안과 밖의 단순한 눈으로 보는 곳에 삶과 죽음이 있었습니다.

4992번
60여 년의 삶을 처절하게 산 뒤에 남은 번호입니다.
빈 상자에 재를 채우고,손톱과 발톱 그리고 머리카락 ...
망자를 그리는 사진 한 장.

무수하게 이어진 상자들 틈에 또 다른 생존을 위하여 번호표를 받고
산자의 한숨이나 그리움을 듣고 있었습니다.
아직은 이성보다 감성이 앞서는 것인지는 모르지만
초라한 죽음 앞에 서글픔이 앞섰습니다.

아무 말도 없이 긴 시간을 서있는 것으로 그리움을 대신해야 했습니다.


             相思都在不言裡
             一夜心懷髮半絲
             欲知是妾相思苦
             須試金環咸舊圍

             그리워 말 못하는 애타는 심정
             하룻밤 괴로움에 머리가 센다오
             얼마나 그리웠나 알고 싶거든
             금가락지 헐거워진 손가락 보오.


삶은 늘 죽음을 그림자 삼아 살아 갑니다.
떼 버리고 싶지만 죽음 없는 삶이나, 삶이 없는 죽음은 생각할 수 없기에
그 둘은 늘 붙어 다닙니다.

훗설이 현상학에서 말했듯이 요 며칠 사이 저는 판단 정지가 되고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헤매는 거리의 미아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문득 누군가에게 내 마음의 빈자리를 내어주는 고해를 하고 싶은 간절함에
글을 씁니다.

들꽃처럼 생명을 주지 않아도 살아있고
모진 비바람에 쓰러져 죽어도 스스로 슬퍼하지 않은
인생이 행복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현듯 듭니다.

누구나 마음이 괴로울 때 찾는 장소가 있습니다.
천주교인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괴롭고 답답한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을 때
하룻밤 사이에 머리가 세고 손가락이 헐거워질 정도로 괴로운 심정이
될 때 저는 명동 성당을 찾습니다.

노동자들의 아픈 외침이 있고
그 아픔을 저도 헤아려 보면서 명동 성당을 찾습니다.
지하철 4호선을 타고 명동 입구에서 내리고 네온사인 찬란한 길을 걷습니다.
여기저기 비틀거리는 취객들이 보이고 환각에 빠진 도시의 모습을 감상합니다.
로얄 호텔을 마지막으로 거리는 적막에 휩싸입니다.

마리아상 앞에서 무릎 꿇고
잠시 한탄의 한숨도 쉬고 지나온 세상사 괴로운 일들을
어머니 품안에 안겨 이야기하듯
입안에서만 맴도는 언어도 모든 부끄럼 잊고
속삭입니다.

시간의 흐름도 잊은 채
무릎 꿇은 육신의 고통도 잊은 채
산고의 아픔을 겪듯
뜨거운 눈물을 흘립니다.

      


                     성모 마리아 상 앞에서



         바람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눈길을 돌리다
         어느새
         흐릿한 눈동자가
         나이테의 연륜처럼 하나로 쌓입니다.

         담을 만한 순수한 자연을 찾아
         거리의 구석구석을 헤매었지만
         부딪히는 사람들의 눈총이 따갑습니다.

         어둠이 앉은 도시는
         네온사인 현란함에 춤을 춥니다.
         미치도록 가난한 마음이
         아늑한 벽돌로 이어진 꼭대기의 십자가를 찾습니다.

         한모퉁이 굽이쳐 돌아
         막힌 듯이 이어진 그 길 그 끝은
         하늘로 이어졌습니다.

         네 개의 계단을 올라서면
         두 팔 벌려 안을 만한 제단에
         끊이지 않는 기도 소리가
         먼발치에서도 눈물겹도록 아름답습니다.

         한쪽으로 벗어논 신발에 가만히 달빛이 내려앉고
         한 뼘 만큼의 공간을 넘지 못한 영혼이
         손가득히 눈길을 모읍니다.

         가로등 뒷편 어둠 사이로
         하나 둘 돌아서는 한숨 소리가 들리고

         이제는
         도시의 네온사인이 보이지 않습니다.
         스치는 바람에도 뭉클한 감사의 고해를 합니다.

IP : 211.57.xxx.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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