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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토리묵에 관한 기억

장수산나 조회수 : 928
작성일 : 2004-06-03 09:54:11
수산나가 울성당에서 젤루 좋아하는 루치아형님께서 서울로 이사를 가셨다가
본가로 돌아오시면서 집들이를 하였습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2년여에 걸쳐서 하시는 양반이니 나이 오십을 넘겼어도
거의 다람쥐 수준의 날렵함을 갖춘 분입니다.

어제의 메뉴는 방태산에서 형님께서 직접 채취한 곰취짱아찌에
텃밭에서 기른 상추겉절이, 시아버지께서 캐오셨다는 더덕구이....등등
요즘 한창 메스컴에서 떠들고 있는 웰빙밥상의 모델이였습니다.

그래두 가장 인기있는 메뉴는 형님이 백두대간에서 직접 줏어온 도토리를 말려서, 울궈서, 빻아서
집에서 쑨 도토리묵이였습니다.
구수한 루치아형님표 도토리묵은 양념장없이 그냥 먹는게 젤루 맛있습니다.

부엌에서 이미 도토리묵 매니아인 히야친따형님과 둘이 썰면서
도토리묵으로 배를 채운 두 미련퉁이.....ㅋㅋㅋ

수산나가 어렸을땐 강원도 촌동네에서 살았었는데  너무 흔한 묵이 도토리묵이라
잘 먹지를 않았더랬습니다.

언젠가 어부현종님께서 사진으로 올려주신 도토리밥을 끼니대신 많이 먹기도 하여
더더욱 묵은 즐기지 않았었는데
어른이 되어서 먹어보니 그렇게 맛있는 음식인줄은 예전에 미처 몰랐습니다.

저가 자란곳은 산골이라고 해도 5일에 한번씩 장이 서는 그런대로 번화한 촌이였습니다.
울엄니의 먼친적 아지매가 말그대로 강원도 첩첩산골에서 화전을 일구고 사시는 분이
계셨는데 장날이면 도토리묵을 큰 방티로 하나가득 맹글어서 팔러오시곤 하였습니다.

순박한 그 아지매는 반도 채 못팔고 남은 묵을 늘 울집으로 가지고 오시면
울엄니는 보리쌀로 묵값을 셈해 주시곤 하던 기억이 납니다.
물론 그 많은 묵을 다 먹을수 없으니까 썰어서 채반에 올려 바짝 말린 후
한겨울에 물에 불궈서 볶아먹기도 했는데 그 맛이 아주 일품이였습니다.

도토리묵은 즐기지 않았어도 말린도토리묵 볶음은 아주 좋아했는데 나중에야
알게되었지만 그 음식이 우리나라 전통 사찰음식중에 하나더군요.
잠시 이야기가 샛길로 빠졌지만.....다시 원위치!

어느날인가 묵아지매께서 당신집으로 절 초대해 주셨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어딜 놀러간다고만 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위인이였으니....ㅋㅋ

엄마가 깨도 넣고, 귀한 참기름을 발라서 맹글어준 보리주먹밥을 점심으로 산골짝 냇가에서
한판 까묵었을때 까정은 그래두 즐거운 소풍길이였습니다.
온통 돌맹이뿐인 산길을 걸어걸어, 돌아돌아, 넘어넘어......
초등학교 2학년 가을쯤이였던것 같은데 아홉살 기집얘에겐 눈물이 날 만큼
멀고도 힘든 길이였습니다.

어찌어찌 달래고 달래서 델꾸간 묵아지매네 집.....
방하나, 부엌하나....산비탈에 겨우 세워진 집이라기 보다는 움막이 맞을 겁니다.
가마니를 깔아논 방에서 바라본 벽은 바깥풍경이 어둠과 밝음의 모자이크처럼 내 기억속에
선명하게 살아있습니다.

아마도 그 날은 묵아지매 남편의 제삿날이였던거 같았습니다.
내 또래 남자아이와 둘이서 살고계시던 묵아지매는 묵방티에서 풀어낸 납딱한 둥글사탕 몇개,
생선한마리, 그리고 보리밥으로 지어낸 차례상을 차려놓고 아들아이에게 절을 하라고
종용하던 기억도 선명합니다.

신발도 없이 뛰어다니는 내 또래 그 남자아이는 집에 가고 싶다고 징징거리는
어린수산나를 위해 산비탈 밭에서 배추뿌리를 캐와설랑은 정성스레 깍아주기도 하고,
어쩌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맛보는건지도 모를 납딱사탕을 내 손에 쥐여주기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전깃불은 커녕 호롱불도 켜지않은 밤을 맞이하자 수산나의 울음보는 또 터지고 말았습니다.
어둠속에서도 걱정스레 내 얼굴을 바라보던 그 아이도, 낼 아침에 날 밝으면 집으로 데려다주마고
약속을 하시는 묵아지매도  내게는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처럼 여겨졌습니다.

캄캄한 밤이 너무나 무서웠습니다.
엄마랑 아부지랑 언니랑 동생이 어디에 있는지 도무지 감이 잡히지 않는
망막함이랄까......
내가 세상과 너무나 멀리 떨어져 나와있다는 느낌이 너무 무서웠던것 같습니다.
날이 샐때까지 자지도 않고 울어댔으니.......

팔랑거리며 묵아지매 뒤를 따라가던 내 모습을 바라보며 잘 댕겨오라고 손짓해 주시던
옆집할머니께서 골목어귀에서 힘없이 따라오는 내 꼬라지를 보시자마자 그러십니다.
"어이구, 이누무 간나가 밤새도록 울었구마~
간나야~ 니 엄마보고 싶다고 울고불고 난리났었재?"

그때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아니! 저 할머니는 나랑 함께 있지도 않았는데 어째 저래 꼭 알아맞추실까?
와~~저 할머니 요술할머니 아닌가?
이후부텀 옆집할머니는 나혼자만 알고 있는 요술할멈으로 영원히 입력이 되고 말았슴다. ㅎㅎ..



내가 세상으로부터 자유스러워지게 되면......
(예를 들어, 빚을 모두 갚는날, 내 아이들이 지들끼리도 잘 살 수 있는날, 남편 바오로가 내뜻과 함께 하는날....)
살고 싶은 집이 있습니다.

밤새도록 울며 무서워하던 그 집....
산비탈에 위험스레 붙어있던 그 움막입니다.

움막 밑으로 경사진 배추밭과
그 배추밭 둘레로 힘차게 하늘을 향해 뻗어있던 늘씬한 낙엽송이 입을 떨구던 그 곳...
보아도 보아도 산과 하늘만 보이던 그 곳에서 살고 싶습니다.

흙이 덕지덕지 붙은 더러운 내 발을 댓돌에 탈탈 털고 엉덩이를 디밀어
툇마루에 앉으면....
보리밥에 배추쌈을 된장에 싸서 먹는 소박한 밥상을 바오로와 마주하고 앉은 그림을 상상하곤 합니다.

보이는건 산과 하늘 뿐.....
밤이면 바람이 불때마다 흩어지는 낙엽송 작은 잎들이 내는 소리가 들릴지도 모르는....그곳에서
다시 살게 된다면 이제는 무서워하지도, 울지도 않을 자신이 있습니다.

참......이상한 일입니다.
단 한번 가본 그곳을 평생 그리워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습니다.






IP : 211.227.xxx.160
2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보리
    '04.6.3 11:01 AM (211.227.xxx.241)

    가슴이 따뜻해지는 아름다운 이야기입니다.
    언젠가는 뜻을 이루시기를...

  • 2. 아...
    '04.6.3 3:25 PM (81.182.xxx.21)

    눈 앞에 그림이 펼쳐지네요.
    아름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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