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자들이 둘 이상 모이면 가장 많이 등장하는 이야기의 화제는 대체로 시댁이나 친정과의 갈등이다. 많은 여자들이 이 두가지 이름의 다른 가족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기 위해 안간힘을 써보지만 사실상 어릴 때부터 보고 배운 것이 그 자유를 방해하는 걸림돌이 되고 만다.
언젠가 미국에서 어느 작가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주는 상처에 관해 파고들어 분석한 책이 나와서 관심있게 읽었던 기억이 있다. 표면적으로 가족이란 어느 나라와 문화를 막론하고 서로 사랑하고 아껴주어야 하는데, 우리의 삶을 돌아보다보면 사실상 가장 깊고 아픈 상처들은 모두 가족들로부터의 상처라는 아이러니를 잘 보여준 수작이었다.
나는 가족에 관해 생각할 때마다 '완장'이라는 소설(뒤에 유현목 감독이 영화화하기도 했다)을 떠올린다. 이 소설에서는 저수지 관리인이라는 완장 하나 때문에 자신의 정체성 전체가 돌변해버리는 주인공의 모습을 통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서글픈 정체성의 상실을 보여준다.
얼마 전 TV에서도 방영되었던 '엑스페리먼트(Experiment)' 라는 영화도 내용은 보다 극단적이었지만 비슷한 맥락으로 내게 감동을 주었다. 실제 상황과 무관하게 그저 실험을 위해 한 그룹은 죄수 역할을, 다른 그룹은 간수 역할을 하기로 하고 이들의 행동양상을 관찰하기로 하면서 벌어지는 일련의 사건들을 그린 영화이다. 극적 흥미를 위해 여러가지 비현실적인 요소들이 가미되었지만, 이 영화는 실제로 수 년전에 미국 스탠포드 대학에서 실제로 있었던 실화에 근거를 두고 제작되었다고 한다.
두 편 모두가 자신이 맡은 역할에 따라 정체성이 달라진다는 '역할 정체성'에 연관된 인간의 약함을 보여주는 작품들이다. 정상적인 의미로 보자면 개개인이 가지고 있는 자신의 정체성은 어떠한 환경이나 역할에 의해 영향을 받지 말아야 한다. 하지만, 실제의 우리의 삶에서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자신에게 부여된 역할에 따라 정체성이 흔들리게 된다.
시어머니, 친정어머니, 나, 올케, 시누이, 딸 아이...모두가 여자이다.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이지 않았다면 동네 목욕탕에서 만나 스스럼없이 세상 돌아가는 얘기를 나누며, 혹은 함께 남편의 흉이라도 보며 지나칠 수 있는 사람들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각자의 역할을 완장처럼 팔뚝에 두르고 나면 가장 가까워야 할 사이가 멀기만 하고 아픔만 주는 사이가 되어버린다.
미국에서 한 교회에 같이 다니던 어머니 연배의 권사님이 계셨다. 딸이 없는 그분은 나를 딸처럼. 친정과 멀리 사는 나는 어머니처럼 자주 왕래를 하며 지내다 보니 친분이 깊어졌다. 어느 날 내가 시댁에 관해 서운한 마음을 나누었더니 위로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해주셨다. 선영엄마가 이렇게 좋아하고 마음을 터놓는 나도 우리 며느리들에게는 욕을 먹는 게 있을 거야...허물 없는 사람 어디 있겠어...그러려니 하고 들었는데 세월이 더 지나고 나도 사십 줄에 들어서고보니 고개가 끄덕여진다.
시어머니도 시누이에게는 친정어머니이고, 친정어머니도 올케들에게는 시어머니이다. 내가 올케도 되었다가 시누이도 되었다가 하는 것처럼. 딸아이가 내게는 딸이지만 먼훗날에는 며느리가 되듯이. 자신이 맡은 역할을 행사하는 그곳이 어디인가에 따라 우리는 다른 모습의 완장을 찬다.
문제와 갈등이 생겨나는 경우는 대부분 이 달라진 역할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할 때가 아닌가 싶다. 며느리가 가장 상처를 받는 경우는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와 달리 살갑게 대해주지 않아서이다. 시어머니가 가장 고깝게 생각하는 것은 며느리가 친 딸처럼 가깝게 지내려 하지 않아서이다.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친정어머니를 비교하고 시어머니는 딸과 며느리를 비교한다.
시어머니가 마음에 안들고 며느리가 마음에 안들면 안들수록 우리는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상대를 변화시키기 위해 노력한다. 상대가 내 모습 내 마음을 따라 올 수 있게 하기 위해 쏟아붓는 비현실적인 이 노력기가 길면 길수록 상처도 깊어지고 마음도 멀어진다. 시간이 흘러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되면 그제서야 뒤늦게 깨닫는다. 세상에서 내가 변화시킬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자신밖에 없다는 것을.
철없던 신혼시절, 시어머니께서 당신 따님들은 언짢은 일이 있었더라도 금방 풀어지는데 왜 너는 마음에 담고 있냐고 핀잔을 주신 일이 있었다. 묵묵히 듣고만 있다가 "저는 어머니 딸이 아니잖아요. 저도 친정어머니하고는 마음 편해요" 하고 대꾸를 했더니 어이가 없으신지 피식 웃으시면서 혀를 끌끌 차셨다. 어른 말끝에 말대꾸를 한 나의 미련함은 후회가 되지만 말은 맞는 말이었다는 생각을 한다.
무엇이든 하나하나 논리적으로 짚어가셨던 친정어머니와 정반대로 젊어서 혼자 되신 괄괄한 남자 성격의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면서 내가 터득한 생존을 위한 지혜는 시어머니가 절대로 친정어머니가 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내가 시어머니에게 당신 딸들처럼 그저 편안하기만 한 존재가 되기 어렵듯이. 내가 시어머니에 대해 서운한 마음이 들 때마다 나는 그 생각을 적용하려고 애를 쓴다. "내가 배아파 낳은 딸이 아니듯이 시어머니도 내 어머니가 아닌데 내가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는구나" 라고...
운이 좋아 시어머니가 친정어머니만큼이나 자상하고 살가운 사람들을 볼 때마다 배가 아플 때도 있었다. 같은 친정어머니라도 내 어머니와는 비교가 안될만큼이나 지극정성으로 자식을 대하는 다른 사람의 친정어머니도 보았다. 그럴 때는 또 다른 방법으로 자위를 한다. 우리 시어머니도 어디 가서 다른 며느리 보면서 부러우실 때가 있겠지...우리 엄마도 남의 딸들 보면서 부럽고 서러울 때가 있겠지...
우리는 가족이라는 이름에 큰 환상과 기대를 가지고 사느라고 때로는 더 큰 상처를 받는다. 가족은 늘 나를 사랑해주고 금지옥엽 아껴주어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 아니라 그 바램의 몇 배를 내가 베풀어야 하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이 내 마음 속의 새로운 정의가 되었다. 그러는 와중에 운이 좋으면 가끔씩 무더위에 반가운 소나기처럼 내게 돌아오는 것도 있게 마련이고. 내가 며느리일 때에는 며느리의 완장을 잘 차고 있어야 한다. 친정 나들이에 차고 있었던 딸이라는 완장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벗어버릴 줄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내가 시어머니일 때에는 절대로 친정어머니라고 써있는 완장을 골라 차면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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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동경미 조회수 : 1,009
작성일 : 2004-06-01 11:09:10
IP : 221.147.xxx.68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지나가다..
'04.6.1 1:15 PM (211.218.xxx.230)흐음.......................
많은 생각을 하게 하는 글이군요.
저도 요즘 이 역할?또는 완장?에 대해.................많은 고민과 갈등 중이었는데.............
좋은 글 감사합니다.2. yuni
'04.6.1 1:26 PM (211.204.xxx.212)그 '완장'이란 글 TV에서 오래전에 드라마로 한번 해줘서(조형기씨가 주연)본 기억이나요.
정말 동경미님의 글은 자꾸자꾸 읽고 곱씹어봐도 많은 도움이 되어요.
항상 좋은글 감사합니다. *^^*3. my boy
'04.6.1 1:37 PM (221.146.xxx.249)이거읽으라고 40분 ㅋㅋ
4. 삐삐
'04.6.1 1:45 PM (220.89.xxx.34)그렇군요.
저도 시간이 흘렀지만, '완장'에 대해 자주 생각하곤 하는데, 그런 분들이 또 있으시군요.
많은 도움이 되네요.5. 뽀로로
'04.6.1 3:52 PM (211.211.xxx.2)차라리 서로 자기의 입장을 인정하는게 편하지요. 그러면서 오히려 예의도 지키게 되고, 바라는게 적어지니 조금 해주면 고맙고... 그런거 같아요.
6. 아라레
'04.6.1 6:18 PM (220.118.xxx.226)끄떡끄떡.... 공감가고 좋은 글 항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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