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연인 등려군과 첨밀밀
1995년 5월 등려군(鄧麗君), 즉 Teresa Teng이 태국의 한 호텔에서 주검으로 발견되었을 때 등려군의 고국인 대만 뿐만 아니라 홍콩, 중국, 그리고 전 세계의 화교들은 모두 큰 충격과 비탄에 휩싸여야 했다. 등려군. 그녀의 목소리는 지난 30여년간 모든 중국인들의 감성에 내리는 단비와 같은 존재였고 그녀의 노래는 모든 중국인들의 애창곡 순위 정상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다. 한때 중국본토에서는 중국에는 2등이 있는데 낮 시간은 노등(老鄧), 즉 등소평이 지배하고 밤시간은 소등(小鄧), 즉 등려군이 지배한다는 이야기까지 있었으니 그녀의 인기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녀의 장례는 대만의 국장으로 치러졌고 총통까지 참석하는 성대한 행사였다. 자그마하고 가녀린 몸에 수수한 얼굴의 그녀가 어떻게 그토록 대단한 인기를 누릴 수 있었을까.
등려군은 1953년 대만에서 출생했다. 아버지는 공군장교였고 열렬한 경극팬이었다고 한다. 등려군은 어렸을 때부터 노래에 천부적 소질을 인정받아 14세때 TV에 출연했으며 69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첫 앨범을 발표하면서 가수의 길로 들어선다. 등려군의 타고난 미성은 감성적인 발라드곡에 적격이어서 데뷔와 함께 발라드의 여왕으로 올라섰고 대만 뿐만 아니라 홍콩 등 동남아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으며 74년에는 일본에 진출하여 일본에서도 정상의 자리에 올랐다. 80년대에는 개방의 물결과 함께 중국본토에도 소개되어 대륙에서 가장 환영받는 여가수가 되었고 86년 은퇴할때까지 월량대표아적심(月亮代表我的心), 천언만어(千言萬語), 소성고사(小城故事), 하일군재래 (何日君再來)등 주옥 같은 명곡들을 남겼다. 중국에서는 한때 그녀의 노래가 퇴폐적인 자본주의 문화의 산물이고 사상적으로 불온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하여 공식적으로 엄금하였으나 이미 개방의 물결을 타고 불어닥친 등려군 열풍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등려군의 목소리는 사상과 정치를 넘어서 모든 중국인들을 하나로 묶는 훌륭한 민간 매개체가 되었던 것이다. 은퇴이후 자선공연 이외에 별다른 활동이 없었던 그녀는 뜻하쟎게 42세의 젊은 나이에 타국에서 지병인 천식으로 아까운 일생을 마쳤으니 재인박명(才人薄命)이란 말이 너무나 어울린다 하겠다.
영화 첨밀밀(甛蜜蜜)은 등려군의 히트곡 첨밀밀에서 그 제목을 따 왔다. 이제 막 서로에게 연정을 느끼기 시작한 여명과 장만옥이 자전거를 타고 석양의 침사츄이를 돌던 낭만적인 장면에서 감미롭게 깔리던 노래가 바로 첨밀밀이다. 이 노래는 원래 인도네시아 민요를 등려군이 번안해 부른 것인데 영화 첨밀밀이 인기를 끌자 국내에서도 현대적으로 번안되어 모 방송국의 주말드라마 주제가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첨밀밀은 꿀처럼 달콤하다는 뜻이다. 꿀처럼 달콤한 사랑. 그러나 영화 첨밀밀의 두 주인공 여명과 장만옥의 사랑은 그렇게 꿀처럼 달콤하거나 낭만적이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등려군과 첨밀밀은 이 영화에서 주요한 모티프 구실을 하고 있다. 여명과 장만옥이 처음으로 사랑을 나눈 것은 장만옥이 어렵게 모은 돈으로 등려군 카세트를 파는 노점상을 차렸다가 쫄딱 망하고 난 그날밤이었다. 헤어져서 먼 미국땅으로 건너간 두 사람이 다시 만나게 된 것도 등려군의 사망뉴스와 함께 그녀의 노래가 흘러나오는 한 전파사 앞에 두 사람이 똑같이 멈춰섰기 때문에 가능하였다.
홍콩영화에서 멜로 드라마의 전통은 코미디나 액션물에 밀려 상대적으로 약하다. 첨밀밀의 감독인 진가신(陳可辛)은 ‘금지옥엽’(金枝玉葉)을 통해 90년대 가장 주목받는 멜로드라마 작가로 떠올랐지만 첨밀밀이야말로 그의 역량이 최고조로 발휘된 작품인 것으로 보이며 아마도 그의 영화인생에서 최고의 작품으로 기록되지 않을까 싶다. 첨밀밀은 97년 홍콩영화상 금상장에서 작품상을 수상함으로써 중국반환 이전에 작품상을 차지한 마지막 영화로 남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첨밀밀은 작품상 이외에 감독상, 여우주연상 등 무려 11개 부문에 후보로 올라 9개 부문에서 수상함으로써 홍콩영화상 금상장 역사상 가장 많은 부문에서 수상한 작품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첨밀밀을 보면서 떠올린 것이 80년대의 걸작인 여류감독 장완정의 가을날의 동화(秋天的童話)였다. 가을날의 동화와 첨밀밀은 많은 면에서 닮아 있다. 미국이 배경으로 사용된 점, 여자 주인공은 똑똑하게 자기 앞길을 개척하는 스타일인데 반해 남자 주인공은 조금 순진하고 바보스럽다는 점, 서로 사랑하면서도 헤어졌던 두 사람이 수년 후에 우연히, 아니 필연적으로 다시 만난다는 점 등이 그러하다. 그러나 첨밀밀에는 가을날의 동화가 갖고 있지 않은 코드가 한 가지 더 있는데 그것은 홍콩의 중국반환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 홍콩과 중국과의 관계, 그리고 홍콩인과 중국 본토인과의 관계이다.
여명은 광주와 구룡반도를 잇는 구광철로(九廣鐵路), 즉 KCR (Kowloon Canton Railway)를 이용하여 홍콩으로 건너온다. 홍콩에 오자마자 여명은 영낙없는 촌놈으로 전락하는데 가장 큰 문제는 그가 영어는 말할 것도 없고 광동어를 한마디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여명이 맥도널드 가게에서 만난 장만옥은 이런 여명을 무시하며 이용하려 들지만 사실은 본인도 여명과 같은 날 기차를 타고 홍콩으로 넘어온 본토인이란 것이 영화의 가장 끝장면에서 밝혀진다. 다행히 장만옥은 광동성 광주 출신이라 광동어로 의사소통 하는데 불편이 없었을 뿐이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80년대엔 중국에서 어렵게 넘어온 본토인들이 홍콩인들에게 무시당하고 배척당하는 일이 일반적이었다. 홍콩인들은 자신들도 물론 중국인임에도 불구하고 본토인들이 가난하고 무식하고 더럽다란 선입견과 자신들이 훨씬 더 우월하다는 선민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80년대 홍콩영화엔 이런 중국인을 소재로 한 영화가 꽤 있는데 주인공들은 모두 게으르고 모자라며 홍콩에 적응하지 못하고 갖가지 헤프닝을 벌이는 얼뜨기로 묘사된다. 이들을 가리켜 70년대 한 TV 드라마 주인공의 이름을 따서 흔히 ‘아찬’(阿璨)이라고 불렀는데 첨밀밀에서 여명의 처음 모습은 바로 전형적인 아찬의 이미지와도 상통하는 것이었다. 비록 영화 속 대사에서 여명은 장만옥에게 자기는 아찬이 아니라고 과감하게 주장하지만 말이다. 이런 점을 잘 아는 장만옥은 홍콩에 오자마자 영악하게도 철저한 홍콩인 행세를 한다. 따라서 두 사람이 처음 만난 맥도널드 가게는 서양화한 홍콩을 상징하며 장만옥이 여기서 일자리를 얻은 것은 이러한 홍콩사회에 편입되려는 그녀 나름대로의 계산속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80년대 중반 그들은 어리고 순진한 중국 본토인이었지만 이후 10여년간 그들은 함께 인생을 배우고, 사랑을 배우고 , 무엇보다 홍콩을 배운다. 그들이 그토록 동경하던 홍콩, 그렇지만 그들로서는 겉돌수 밖에 없었던 도시 홍콩. 중국에서는 모두들 홍콩에 가고 싶어 하지만 거꾸로 홍콩사람들은 모두 해외로 이민가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혼란에 빠지는 여명의 모습에서 우리는 반환을 앞둔 시점에서 홍콩의 빛과 그림자를 동시에 보게 된다. 그러나 작가의 기본적 시선은 중국과 홍콩이 궁극적으로 하나이며 융화될 수 있다는 희망을 긍정적으로 포착하는데 있다. 등려군의 노래는 그러한 매개체로서 상징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등려군의 노래를 좋아하는 중국사람들은 원초적으로 모두 같은 감성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아니겠는가.
첨밀밀은 스토리의 짜임새나 원숙의 경지에 이른 배우들의 연기, 과장을 배제하고 감정을 내면으로 승화시키는 감독의 연출 등 어느 면에서나 90년대 홍콩 최고의 멜로드라마로 손색이 없는 작품이지만 이 영화를 특히 빛낸 것은 장만옥의 연기이다. 장만옥은 이미 홍콩 최고의 여배우로 인정받아 왔는데 오랜 공백 끝에 발표한 첨밀밀에서 그녀는 야심차고 강인하며 그러나 내면으론 약하고 쉽게 상처받는 한 여인의 역할을 그야말로 완벽하게 소화해내고 있다. 특히 헤어진지 수년만에 뉴욕의 한 전파사 앞에서 여명과 해후하는 장면에서 보여준 장만옥의 표정연기는 홍콩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었다. 상대적으로 여명의 표정은 뭔가 어색하고 딱딱해서 아직 연기자로선 부족하다는 느낌을 주지만 여명이 이 영화를 통해 그동안 10대의 아이돌 스타로서 보여준 이미지를 극복하고 한 차원 성숙된 점만은 분명한 것 같다.
이 영화를 자세히 뜯어보면 몇 가지 재미있는 요소들이 있다. 우선 여명과 장만옥이 다니는 영어학원의 주정뱅이 바람둥이 영어강사로 나온 인물은 홍콩 최고의 촬영감독 중 하나로 꼽히는 Chris Doyle, 즉 두가풍(杜可風)이다. 이 사람은 왕가위와 콤비를 이루어 모든 왕가위 작품의 촬영을 맡아 많은 영화제에서 숱한 수상기록을 보유하고 있는데 역시 왕가위가 가장 선호하는 여배우인 장만옥의 제안으로 이 영화에 출연하게 되었다 한다. Doyle은 서양인이지만 어느 홍콩인 못지 않은 유창한 광동어를 구사한다. 대만 금마장이나 홍콩 금상장 시상식에서 Doyle이 광동어로 얘기하는 수상소감은 언제나 시상식의 중요한 볼거리이기도 하다. 또 여명이 미국에 건너가서 일하는 중국식당 주인으로 나온 인물은 저명한 중견영화감독 장동조(張同祖)인데 그는 현재 홍콩영화감독 협회 회장이기도 하다. 여명이 중국에 남겨놓고 온 애인 역을 맡은 양공여(楊恭如)는 홍콩의 ATV에서 주최하는 미녀대회 우승자로서 첨밀밀을 통해 성공적으로 은막에 데뷔하였다.
영화 첨밀밀은 등려군 사후 그녀의 목소리에 울고 웃었던 모든 동시대 중국인들을 대표하여 그녀의 영전에 바치는 홍콩 영화인들의 진혼곡이기도 하다. 2001년 5월 등려군 사망 6주기를 맞은 홍콩에서는 등려군이 죽기 직전 홍콩과 파리 등지에서 녹음해 두었던 미발표유작들을 모아서 ‘절창중생’(絶唱重生)이란 제목으로 등려군의 유작앨범을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이 앨범은 나오자 마자 판매순위 1위로 올라서서 등려군에 대한 중국인들의 사랑과 애착이 여전함을 보여주었다. 어느 홍콩신문의 기사제목처럼 사람은 가도 소리는 남는 것인가 보다. 더구나 등려군처럼 사람들의 마음에 빛과 따스함을 전해주었던 그 아름다운 소리라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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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려군과 첨밀밀(펌)
송심맘 조회수 : 938
작성일 : 2004-03-26 11:28:16
IP : 211.203.xxx.9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푸우
'04.3.26 12:21 PM (219.241.xxx.59)첨밀밀 다시 보고 싶네요,,
근데,,등려군의 얼굴은 전형적인 중국인의 얼굴이었던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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