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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칠이

무우꽃 조회수 : 921
작성일 : 2004-03-10 18:44:26
내가 어렸을 적, 어머니를 따라 노량진시장에 가면 꼭 맞닥치는 사람이 있었다.
다들 먹고 살기 바뻤던 시절이었음에도,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시장을 돌아다니며 알 수 없는 말을 계속 중얼거리는 것 뿐이었다. 누구에게 행패를 부리거나 큰 소리를 지르는 것도 아니었고, 그냥, "이승만 박사", "김일성" "북진" 이런 말들이 서너발 반경 안에 들어간 사람에게 간간히 들리는 정도였다.
그가 말을 그치는 것은 먹을 것을 얻을 때다. 과일 리어카 옆에 말 없이 서 있으면 과일장수는 투덜거리면서 일어나 한귀퉁이 썩은 사과를 집어줬고, 목판 우동집의 긴 나무의자에 걸터앉으면 우동이 나왔다. 우동집 아주머니가 "돈 가져왔어?" 하고 물어보는 것도, 그가 주머니를 뒤지는 척 하는 행동도 항상 거기에 그쳤을 뿐, 한번도 돈을 주거나 받은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어머니와 내가 한그릇을 시켜서 나눠먹는 십원짜리 멸치국물 우동을, 우동집 아주머니의 말에 의하면, 그에게는 정신이 말짱해지면 받기로 하고 "외상"으로 판다고 했다.
뿐만 아니었다. 가끔 떡파는 할머니는, 그가 요구하지 않았음에도 "덕칠아 이리와" 하고 불러서는 인절미 몇 개에 고물을 다시 묻혀 그의 더러운 손에 놔주며, 어제는 어디서 잤니?, 아침에는 뭘 먹었니?, 저기 공동수도에 가서 세수하고 손 씻고 와 - 마치 옆집 애한테 먹을 걸 쥐어줄 때처럼 이런 말들을 주절주절 뱉었다.

시장에 있는 천안상회 아주머니와 어머니는 무척 친하셨던지, 우리집이 경기도 광주로 이사했다가 다시 의정부로 이사해서 자리를 잡기까지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어머니는 노량진 부근의 그 많은 친척들을 제껴놓고 천안상회 아주머니를 보고싶어했다. 초등학교 4학년 때던가 5학년 때던가, 어머니와 함께 서울나들이를 하면서 천안상회에 들렀는데, 그 때 내 눈을 놀라게 한 것이 있었다.
사람들이 "떡칠이"라고 불렀던 그 미친사람이 여전히 "이승만"과 "북진"을 중얼거리며 시장을 돌아다니고 있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봐도 재미있는 일은, 어린 내 마음속에, 그 겨울들을 어떻게 났을까 하는 걱정보다는(당시만 해도 겨울이 무척 추웠다), 떡장수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누구에게 떡을 얻어먹었을까 하는 것이 더 궁금했다는 것이다.

그후로 또 몇 년이 흘렀고, 나는 고등학생이 되었다. 우연히 찾아간 의정부 시장의 목판 우동에 끌려, 시장 드나드는 재미를 맛보게 되었는데 ...
하하 세상에 이럴 수가. 거기에도 덕칠이가 있었다.
비록 모습이 다르고 중얼거리는 대사는 달랐지만, 그건 분명 덕칠이었다.
그리고 다시 그 나이의 곱이 되서 내가 출판사를 하던 십몇년 전에도 심심치 않게 덕칠이를 봤다. 동대구역 옆 시장에서는 경상도 사투리를 하는 덕칠이를, 광주 양동시장에서는 전라도 말을 하는 덕칠이를 ....

하지만 이제 어느 시장에도 덕칠이는 없다.
덕칠이가 죽은 것인지, 아니면 사람들이 덕칠이의 존재를 귀찮게 여겨 어디 딴데로 갔는지 나는 모른다. 분명한 것은 어느 시장에서나 볼 수 있었던 덕칠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
사라진 것은 과연 덕칠이 뿐일까?
그를 먹여주고 받아줌으로서 존재할 수 있었던 풍경도 그와 함께 사라졌고, 그 여유있는 풍경을 볼 수 없는 우리의 마음 속에서도 덕칠이가 있던 공간이 사라졌다. 남은 것은 가물거리는 기억이요 과거에 대한 향수일 뿐이다.
이제 나는 안다. 사람들이 덕칠이를 먹여준 것이 아니라 덕칠이가 사람들을 지켜줬다는 것을.
어느날 갑자기 미치고 싶어질 때, 너무도 답답한 현실에 미친 척이라도 해야 살 것 같을 때, 그것이 받아들여질 공간이 없다는 것을 알고서는 아파트 빈방에 쭈그리고 앉아 흐느끼며 절규하리란 것을.

혹자는 덕칠이가 죽었다고 하고 혹자는 어디로 갔다고 한다. 하지만 사실은 우리가 그를 잃어버린 것이다.
잃어버렸다는 사실마저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 덕칠이와, 덕칠이를 기억하시는 분들에게
IP : 210.118.xxx.196
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키세스
    '04.3.10 7:03 PM (211.176.xxx.151)

    저 펑펑 울고있어요.
    세상 사는게 너무 아프네요.
    왜 이래야 하는지

  • 2. 방우리
    '04.3.10 8:30 PM (211.207.xxx.116)

    휴........ㅠㅠ

  • 3. 아임오케이
    '04.3.10 9:26 PM (220.120.xxx.51)

    그래요.
    우리 어린 시절에는 동네마다 시장마다 그런 덕칠이가 있었지요.
    동네 아이들의 놀림도 가끔씩 받으면서...
    정말 그사람들 다 어디로 갔을까요.

  • 4. 아라레
    '04.3.10 9:44 PM (210.221.xxx.250)

    내가 덕칠이가 될 수도 있는건데...
    다들 좀더 여유를 베풀었으면....

    (분위기 바꿔서) 무우꽃님, 이번 모임에 안나오시나요?
    "남자가 요리한 음식 한 번 먹어보는게 소원"인 분들 많으실 것 같은데요. 물론 저도...ㅎㅎㅎ

  • 5. 무우꽃
    '04.3.10 10:04 PM (210.118.xxx.196)

    글에 다른 의미를 더하지 말고 읽어주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요즘, 시장을 종일 돌아다니고, 돌아와서는 정리하느라 몸이 파김치입니다.
    당분간 글도 올리기 힘들 것 같습니다.
    모임에는 안나갈 생각입니다. 사이버 공간과는 달리, 여자들 틈에 혼자(가 되겠죠?) 낀다는 게 저로서는 어색하네요.
    가끔 시장 사진을 올리는 걸로 생존을 알리겠습니다.

  • 6. 솜사탕
    '04.3.10 11:53 PM (68.163.xxx.247)

    무우꽃님.. 건강 상하시지 마시고...
    꼭 잘 챙기세요.

  • 7. 미씨
    '04.3.11 9:51 AM (203.234.xxx.253)

    요즘 왜 글이 없나,, 그찮아도,, 궁금했었는데,,
    바쁘셨군요,,,,
    시장사진,,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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