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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참한 요리

무우꽃 조회수 : 1,668
작성일 : 2004-02-28 20:54:54
재수가 없는 놈은 뒤로 자빠져도 코가 깨진다고 했던가, 내가 마지막 자금 500으로 서초동의 허름한 오피스텔을 얻은 것은, 불행하게도 IMF 사태가 발표되기 몇달 전이었다.

프로그램을 설계부터 제안서 작업까지 혼자서 들고날친지라 몸은 파김치가 됐다.  옆 사무실에 있는 젊은 친구한테 시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더니, 시장은 없고 양재쪽에 진로도매센타가 있단다.

장을 한 짐 봐와서 음식을 했다.  고기볶음에 찌게며 잡채 ... 그건 마치, 그동안 못먹었던 음식을 해먹으려는 게 아니라, 그동안 미뤄왔던, 요리에 대한 복수를 하는 것이었다.

한참 부산을 떨고, 마지막으로, 찌게를 끓이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혼자서 이걸 다 먹겠다는 것이냐.  내가 지금 왜 이 지라ㄹ이냐.
그렇다.  허전함이었다.

진로도매센타가 아니라 수유리 시장이었으면 생선 한마리만 사오면 될 것이었다.
시장 아주머니들의 고함을 들었으면 생선 한마리로도 나의 저녁은 풍성했겠지만, 그 많은 물건이 쌓여있는 할인점에서 물건을 한 짐 사오고서도 허전했던 것이다.
아니다 문제는 진로도매센타에 있었던 게 아니다.  내 속이 비었던 거다.  아니다 비어있는 것이 아니라 까만 어둠이 채워져 있었던 거다.

덜 끓은 찌게 냄비를 내려놨다.  만들어 놓은 음식도 모두 냉장고에 넣었다.
작은 냄비에 물을 붓고 라면 하나를 끓였다.
라면은 언제 먹어도 라면이다.  이건 먹는 게 아니라 떼우는거다.
수유리로 갈거다.  수유시장에 가서 휘휘 한바퀴 둘러보고 나서, 밤새 돼지머리를 고아낸 국물로 만든 순대국을 먹을테다.
먹고 난 냄비도 치우지 않고 나는 수유리행 버스를 탔다.

허전해서 요리를 한다더니, 허전함을 채우기 위해 음식을 먹는다고 하더니, 그게 정말이었구나.
하지만 다시는 그러지 않으리라.  나는 결코 그렇게 되지 않으리라.
나를 위로하는 눈물이 흘렀다.  다행히 고개를 돌린 차창밖은 어두웠다.

- 비참한 요리, 외로운 식사를 했던 분들과 함께하면서
IP : 210.118.xxx.196
8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솜사탕
    '04.2.28 11:31 PM (68.163.xxx.174)

    읽으면서.. 저도 그 느낌을 알기에.. 참 많이 동감했습니다.
    근데, 마지막에.. ㅎㅎ .. 저와 함께 하는 글이네요.

    네.. 허전하기에... 요리를 하고..
    스트레스를 받아서 풀기위해서 요리를 했지요. 그렇게 만들면 혼자서 못먹으니까...
    주위사람들에게 나눠주기도 했고...
    전 압니다. 제가 나눴던 많은 음식들은 순수하게 그들을 위한것이 아닌,
    제 자신을 위한것이 많았다는 것을요.
    그래서 칭찬받는것이 기쁘지 않고.. 오히려 챙피할뿐이랍니다.

  • 2. 김새봄
    '04.2.28 11:34 PM (218.237.xxx.29)

    두분의 글에 동감...

  • 3. 아라레
    '04.2.29 12:02 AM (210.221.xxx.250)

    러시아 어느 여성 혁명가가(이름은 기억 안나요. 워낙 러시아 이름 길고 복잡하잖아요.)
    맘이 울적하고 일이 안될때마다 동지들을 위해 요리를 했다고 합니다.
    오래 오래 뭉근히 끓이고 계속 저어주는 스튜종류로요.
    요리를 하고 나면 맘이 가라앉고 그 음식을 동지들과 나눠먹고 새로운 의욕을 가졌다는데

    저는 화가 나거나 맘이 울적하면 요리를 못하겠어요.
    요리할 의욕조차, 기운조차 없는거죠. 주부가 돼서 그러면 안돼는데
    이불 둘러쓰고 누워있으면 알아서 챙겨먹고 나갑니다...

  • 4. technikart
    '04.2.29 12:42 AM (80.15.xxx.224)

    어 내 애기잖아 했습니다. 실컷 만들구 나서 뒤통수 치는 허전함이요.이걸 누가 먹는다구 이랬나 부터 혼자 차려 놓구 드는 청승스런 기분들..

    근데 시간이 지나니깐 면역이 되었던지 전 이제는 요리는 죄다 이론이랑 머리로 해보구요 상상 속에서요
    실제로는 시리얼에 과일 몽창 넣구 호도 같은거 왕창 넣어서 영양식이다 하고 먹어요
    글구 일주일에 며칠은 아침에 일어나서 고기 막 구워서 왕창 먹구요, 뭐 고기라 해봣자 고기에 샐러드가 다지만 전 이거 해먹는날은 전날 넘 두근거려서 자면서두 고기고기 하구요 아침에 고기 먹다가 학교 지각두 불사해요. 늦게 가는날은 학교 애들이 너 오늘도 요리한다고 늦게 왔지? 할정도 ㅎㅎㅎ

    제가 다요트 이후로 저녁을 시리얼이나 과일로 대충 일찍 먹어 버려서
    아침에 저 고기 마저도 안먹으면 ........원래 고기를 엄청 밝힘

    근데요 무우꽃님 요즘에는 자신을 위한 요리를 하는걸 배워야 겠단 생각을 많이 한답니다.
    어렵지만 나를 위해서 대충 챙겨 먹지 않고 귀찮지 않으면서도 나를 위해서 요리를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많이 해요. 저는 혼자 오래 살아서 고양이 두마리 키우는데 굉장히 의지 하거든요. 고양이들 보면서 불끈 주먹쥐고 재들 사료값을 벌고 병원비를 벌라면 힘내야지 할때가 많어요.

    무우꽃님도 화이팅!

    ps위에 아라레님 그 러시아 혁명가 자수리치아녀여? 그 애기 전여옥님 책에서 본 이야긴데 저도 그 애기 읽으면서 공감들었었거든요 .

  • 5. peacemaker
    '04.2.29 11:50 AM (220.78.xxx.107)

    허전함....
    맞다....

  • 6. 안양댁^^..
    '04.2.29 3:11 PM (211.201.xxx.114)

    수유시장 함가봐야지..................음 근데...
    전철역 어디서 내리나요?...요기는 안양 이거듣요..........

  • 7. 무우꽃
    '04.2.29 5:54 PM (210.118.xxx.196)

    안양에도 재래시장 있을텐데, 그냥 거기 자주 가세요.

  • 8. 아임오케이
    '04.3.1 3:24 AM (220.120.xxx.51)

    맞아요, 재래시장 한바퀴 돌고나면 웬지 기운이 날때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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