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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사회.

입으로만 조회수 : 106
작성일 : 2011-05-19 15:39:34
#장면 1.

창업을 준비 중인 권모 씨(28)는 병역비리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커피믹스가 떠오른다. 의무경찰로 복무하던 2004년 어느 날 커피 심부름을 하던 후배가 1회용 커피가 가득 쌓인 탁자 옆에서 “커피가 없다”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갓 전입해온 후배 의경은 그동안 고급 원두커피만 마셨을 뿐 1회용 커피믹스는 타본 적이 없다는 걸 그때 알았다.

그가 배치된 곳은 근무가 편했다. 그곳에는 현직 장관과 판사, 경찰 고위직, 대학총장, 이름만 대도 아는 유명 기업가를 아버지로 둔 의경이 유독 많았다. 다른 곳에서 1년 근무한 뒤 배치된다는 규정도 안 지킨 채 전입한 ‘규정 밖 배치’도 많았다.

권 씨는 “새로운 후배 의경이 들어올 때마다 ‘너는 어느 분의 자제님이냐’고 물었을 정도”라고 말했다. 그는 군 면제 병역비리는 줄었을지 모르지만 보직 청탁은 줄어들지 않았다고 믿고 있다. ‘공정사회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는 “한마디로 웃긴다”고 말했다.

#장면 2.

50대 택시운전사 제모 씨는 공정사회에 대한 기대가 거의 없다. 한국 사회의 ‘높은 분들’이 공정하지 못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다. 그는 “30년 운전을 한 나는 정치인이나 고위인사를 많이 모셔봤다. 그분들이 뒷좌석에 앉아 전화로 하는 대화 내용을 듣다 보면 내겐 희망이 생길 수 없다. 좋은 제도를 아무리 만들어도 그분들의 마음가짐이 여전하다면 큰 기대가 없다”고 말했다.
동아일보가 만난 보통사람 10여 명은 대체로 ‘공정한 사회’라는 화두에 시큰둥했다. “기대는 해본다”는 말도 없진 않았지만 소수에 그쳤다. 이명박 대통령이 1주에 한 번꼴로 공정사회 실현을 다짐하고 국무총리실이 80대 공정사회 추진과제까지 선정해 발표했지만 민심은 여전하다. 정치인과 고위공직자, 대기업 경영인과 관련한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늘 “이런 게 공정사회입니까”라는 반문이 나올 뿐이다.

○ “출발점이 과연 같을까?”

이명박 정부가 생각하는 공정한 사회는 결과의 평등이 아니다. 동일한 기회가 주어진다면 공정한 경쟁을 거치게 하고 결과를 각자 받아들여야 한다는 기회의 평등을 말한다.

하지만 정부기구에서 일하는 최모 씨(41·여)는 자녀교육 문제만 떠올리면 ‘과연 주어진 기회가 같을까’라는 의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는 한국의 공교육에 큰 기대를 걸지 않지만 초등학교 5학년, 3학년인 두 자녀를 학원에 보내지 않는다. 매달 150만 원에 이르는 학원비 때문이다.

“주변에서는 엄청 학원공부 시켜대죠. 애들한테 아무것도 안 시킨다니까 주변에서 무식한 엄마 취급을 하더라고요. 유치원에서부터 시작되는 교육격차가 갈수록 벌어지는 것 같아요. 빈부격차의 불이익은 결국 애들이 보는 거죠. 요즘은 옛날처럼 조금만 노력해도 기본은 할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니니까.”

선생님에게 촌지를 안 주면 관심의 대상에서 멀어질 것 같다는 생각도 그를 괴롭히는 고민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그는 ‘백화점 상품권 석 장은 기본’이라는 얘기를 듣고 최근 스승의 날에도 아이들 선생님 만날 생각을 아예 포기했다.

그래도 최 씨는 아이들이 중학교에 올라가면 과외를 시키거나 학원을 보낼 생각이다. 그는 “대출을 받고 무리를 해서라도 자녀 뒷바라지를 하는 것이 최소한 부모의 도리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 “하루아침에 바뀌겠어?”

시민들은 학벌과 인맥, 혈연을 중시해온 한국 사회의 뿌리 깊은 관행의 벽을 체감하고 있었다. 권 씨는 “통치자 한 사람이 공정사회를 부르짖는다고 몇십 년간 쌓여온 문제점들이 하루아침에 없어질 거라고는 기대 안 한다”고 말했다.

전문대에서 디자인을 전공한 뒤 옷가게 창업을 준비하는 윤모 씨(29·여)는 “취업을 선택한 동창들이 학력이 낮고 여성이라서 무시당한다며 힘들어하는 것을 자주 본다”면서 “이래서야 뭐가 달라질 수 있을지…”라고 말했다. 청년실업자인 남동생과 홀어머니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윤 씨는 사업이 실패할까 두렵지만 직장 다니는 친구들을 보면서 ‘차라리 창업하는 게 낫다’는 생각을 굳혔다.

인천의 중소기업에서 영업 업무를 하는 김모 씨(44)는 관공서 출입이 잦다. 그래서 그는 공무원을 만날 때 학연 지연을 활용한 ‘전화 한 통’의 힘을 잘 안다. 그는 “사회구조가 하루아침에 달라질 수는 없다.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다 똑같다”고 말했다.

A정당에서 오랜 기간 일해온 한 당직자의 생각도 같았다. 이 당직자는 “정치인들을 옆에서 지켜보며 한국 사회에서 누군가를 안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수없이 체감했다”면서 “정치권에서 정책을 고민해온 나로서도 이 사회가 공정해지기는 정말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고 털어놨다.

○ “미래엔 바뀔 수 있을까?”

서울 종로에서 두 평 남짓한 구멍가게를 30년 넘게 운영하는 60대 할머니에게 ‘대통령이 세상을 더 공정하게 만들겠다고 약속한 말을 들어봤느냐’고 물었다. “나도 귀는 뚫렸으니 듣기는 했지. 하지만 말로 하면 뭐하나. 실제로 해야지. 그런데 실제로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나는 못 느끼겠어.”

‘정부가 뭘 바꿔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는 “그런 거는 모른다. 하지만 우리 같은 서민들 먹고사는 게 좀 나아지면 좋겠다는 것뿐이다”라고 말했다. 다만 이 할머니도 실낱같은 기대를 갖고 있었다. “쉽게는 안 될 거야. 그래도 딱 한 번은 정부건 대통령이건 믿어보고 싶어. 하지만 (대통령 임기) 5년은 후딱 가버리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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