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만 팬션에서 2박하고 오전 낙안읍성 가려든 차 돌발사태 발생.
포기하고 선암사로 향합니다.
지갑을 잃어버렸다는. 모닝 커피 마시던 커피숍.
한참 후에 알았는데 아르바이트 여학생이 주워 보관하고 있더라는.
한사코 거부하지만 과일이라도 사가라고 사례금 전하고 서둘러 순천시로.
순천대 정문앞서 1번(순천역 출발 ~버스터미날~선암사 종점으로 50분마다)을 탑니다.
뒤돌아보니 영화에서나 봤던 장면이 뙇~~
순천서 5일장 보고가는 할머니 할아버지들이네요.
한쪽은 할매,다른 쪽은 할배들로 ,,,그러나 시선은 서로를 향하고.
내내 왁자지껄 웃음꽃을 피우네요.
이분들에 5일장은 5일에 한번하는 외출이요,소풍같은 거.
창밖을 찍는듯 페인팅 모션 취하고 살짝.
높지는 않치만 능선이 첩첩히 겹치며 만들어내는 깊은 산골~~
버스는 계곡과 허리길을 구비구비 지나네요.
틈틈히 모퉁이를 돌때면 10여채 소규모 산골 마을들이 나타나고.
계곡 변 작은 평지엔 때늦은 백일홍들이 장관을 이루고,,,팔기 위한 묘목이라는.
경남,전남 지방에서 시목(市木)이나 군목(郡木) 중 많은 게 백일홍.가로수도 그렇고.
신기한 게 하나 있어요.
하차문에 나와있지도 않는데도 버스는 자동으로 서고 그때마다 사람들이 일어서 내린다는.
버스기사는 할머니,할아버지가 어느 마을에 사시는 지를 알고 있는거죠.
50분 만에 선암사 주차장 도착~~
옛스런 왼쪽 매표소 건물 보이시나요?
길은 한 사람이 지나고 난뒤 뒷사람이 따르면서 드러나는 자취~~
그래서 길엔 삶이,역사가,도덕이 깃들며 땅과 사람이 함께 흘러가는.
자 여기부턴 저 흙길을 두발로 꾸욱~꾸욱~ 누르면 올라가보죠.
글렌 굴드의 골드베르크변주곡(1981년)를 반주 삼아서요.
http://www.youtube.com/watch?v=N2YMSt3yfko
일주문 까지 1.5키로 진입로는 산사의 맛배기같은 것.
집입로가 인공의 흔적이 적으면 확실히 절집도 그렇습니다.
불가피한 중창불사라 할지라도 자연친화적이고.
보통 진입로 분위기는 지형이나 식생 영향을 받기 마련인데 선암사 길은 전형적인 우리내 뒷산 그런.
석주(石柱) 둘~~
조계산 섬암사라,,,뒤쪽에는 이곳이 선불교 요람임을 알리는 선게송이 새겨져 있습니다.
뒤로 승밭(부도밭:고승 사리를 모신곳 곧 무덤)이 보이니 지척이 일주문임을 알겠고.
승탑밭~~
뒤쪽은 승탑이, 앞쪽은 승탑 주인공들의 행장을 적은 비석들.
선암사엔 외에도 조선시대 승탑밭이 한군데 더.
또한 대각국사 의천으로 추정되는(사찰측 주장)대각암 승탑 등 고려시대 승탑 3기가 따로 사찰 위쪽에.
저 목장승이 꽤 유명하죠.
1920년 진품은 경내에 옮겨 놓았고 저건 이미테이션.
특이하게도 남녀가 아니라 둘다 수염이 달린 남성.
진품의 경우 재질이 밤나무라네요.
위패도 밤나무로 만들죠(조선조 왕실에선 율목지소를 지정해 금표를)
싹이 나온 뒤에도 밤껍질이 오랫동안 썩지 않고 남아 있어 조상을 잊어버리지 않는 나무로 여겼기에.
무지개 다리 2개 중 첫번째~~
다리 건너는 길은 옛길,우측 직진은 새길인데 모통 사람들은 눈은 돌다리를 향하지만 사람다리는 관성으로 직진하고말죠.
꼭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옛길을 걸어야.
자연 암반 위에 천연덕스럽게~~
다리 위에 서면 1백여미터 앞으로 또다른 무지개다리가 보입니다.
승선교(昇仙橋)~~~~~
무지개 반원 사이로 보이는 누각은 강선루(降仙樓)
물이 많을 때면 무지개 다리 반원과 물속에 비친 반원이 쌍을 이뤄 완전한 원을 그린다는.
신선,선녀가 오르고 내리는 곳이라니 그땐 볼만했겠어요.
숙종 호암대사 약휴가 선암사를 대중창불사할 때 지었다는.
호암대사는 현 선암사 기본 형태를 구현한 인물로 당호도 '선암사를 보호한다'는 뜻의 '護巖'.
벌교 홍교도 선암사 스님들에 의해.
강선루를 저리 반원 속에 넣으려면 계곡 밑으로 내려가야.
가운데 쐐기는 용머리 형상을~~
이는 풍수적으로 해석하면 될거구.
승선교 위를 꾹꾹 밟고 건너면 원 진입로가~~
사실 지금 걷는 이 길은 최근 넓혀진 것.
90년대 초만 해도 작은 승용차나 우마차 정도 지나는 오솔길.
육당 최남선은 1925년 이곳 선암사를 떠나며 이 좋은 길이 곧 넓혀진다는 소식에 한걱정했다죠.
/나쁜 길은 넓을수록 좋고,좋은 길은 좁을수록 좋다./
건축가 김수근 의 말입니다
승선교를 건너니 강선루가~~
교각 하나는 계곡에 발을 담궜고~~
누대는 계곡 지류 위에.
그러니 누각에 눞는 자는 계곡을 베게삼는 거나 진배없고,,,이름하여 침계루.
지류 위로 다리를 놓아 흙길을 만들었다는.
우측 길은 최근에 놓인 확장 도로로 원래는 저 누각 아래가 본래의 길이죠.
일주문 이전에 이런 이런 누각을 세운 건 드문데 왜???
선암사엔 신선,선녀를 뜻하는 '仙'이 유난이 많은데서 힌트를.
승선루,강선루에 선암사 이름에도 仙이,,,, 선암사의 禪 전통에 도교적 영향 아닐런지.
참 멋스러운게 계곡과 지류가 만나는 지류 위에 누각을 세웠다는.
저 등산객들은 조계산 서쪽 사면에 있는 송광사에서 5시간 걸려 굴목재 너머 왔다네요.
그길은 육당 최남선이 1925년 넘어왔던 길이기도.
일주문 입구 삼인당(三印塘)~~
연못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며 제행무상 제법무상 열반적정 3법을 새긴다는 뜻.
수구를 통해 경내 모든 물들은 이곳 삼인당으로 들어오고~~
가운데 나무는 배롱나무~~
배롱나무 꽃과 어울어지면 더 멋지겠어요(겹치는 시기는 보름여겠지만)
가녀린 몸매에 참나리처럼 징그런 에일리언의 길다란 촉수들,,,그것도 붉디붉은.
왠지 가까이 하기 주저한 상사화입니다.
허나 원경으로 수련과 수선화의 푸르름과 어울어지니 멋지네요.
장소성이란게 이리 참 중요해요.
(***아~~알았네요.내가 환증후군이 심하나봅니다)
이제 본격적인 사찰 영역~~
길이 휘어진 끝에 일주문이.
여기까진 느릿느릿 입맛 돋구는 에피타이져.
우측은 야생차,소나무,전나무가 사시사철 푸르고~~
하마비~~
일주문은 우측으로 숨었고 만세루가 먼저 반기네요.
만세루는 사대부중들의 야외 회합공간.
조계산 선암사 일주문~~~
선암사는 조계산 동쪽,서쪽엔 송광사가 있구요.
사실 전통,권위,유 적 모든 측면에선 송광사가 월등한데 힐링이라는 시대성이 선암사를 더 돋보이게 한다는.
공포등이 화려하죠.특이하게 담을 둘렀고.
정유재란을 견디어 낸 경내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물.(타 전각들은 정유재란 때 거의 전소)
앞 계단 해태상의 소맷돌도 당시 작품.
일주문 뒷 현판엔 고청량사 해천사(古淸凉山 海泉寺)라는 현판이.
옛날에는 청량산 해천사였다는 얘기네요.
화재가 빈번하자 풍수적 해결로 1)조계산 선암사에서 청량사 해천사로 바꾸기도.
외에도 2)경내에 쌍지,방지,삼인당 등 많은 연못을 조성했고
3)대웅전 앞 설선당 환기구에는 海.水를 조각해 넣었으며
4)아예 석등조차 없다는.
태고총림 조계산 선암사~~
뒤로 육조고사라는 현판도 보이네요.
두 현판은 선암사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주죠.
조계종 와 더불어 태고종은 불교 2대 종단,,,이어 천태종이 있는데 천태종은 단양 구인사가 총본산.
(서울의 대표적인 태고종 사찰은 신촌 봉원사)
태고종 하면 대처승 이미지인데 실은 비구승도 1/3이 넘는다죠.
그러나 사실 조계종과 태고종은 큰 차이가 없다는.
주 경전도 금강경과 화염경으로 같고, 고려말 임제종의 전통을 이어받은 선불교 그렇고,
심지여 종조도 고려말 보우선사라는 교집합이.
다만 조계종은 통일신라 말 최초로 선불교를 가져와 전파한 도의선사(설악산 진전사에서)를 종조로 하고,
고려때 송광사서 정혜쌍수로 불교 정화에 나선 보조국사 지눌을 중창조,그리고 고려말 보우선사를 중흥조로한다는.
태고종은 보우선사를 종조로,,,태고는 바로 보우의 시호라는.
해방 후 이승만의 "대처승은 절을 떠나라!"는 법란 이후 비구승 중심으로 조계종이라는 새로운 종파를 만들었고.
사실 조계종,태고종 탄생이란게 고려,조선조를 이어오는 불교 전통에 기반하기 보다는
해방후 혼란스런 정치사회적인 환경에 대한 즉흥적인 대처의 산물이라는.
(교리 해석 차이라든가 하는 그런게 아니라)
현재 선암사는 두 종파가 소유권 분쟁으로 30년 째 재판에 계류중.
재판중이라 순천시가 수십년 째 관리하다보니 중창불사를 피했고.
이게 지금의 고풍스런 선암사 모습을 유지하게 한 가장 큰 이유.
六朝古寺라~~
일주문 지나 범종각에 걸린 현판입니다.
달마가 禪사상을 연 이후 여섯번째 종조인 혜능이 남종선을 정립했는데 이때 신라말 유학승이 남종선을 신라로.
육조고사란 육조 혜능의 선사상을 이어받는 사찰이라는 뜻.
이런 면면한 선암사 전통 때문인지 일제가 일본불교와 조선불교를 통합 원종(圓宗)을 세우자 경상,전라 스님들을 중심으로
1911년 송광사에 모여 조계종을 출범하고 초대 종정으로 이곳 선암사 방장을 추대했다는.
글씨 는 구운몽,사씨남정기를 쓴 서포 김만중의 아버지 작품.
서포는 순천서 지척인 남해도에 유배됬었죠.
이상쵸?? 朝가아니라 祖가 맞을 터,,,,가끔 해학이나 강조 의미로 비슷한 의미의 한자를 바꿔쓰기도 했습니다.
일주문~범종각~만세루 지나니 대웅전이~~
3층석탑은 신라말 작품,,,몸돌의 체감비율이 급격히 떨어져 경박감이 있긴해도 1천년 이상을 버틴 범작입니다.
있어야할 석등은 안보이고 그 자리에 괘불지주가 있네요.
절집 입구에는 국기봉처럼 당간을 세우고 끝에 당(幢)을 걸어 '여기가 사찰이요!' 하고 속세에 알리는 당간지주가 있듯
대웅전 앞 마당에는 야단법석을 차릴 때 탱화(불화)를 걸수있는 괘불지주가 있곤하죠.
선암사는 1백여점이나 되는 불화로도 유명합니다.
정면 3칸,측면 3칸의 작은 전각이지만 대웅전 내부는 조형미 넘치고 화려합니다.
대웅전 천장 대들보 위로 용 네마리가 긴 몸둥이에 여의주를 물고있는 모습이 리얼하고
조각가의 정성이 보이네요.
가운데 괘불지주~~
대웅전 우측을 봐도~~~
좌측을 봐도~~
전각들이 연이어져 선암사 절집의 깊이를 느끼게하죠.
대웅전 측면,,,뒤는 팔상전,원통전 영역~~
대웅전 우측 앞 심검당~~
절집이 왜 이러지?무슨 오래된 고택 곳간같지 않나요.
스님들의 거처 공간으로 'ㅁ'형태를 지녀 가운데 마당이 있습니다.
맞은편 설설당 건물도 중층에 가운데에 마당이.
설선당~~
정면서 보면 단층 같아도 담넘어 살피면 이리 복층 구조
왼쪽 뒤쪽이 대웅전. 우측 끝이 심검당.
대웅전 뒤 늘푸른 넓은잎나무 팔손이~~
외에도 동백,호랑가시나무,차나무,은목서 등 잎넓은 상록수가 많다는.
영락없이 1박하고 가면 좋을 것같은 민속마을.
불조전 전각 아래서 흘러나오는 감로수~~
佛祖展이니 선암사를 거쳐 간 고승들을 모시는 곳이겠죠.
선암사 개창조 도선국사,중흥조 고려초 대각국사 의천
그리고 현 선암사의 기본틀을 만든 조선 숙종 호암대사 등 영정이 모셔져있고.
그러면 선암사는 언제적 태어났을까?
사적기에 의하면 875년 도선(道詵)이 남방비보(南方裨補)를 위해 경남 진주 영봉산의 용암사(龍巖寺),
전남 광양 백계산의 운암사(雲巖寺)와 함께 선암사를 창건했다네요.
1092년에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크게 중창했으나 임진왜란 때 모두 소실되었고.
1698년(숙종)에는 호암 약휴(若休)선사가 승선교,원통전 등을 짓는등 현재의 그림이.
이후 여순사건과 한국전 때 많은 전각이 탔고,
오르자 전각들의 또 나타나네요.
채색,단청이라곤 찾을 길 없고. 선암사는 이리 30여 전각들이 자연스럽게.
9월말,,,배롱나무는 마지막 청춘을 불사르고.
우측 건물이요?
곳간이 사찰 중앙에 뙇~~~
카메라를 어디다 들이대도 한폭의 그림이 되고~~
이런 다양한 그림들은 만들어주는 곳은 선암사가 최고.
선암사 가장 큰 특징~~
절집인지 화원인지.... 전각 마다 화단이 잘 가꾸어져 있어 사시사철 꽃마을을 이룬다는.
상사화(相思花)~~
우리말로 꽃무릇,,,봄에 잎이 나고 늦여름이면 잎이 진 후에야 꽃들이.
다시 꽃이 지면 파란 이파리가 나오고. 이리 둘은 만나지 못한 운명이라 상사화.
야생에서 군락을 이루면 뭔가 저어한데 화단서 인공이 가미되니 느낌이 괜찮네요.
단청 대신 각종 화초와 나무들이 전각에 옷을 입히고~~
팔상전~~
八像展으로 안엔 팔상도가 있고.
팔상도란 석가의 일대기를 여덟 파트로 나뉘어 한 캠퍼스에 형상화한 것.
저 왕벗나무가 꽃피운면 이또한 장관~~
저 길을 따라오르면 천연기념물 홍매화 백매화가 있는 각황전,무우전이~~
각황전 영역~~
독립된 영역으로 돌담을 둘렀습니다.
돌담 안엔 도선이 주조했다고 전해지는 철불이 모셔져있는 각황전과 스님들의 거쳐 무우전이 있습니다.
무우전 툇마루에 앉아 있노라면 조계산 산등성들이 포근히 다가온다는데 그래서 無憂展인가...
나야 출입불가라 알 길없고.
최남선도 툇마루에 앉아 한 상념 빠졌죠.
무우전 돌담 따라 수백년된 매화들이~~
저 돌담 매화 중 홍매 두 그루는 5백살 먹은 천연기념물입니다. 원통전 뒤쪽 6백살 백매화도.
1925년 어느 봄날 최남선이 저 무우전에 묶었는데 당시가 글로 남아 있습니다.
1925년 봄 육당 최남선(1890∼1957)은 요즘말로 '남도 문화유산 답사'에 나섰습니다
50여 일간 조선왕조의 발상지 전주에서 시작해 호남 일대를.
금산사 내장사 내소사 선운사 백양사 증심사 송광사 선암사 화엄사 등 오래된 절집에다
모악산 내장산 백암산 선운산 변산 무등산 지리산을.
육당의 길동무는 석전 박한영 스님(1870∼1948)으로 박한영은 해방 후 조계종 초대종정을 지낸 분.
육당은 송광사를 출발 5시간 걸려 굴목재를 너머 어둠이 깔릴 즈음 선암사에 도착했습니다.
피곤한 육당은 곧바로 무우전에 곯아 떨어졌고 아침에야 일어났고.
다음은 심춘순례에 실린 육당의 그 아침날의 소회~~
//이럭저럭 ‘굴묵이’ 넘어온 피곤을 잊어버리고, 무엇인지 코가 에어져나가는 듯한 향기를 맡으면서
청량한 꿈을 찾아들었다. 이튿날, 일뜨며 창을 밀치니 맑고도 진한 향기가 와짝 들이밀어 코로부터 온몸,
온 방안을 둘러싸버린다.
새빨간 꽃을 퍼다 부은 춘매(春梅)가 바로 지대(地臺) 밑에 있는 것을 몰랐었다. (…) 이러한 미인이
창전(窓前)에 대령한 줄을 모르고 아무 맛 없이 곱송그려 새우잠을 자고 났거니 하매,
아침나절에 입맛이 쩍쩍 다시어진다//
그럼 육당이 묵은 당시 선암사는 어떤 모습이였을까요??
아래 1920년 사진하고 정확히 일치하겠네요.
1920년 선암사 모습~~
전각의 수나 위치가 지금과 거의 비슷합니다.
여순사건에 한국전을 거치면서 많이 불탔기에 상당수는 한국전 이후 건물.
좌측 산속으로 대각암,우측으로 은수암이 보이고.
왼쪽 가장 앞으로 해우소도 보이고. 육당이 묶었던 무우전은 우측 뒤쪽 끝.
무우전 뒤로 석조물 두기가 보이는데 이는 선암사 중수비와 사적비.
대각암은 고려 문종의 4째 아들 대각국사 의천이 선암사를 중창하면서 머물렀기에 대각암.
원통전에서 바라본 각황전,무우전 영역~~
칠전선원 앞 고샅~~
솟을대문같은,,,,별게 다 있네요.
정확히는 솟을대문은 아닐거구,,,뭘까나??
솟을대문을 통과하니~
전각들 사이 마다 연못이 ~
무우전 맞은편 칠전선원 영역~~
칠전선원은 선수행 역사가 깊다네요.
묘향산 보현선원, 금강산 마하연 선원, 지리산 칠불암 칠불선원과 함께 조선시대 4대 선원이였다는.
응진전,비로전 등 여러 전각을 돌담으로 쌓은 독립영역으로 선원이라 일반인 출입불가.
선암사서 가장 위쪽으로 뒷편 야산엔 매니아들에 인기 좋은 야생차밭 5천여평이.
칠전선원하면 이걸 놓칠수 없겠죠.
영화 <동승>에 나온 4단석조.
뒷산 야생차밭서 흘러나온 청정수를 활용하고.
순서대로 상탕,중탕,하탕,허드렛탕.
상탕은 절대자 재단에 올리거나 차를 끓일 때,,,중탕은 음용이나 밥짓는물,,,하탕은 빨레,,,
허드렛탕은 해우서 다녀와서 손씻을 때.
원통전이 보이고~~
圓通展~~
숙종 때 약휴선사 중창 때 지어진 건물.
선암사서 가장 독특한 건축물로 궁궐,관아에서나 볼수있는 정(丁)자 형태.
창호틀 아래 청판에는 토끼 둘이 계수나무 방아를 찍는 모습도 새겨있고.
원통전 안은 대복전 현판이~
정조는 외아들 순조를 이곳 스님들의 백일 기도를 통해 얻었고
순조는 보은으로 대복전이라는 현판을 써준거라는.
문짝의 꽃살 조각이 멋진데 못찍었습니다.
전각 사이에 소규모 텃밭이~~
동백~~
씨앗으로 떨어지기 직전 동백 열매~~
저걸 까면 작은 밤톨같은게 나오죠, 기름집에 가져가 짜면 동백기름이 될터.
며칠전 이효리의 제주생활 관련 기사가 생각나는데.
동백씨앗을 모아 기름짠 후 시어머니 친정어머니에 각각 한병,이웃에도 몇병 돌릴 예정이라나.
머리에 바르고,얼굴에 바르고,샐러드에 뿌려도 먹을 거라며.
동백기름은 언감생심,옛날 백성들은 피마자 기름이였겠죠.
수백년된 누운 소나무~~
은목서(銀木犀)~~~
犀(서)는 코뿔소라는 뜻이니 코뿔소 나무라는 이름도.
그런데 코뿔소하곤 무슨 연관????
흰 꽃이 피면 은목서이고 등황색 꽃이 피면 금목서 라 ~~
향기 좋아 향수 재료로.
유레카!!!
지금 보니 꽃잎 사이로 나온 암술인지 수술인지가 코뿔소 뿔이군요.네 꽃잎은 펑퍼짐한 코뿔소 얼굴
건물은 창파당,,,연못은 방지(方池)~~~
구석 한켠으로 밀려나 있던데 이건 또 뭔지??
적묵당이네요~~
선방인가 봅니다.
뒤깐은 보수중~~
우리나라 유일하게 지정된 화장실 문화재.
저 스님 뒤쪽으로 석조가 있어 용무 후 손을 씼을수있으니 상당히 위생적인 해우소.
콸콸 넘치는 석조 물을 보자니 펑퍼짐하고 후덕한 조계산이 주는 선물을 잘 활용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고.
경내 모든 물을 수구를 통해 한 곳으로 모아 입구 삼인당으로 수렴케하는 것처럼.
해우소 옆으론 객관처럼 사용한 해천당이 있는데 송기숙 선생이 녹두장군을 집필한 곳입니다.
조정래가 이곳 선암사 스님 아들이란건 다 아실터,,,연으로 그는 순천중을 다녔고.
뒤깐 앞으로 난 길을 따르면 15분 거리에 대각암이.
인근에 고려시대 작품인 대각암 부도,무우전 부도,선조암터 부도가 있고.
참고로 같은 시기1920년 송광사~~
규모가 엄청나네요.
선암사와 조계산을 사이에 두고 마주하고 있는 송광사.
조계종 본가가 송광사요 태고종은 선암사이니 조계산의 음덕이란.
고려시대 2대 고승은??
대각국사 의천과 보조국사 지눌. 의천은 이곳 선암사에 지눌은 송광사에.
왼쪽 산속으로 암자가 보이나요?.
조금 더 오르면 법정이 머물렀던 불일암이 있으려니 찾아보니 안보이네여.
아 뿔사, 검색해보니 불일암은 법정이 손수 지은 것이라는.
시간이 좀 남아 무우전 뒷편 10분 거리 은수사로 고고~~
허나 많은 것을 볼수있는 대각암으로 가는 게 정답이겠죠.
은수암 가는길 중창비와 사적비(우측)~~
중창비는 숙종 때 호암대사 약휴가 선암사 중창 때 세운 것.
호암대사의 약휴의 당호 護巖이 仙巖寺를 보호한다는 의미라는 내용도 저기에.
우측 사적비는 1920년대 세운 것으로 백제 아도화상이 개창했다는 내용 외에 도선,의천으로 이어지는
선암사 연혁을 밝히고 있네요.
사찰서 세운 사적비는 과장이 심하죠.절반은 버리고 봐야,,,아도화상 건은 좀 황당.
은수암 가는 길~~
5분여 가벼운 산보길 입니다.조계산 정상 장군봉이 보이고.
조계산은 전형적인 육산으로 왼쪽 능선 너머가 송광사.
조계산 이름은 한국 선불교의 뿌리인 중국 육조 혜능이 주석했던 곳인 조계산를 따라.
당산나무~~
당산나무란 마을을 지켜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여기고 동제를 올리는 신목.
느티나무 앞엔 돌 제단까지 있네요.
은수암~~
한국전 때 불타고 최근 건물
일주문을 나와 사하촌 길상식당서 저녁을~~
82에서 언급하신 길상식당이 기억나. 1인 1만2천원 백반.
버스 타고 다시 순천역으로.
8시 케이티엑스 타고 서울 오니 10시가 넘었네요.
&&&.....
20세기 초엔 <심춘순례>가 있었다면,말엔 <나의문화유산답사기>가 있겠죠.
나의문화유산답사기 6편 선암사편을 참조했습니다.
건축물은 자기 고유의 이미지를 가지죠.어떤 건 한번 스캔만으로도 금방 그림이 그려지고.
화엄사는 궁전 건물처럼 장대하면서 화려하죠,부석사는 절집을 보나 앞 풍경을 보나 장엄한 파노라마.
그러면 선암사는??
연륜이 쌓인 묵은 고택들의 멋스런 조화.
하회마을은 고샅길 따라 이리저리 훓고 다녀야 그림이 그려지듯
선암사는 관광버스 타고 몇군데 하루에 들르는 그런 코스가 아닙니다.
그런 식의 선암사라면 들은 명성에 짖눌려 자칫 실망할지도.
한나절 여유롭게 이곳 저곳 산보가 답.
유홍준은 하루해도 거르지 않고 30번 넘게 갔다네요.
이번 선암사 행이 이전 3번의 총합 보다 더한 여운이 남은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라 확신합니다.
혹 가실분,봄날이 최고일 테고 텍스트론 답사기 6편을 꼭 읽고가시길.
여행은 가이드가 80%인데 하물며 고찰임에야.
답사기를 넘어선 미학서라는 말에 나름 동의하기에.
그리고 그리고 혹 당신이,
여전히 혈기방장하다면 화엄사,부석사를 더 좋아할수있겠지만
지천명을 넘긴 그런 연륜이라면 선암사가 더 좋을 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