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실은 지금 잠을 자는 것이 더 좋은 선택이란 것을 알지만 아무래도 아침에 함께 읽은 보티첼리가 남아 있어서
일까요? 화요일 모임에 이어 즐거운 점심을 먹고 나서 집에 잠시 쉬러 왔는데 잠과 그림보기중 역시 마음이 그림
보는 것으로 기울어버렸습니다.
시대를 선택해서 돌아가서 살 수 있다면 어디로 가고 싶은가 엉뚱한 생각을 할 때가 있지요. 서양의 경우 고대
그리스의 아테네, 그리고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 스페인 남부의 코르도바, 이런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게 되곤 합니다. 한국의 경우라면 박지원과 이덕무 그리고 정약용의 시대, 일본의 경우라면 메이지 유신이
시작하기 직전의 시대, 중국이라면 역시 5.4 운동이 벌어지던 시대, 그렇게 고르고 보니 뭔가 변화의 물결
와중에서 들끓는 에너지와 함께 호흡하고 싶다는 마음이 반영된 것일까요?
보티첼리가 그려낸 단테입니다.
다양한 화가들이 그려서 보여주는 성모자, 각각의 특성이 살아있어서 역시 소재는 하나라도 이런 다양성으로 인해
그림을 보는 즐거움이 배가된다는 생각을 하게 되더라고요.
초상화를 좋아하는 이유는 한 장의 그림속에 한 인물의 삶이 집약적으로 드러나는 그 순간의 마주침에 끌리기
때문이겠지요? 초상화하면 바로 떠오르는 인물중의 한 명이 앵그르의 손길에서 고집스러움이 그대로 드러나는
한 인물입니다. 그의 이름도 모르지만 제겐 한 권의 소설이 줄 수 있는 것만큼의 한 인간에 대한 이해가 가능한
그 그림을 일단 대면한 이후 잊기 어렵다는 것으로 초상화의 힘을 느꼈던 날이 지금도 가끔 생각나곤 하네요.
fortitude란 제목의 이 그림은 말하자면 어떤 덕목의 의인화라고 할 수 있는 그림중의 한 점인 모양인데요
그녀는 불굴의 용기를 보여주는 그림이랍니다. 제목을 보고 나서 그림을 다시 보니 그녀의 눈길, 입매가 새롭게
보이네요.
초상화속의 인물이 들고 있는 메달이 코시모라고 하네요. 자신은 별다른 칭호를 받지 않고 피렌체에서 상당한
역할을 했던 코시모, 그는 나중에 피렌체의 국부라고 불리운다고요. 그가 세운 플라톤 아카데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수용하여 움직이던 스칼라 철학에 일대 타격을 주게 된다고 하는데요 플라톤 아카데미라는 말그대로
신플라톤주의에 대한 관심이 새롭게 살아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이 써클에서 보티첼리도 함께 공부했고
영향을 많이 받았던 모양입니다.
시대가 변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재들, 다시 등장한 그리스 로마 신화가 그림을 보는 우리들에게
풍부한 캔버스를 제공하네요.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살아가고 있는 시대의 변화를 느끼기는 하겠지만
그 시대밖의 사람들이 그들이 이룬 것을 통해서 보는 것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겠지요?
우리들쪽에서 볼 때 제일 오른쪽에서 동방박사의 경배와 상관없이 우리들쪽으로 시선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보티첼리입니다. 언젠가 보티첼리 개같은 전쟁이란 묘한 제목의 책을 읽은 적이 있었습니다. 무슨 내용이지?
궁금해서 구한 책에서 만난 것은 치옴피의 난이었는데요 당시 직물업이 성장했던 피렌체에서 직물업에 종사하는
노동자들의 삶이 상당히 피폐한 상태였고 그들의 분노가 터져나온 것이 바로 치옴피의 난이었습니다. 비록
오래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아주 단기간 동안에 그들 나름의 자치를 시행할 수 있었다고 하더군요.
우리들이 보기에 천재적인 열정이 솟아오른 사람들이 무더기로 등장한 그 시기에도 마냥 평온한 가운데
화가들이 조각가들이 자신의 일을 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 예술의 사회경제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된 책이라
오랫동안 제 안에 그 책의 제목이 기억되고 있는 것 같네요.
보티첼리의 여성 초상화를 보고 있으면 그가 지금 이 시대를 산다면 분명히 디자인 계통에서 일하는 사람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되더라고요.
역시 낮에 보는 그림과 밤에 보는 그림에는 상당한 감정의 차이가 느껴집니다.
요즘 묘하게 시간이 모자라서 그림을 보는 일도 글을 쓰는 일도 예전처럼 자유롭지 않았었는데 오늘
갑작스럽게 전의 기운이 돌아오는 느낌이라서 기쁜 밤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