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우가 쏟아진 서울, 건축사 모임 두 번째 날, 첫 날 함께 한 서울 사람들이 전부 결석한 가운데
첫 날 못 온 사람들이 아이들과 더불어 여러 사람들이 참석했고 장소도 바뀐 관계로 상당히 새로운
분위기의 수업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바로크와 로코코에 관한 이야기가 주를 이루었는데요
바로크하면 생각나는 건물이라면 역시 성 베드로 성당과 베르사이유 궁전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오늘 수업 진행중에 1527년의 침략 이야기가 나왔지만 정확한 내용이 기억나지 않아서 집에 와서
찾아보았습니다.
당시 이탈리아 전쟁중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이 때 교황은 프랑수아
1세와 동맹을 맺고 카를 5세의 군대가 남하하는 것을 막으려 했으나 로마 침략을 막을 수는 없었다고 합니다.
사실 신성로마제국 군대를 지휘하던 브루봉 공은 전사했다고 하는데 그의 원수를 갚겠다고 로마를 침략한
용병들이 약탈을 일삼아서 그 당시 손실된 문화재가 엄청났다고요. 교황은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는
수모를 당하기도 했다고 하는데 이것이 이탈리아에서의 르네상스의 종말이라고 볼 수 있다고 합니다.
1517년 루터가 면벌부 판매에 항의하면서 95개 반박문을 교회에 붙인 것에서 촉발된 종교개혁이 유럽을
태풍의 회오리 상태로 몰아넣은 상태에서 로마의 파괴를 경험한 교황청에서는 프로테스탄트에게 대항한
반종교개혁을 시도하는데 이를 계기로 로마는 바로크 풍의 도시로 바뀌게 됩니다.

로마에 갔을 때 놀랐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고대 로마의 흔적을 예상하고 갔던 도시에서 로마의
흔적보다 오히려 바로크 풍의 성당이 많아서 아니 이게 어떻게 된 것이지? 하고 놀랐거든요. 다녀와서
다시 꼼꼼히 기록을 보다 보니 그렇구나 조금 더 준비하고 갔더라면 좋았을텐데 후회했기도 하고요.

324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지시로 지어지기 시작한 이 성당은 1500년대에 이르러서는 무너지기 일보 직전의
상황이었다고요. 율리우스 2세가 이 곳을 개축하려고 시도했던 당시 교황과 함께 일했던 브라만테부터
여러 건축가, 조각가 출신의 인물들이 개축 현장에서 일하게 됩니다. 그래서 어떻게 보면 베드로 성당은
누구의 작품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 어렵고 여러 번의 변화를 겪게 되지요.
위에서 보는 성 베드로의 자리는 베르니니의 작품이라고 하는군요.

지난 번에 이어 이번에도 여러 번 자료 화면으로 본 베르니니의 발다키노입니다.
청동으로 만든 이 작품은 바로크란 무엇인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살아 있는 증거라고 할 수 있지요.

고대 그리스 로마로 되돌아가자는 운동인 르네상스의 경우 하나의 전범을 상정한다면 바로크의 경우
규범이 아니라 바로크 안에 다양한 개인의 흔적이 있다는 것, 그런 덕분일까요?
바로크 화가라고 해도 루벤스의 바로크와 렘브란트의 바로크가 다르듯이 건축물에서도 바로크가
로마의 바로크, 프랑스나 영국의 바로크가 다 다른 것이 매력이 아닐까 싶어요.
로마에서 발원한 것이 알프스를 넘어가면서 풍토에 맞는, 그리고 건축가 개인의 취향에 맞는 건물이
생겨나고 그 안의 장식에 로코코적 취향이 생기고 이런 것이 어느 한 시기에 집중적으로 만들어지고
고정되는 것이 아니고 계속 변화한다는 것,

오늘 본 것, 들은 것이 너무 많아서 한 번에 정리하는 것은 무리가 될 것 같습니다.
즐거운 수업, 맛있는 밥과 수다로 정리하다 보니 슬슬 졸리기도 하고요. 다음 주 한 주가 휴강이니
그동안 이런 저런 자료도 찾아보면서 조금 더 보충해보고 싶네요.


회원정보가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