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는 불교와 유교를 통해서 전통적으로 전해내려 온 ‘차茶 문화’가 있지요.
저는 우연스럽게도 가톨릭계의 잡지를 읽으면서 이 고상한 전통을 알게 되었고
연재된 글을 읽을 때 잠시나마 신비경에 빠져드는 듯한 오묘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인사동에 가서 녹차와 다기茶器를 구입하고, 다구茶具들을
하나씩 하나씩 갖추어 놓고 비로소 차를 끓여 마시기 시작했었는데요,
그동안 지속적으로 <다도>를 익히며 차를 마셔오지는 않았지만 오늘 문득, 예전에
가보았던 보성의 한 다원이 생각나서 인터넷을 이리저리 뒤적거리며 <예쁜 사진>
들을 모아서 엮어 보았습니다.
어느 분의 감춰진 공덕으로 인해 도시에서 늘 소음‧공해에 찌들어 사는 우리들이
모처럼 즐겁게 감상할 일만 남았네요!
오래 전― T.V에서 어느 통신사의 인상적인 광고의 드라마가 펼쳐졌던 아름다운 길이지요.
수녀님이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한 비구니 스님이 걸어가는 ‘인연’을 만나게 되자
홀깃, 자전거를 돌이켜서 비구니 스님을 자전거 뒷자리에 태우고 달리는 멋진 장면이었죠.
이동 통신사는 암시적으로 서로 마음의 벽을 허무는, 대화를 통한 ‘소통’ 을 말하고
싶었는가 봅니다.
그 후, 이 몸도 그 광고를 생각하면서 저 이국적인 가로수 길을 솔솔 걸어 본적이 있네요.
비록 사람의 손길로 다듬었지만 차밭의, 자연을 닮은 ‘곡선’은 언제나 편안함을 줍니다.
도시의 디자인은 곡선이 생략된 직선 위주로 돼 있어 긴장감을 안고 사는 도시인들
에게 평안을 주지는 못하지요. 게다가 오염된 공기를 마시게 되고, 생존을 위한 복잡한
관계와 각종 소음들 속에 묻혀 살아가게 됩니다.
휴일이 되면 숨통이 열린 듯 도시를 떠나 몸‧정신은 해방감을 맛보고 자연의 아름다운
탁 트인 공간에서 휴식하며, 생기를 돕기 위해 이리저리 떠돌며 ‘자연의 아이들’이 되죠.
프랑스의 철학자 자크 마리땡의 말, “이 자연에는 무수한 아름다움이 있다. 그것을
훔쳐보는 것은 예술가의 하는 일이다.”
사물에서 그리고 자연에서 자기 <이익>이 아닌, ‘아름다움’ 을 발견하는 맑은 눈이라면
예술가의 시선을 닮았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도시의 인공적인 색에 길들여진 인간의 <눈> 은, 자연의 색채를 인식했을 때 다시 시각의
영성(靈性, spirituality)을 회복하게 됩니다. 자연은 하늘이 내린 의사로서 문명에
지치고 피로해진 몸과 정신을 치유해주지요. 사람이 자연과 실질적인 소통관계에 놓여서
있을 때만이 사람은 온전한 건강함을 유지하는 게 가능할 것입니다.
“쪼르륵 ~ ~ ..........”
◆ 『 다도 』 에서 배우게 된 것 ―
“지나친 것은 줄이고 모자라는 것은 늘린다.” 이것이 중용의 ‘中’이다.
― 김흥호 지음 <주역강해>에서
언제부터인가 차茶를 마시면서 <중中>의 세계를 알게 되었습니다. 차 생활을
통해 ‘중’을 익히고 몸에 배게 해, ‘중정中正’을 생활 속에 여법如法하게
활용하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늘 차 생활을 해온 것은 아니기 때문에 아직 다향茶香이 번지는 가운데 차의
오묘한 맛의 세계는 모르지만 이 ‘중’이 의미하는 평범함 속의 심오함에서
차 맛에 못지않은 깊은 매력을 느낀다고 할까요.
물을 주전자에 천천히 쏟아 붓고 나서 적절한 열기로 불을 올려 끓일 때 너무
오래 끓이면 물이 익어 버리고, 그 반대로 짧은 시간을 들여서 끓이다 보면
찻물이 그만 설익는 이치를 인지하고 터득하게 되었습니다.
물이 너무 익거나 설익게 된다면 찻물을 잘 우려낼 수가 없기에 좋은 차 맛을
맛볼 수는 없을 테니까요.
그런데 이러한 자연의 순리와 이치가 어디 찻물을 끓이는 일뿐이겠습니까?
이 ‘中’의 정신은 일상 속에서, 인간관계라든지 어느 일에 있어서도 늘 공통의
맥락이 흐르고 불변의 가치로서 일관되게 적용됨을 알 수 있겠는데요,
지인知人들과의 소소한 담소 중에 시간이 흐르면 몸은 늘쩍지근함을 감지하게
되는데, 이때가 ‘중’이 꽉 찬 시기로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때라고 알려주는
<타이밍timing>과도 같은 것입니다.
또 타인에 대한 희생과 사랑도 ‘중’의 범위와 선을 넘지 않는 게 정도이겠지요.
바이올린이나 가야금 같은 예민한 현악기의 줄은 ‘중정’에 꼭 맞춰졌을 때에야
바른 음을 내게 됩니다.
아마도 예술가들은 작품을 제작할 때 항상 긴장 속에 과정마다 ‘중정’에 따라
<미완성 된 완성> 을 이루어 내야함을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일 것입니다.
인디언의 전승 지혜인 ‘황금의 중간점’ 이란 말이 이것에 해당되고, 일상에서
널리 쓰이는 ‘적절함’이란 말 역시 이 ‘중’과 같은 의미라고 보아도 되겠네요.
3년 전― 마당 한쪽에 심은 감나무가 올 해 열매가 많이 열린가 싶더니, 아까울
정도로 많은 감 열매를 땅에 “후두 둑! ― ” 쏟아 내리는 속뜻은 무얼까요?
제 어림으로 감나무도 ‘중’이라는 자연의 균형에 맞추는 과정의 본능일 거라고
추측하고 있는데요,
감나무에 열매가 적당량을 넘을 경우, 그 커가는 열매의 무게에 가지가 온전치
못할 것이고 나무의 굵기와 크기에 비해 지나치게 많은 감들이 열릴 때
스스로 산아 제한(?)을 하지 않으면 <당도>도 분명히 떨어질 것이기에 ‘달고
잘 여문’ 튼실한 감을 맺게 하기 위한, 희생어린 <자기 비움>이 아닐까 합니다.
<과유불급過猶不及>을 먼저 알아보고, 스스로 자기를 조절해가는 자연이
오히려 인간들보다도 더 지혜롭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요?.......
또 하나는 ‘중’의 연장延長으로, 다도에는 현대인들에게 절실한 <절제와 이완>
을 가르치고 배우게 합니다. 현대인은 너나 할 것 없이 물질적 성장에 힘입어
‘과잉’에 은연 중 중독되어 있는 게 일반화된 현상이겠지요.
이렇게 되면 생활의 편의와 개성에 따라 사물을 선호하는 좋은 면도 있겠지만,
한편으론 <귀함>의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그 자족自足을 모르는 욕망이 삶을
더 무겁게 한다는데 문제가 있겠습니다.
하지만 차를 마시고 그 생활에 맛들이면 그런 마음의 집착에 <절제>를 배우게
하고, 생존 경쟁과 도시 생활의 긴장으로 지쳐가는 영혼에게 찻물이 흘러
들어가면서 <이완>의 숨통을 열어준다는 것이지요. 즉 다도를 즐기는
생활은 일상 속에 <휴식>의 효과를 가져다주어, 피로 중에 차를 마시며 머무는
시간은 나를 쉬게 하는 <명상>이고 그 공간은 몸과 정신의 쉼터가 됩니다.
사람들은 대개 차 한 잔 마시며 마음을 추스르면 풀릴 일에도 너무 감정적으로
대응하는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하늘과 땅이 서로 신비로운 조화로 해서
차를 내리어, 인간 세상에 가장 <클래식한 음료>로 보낸 것이 아닐까 하는데요,
차 정신은 ‘중정’이기에 그대 생각 한걸음 뒤로, 내 생각도 한걸음 뒤로 스스로
물러섰을 때 그 자리가 바로 ‘중정’의 자리, 차의 정신과 하나가 되는
합일合一의 자리로, 다툼이 화해되어 [평상심]으로 돌아가는 본마음이 되겠지요.
그래서 사람들이 천지의 뜻에 조응調應해 어제처럼 오늘도 틈을 내어 차茶를
마시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차를 마시면 흥하고 술을 마시면 망한다.”
정약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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