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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한권의 책 - 오래된 미래

| 조회수 : 1,217 | 추천수 : 14
작성일 : 2005-07-11 09:18:16
오래된 미래-라다크에서 배운다(녹색평론사, 1996)
Helena Norberg-Hodge, Ancient Futures: Learning from Ladarkh(Rider, 1992)


1.
사람들은 도시로 떠났다.
떠났던 사람들은 명절이 되면 손에손에 선물을 들고 나타났다.
명절이 지나면  또 처녀들, 총각들이 마을에서 소리없이 혹은 시끌벅적하게 사라졌다.

사람들은 시골에 남아있는 걸 답답해 했다.
부끄러워 했다.
어떻게든 떠나야 했다.
남아 있는 건 수치였다.
마을에는 생기가 없어졌다.

신경숙은 <외딴방>에서 이 과정을 생동감 있게 그렸다.
양귀자는 <원미동 사람들>에서, 조세희는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에서
시골 떠나 도시로 올라온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눈물겹게 그려냈다.
신경숙은 정읍 사람이고, 양귀자는 전주 사람이고 나는 옥구 사람이다.

그들이 쓴 이야기는 나보다 먼저 태어나서 일찌감치 도시로 나온/나올 수밖에 없었던
우리 누나들 얘기이고, 역시 서울로 올라온 고향 마을 형들, 누나들, 친구들 얘기다.
물론 내 이야기이기도 하다. 동생들은? 없다.
우리 동네에서는 내가 마지막이다. 마지막 세대다. 69년 생.

얼마 전에 돌아가신 이문구씨는 <관촌수필>에서
쫀득쫀득하고 유장한 문장으로 다 떠나고 텅 비어버린 마을을 찾아간 소회를 늘어놓았다.  

시골을 떠나 도시로 갔던 사람들은 이제 다시 쓸모없게 되었다.
도시에서 쫓겨 또 어디론가 떠난다.
정태춘은 노래한다.
가는구나 이렇게.
오늘 또 떠나는 구나.
찌든 살림, 설운 보퉁이만 싸안고 변두리마저 떠나는 구나.
가면 다시는 못 돌아 오지.
저들을 버리는 배반의 도시.
주눅든 어린 애들마저 용달차에 싣고 눈물 삼키며 떠나는 구나.
아, 여긴 누구의 도시인가.
동포형제 울며 떠나가는 땅.
환락과 무관심에 취해버린 우리들의 땅.
비틀거리며, 구역질 하며..."(떠나는 자들의 서울, 1990)

그렇다.
이 책이 다루는 것은 라다크 사람들의 근대화 과정이다.
이전과 이후다. 그리고 과정이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단 말입니까?"라고 말하던 사람들.
존재의 기쁨, 삶의 축복을 누리던 사람들이
"우리는 너무나 가난해요."라고 말하며
관광객에 의존해 살게 되는 과정이다.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가슴이 찢어지는, 말할 수 없이 참담한 한편의 비극이다.

"왜 세상은 하나의 위기에서 또 하나의 위기로 비틀거리며 나아가고 있는가? 항상 이러했는가? 과거에는 더 나빴던가? 아니면 더 좋았던가?"(프롤로그. 첫문장. 7쪽.)

2.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아줌마와 노암 촘스키 아저씨 때문에
나는 언어학 한다는 사람을 만나면 괜히 존경하는 마음이 일고 약간 주눅이 든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1946년 출생으로 추정된다. 스웨덴에서 났다. 올해 나이 쉰 일곱.
이 아줌마가 라다크에 첨 간 것은 1975년이다.
스물 아홉살 쯤 먹은 패기 만만한 언어학도였다.

무슨무슨계 스웨덴인이니 무슨무슨계 무슨인이니 하는 엄마와 아빠 사이에서 태어난 덕분에,
아마 아주 어렸을 때부터 여러 나라 말을 자연스럽게 익혔을 것이다.
라다크에 갈 때 이미 6개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했다.

헬레나는 1975년 첫 일년 동안 <동양 및 아프리카 학교>의 학생으로서
연구를 위해 언어를 분석하고 민담을 수집했다.(18쪽)
그렇게 맺은 인연이 16년 동안 지속됐고, 이 책에 그간의 사정을 적었다.

라다크는 인도 북동쪽에 있다.
라다크라는 이름은 아마도 '고갯길이 있는 땅'이라는 뜻의 티베트 말 라-다그스에서 나온 것 같다(16쪽).

19세기 초반까지 독립 왕국이었다. 지금은 인도에 속해 있다.
전통적으로 티벳과 긴밀한 관계를 가졌기 때문에 '작은 티베트'라고도 불린다.
언어는 독자적이지만 문자는 티베트 문자를 사용했다.
이 나라 수도는 레. 이 나라 평균 해발 고도는 3300미터다.

인구는 1971년 기준 오만천여 명.
가구당 경작면적은 평균 삼십마지기. 약 육천평.
일인당 적정 경작 면적은 여섯마지기. 약 천이백평.(98쪽)
일년 노동 가능한 기간. 넉달.

뭐라고? 넉달이라고? 확실해?

"놀랍게도 라다크 사람들이 실제로 일을 하는 것은 일년에 4개월뿐이다. 8개월간의 겨울 동안에는 요리를 하고 짐승들을 먹이고 물을 긷고 해야 되지만 일은 아주 적다. 겨울 대부분은 잔치와 파티로 보낸다."(41쪽)

일년에 여덟달을!
놀면서 잔치 분위기로 사는 사람들이 라다크 사람들이<었>다.
나는 겨우 넉달 노는 동네에 산다.

나는 춘천이 <넉달은 무조건 놀아야 하는 곳>이라는 말에 혹해서 이곳에 정착했다.
내가 이런 소리를 하면 사람들은 나와 함께 웃는 대신 심각한 얼굴을 하고 묻는다.

"그러면 무얼 먹고 사냐?"

저 남쪽 해남, 강진 이런 동네 사람들은 겨우내 일한다. 따뜻해서 겨울에도 농사를 짓는다.
그래! 그러면, 남쪽 농부들은 다 부자겠네?
일 많이 해서 부자될거면, 우리나라에 부자 아닐 사람은 부자들뿐일 것이다.  

우리나라는 일인당 평균 경지면적이 300평 정도로 돼 있다.
그러니, 모든 사람이 농사를 짓는다고 가정했을 때,
4인가족 기준으로 보면, 가족당 1200평 정도 지을 수 있다.

그러니 라다크가 우리보다 다섯배쯤 넓은 (지어 먹을 수 있는)땅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인구의 95퍼센트 정도가 소위 중산층이라고 할 만한 사람들이다.
나머지는 거의 반반으로 귀족과 하층계급으로 나누어져 있다. (54쪽)

<전통적인 라다크>에서는 어떤 종류든 공격(적인 말과 행동)은 예외적일 만큼 드문 일이다.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만큼 드물다. (52쪽)

<전통적인 라다크> 사회에서 여성들은 아주 강한 지위를 가지고 있으며(65쪽),
이 동네 여성들은 커다란, 아무 거리낌없는 웃음을 웃고, 자유롭게 돌아다니며 개방적이고
조금도 자의식이 섞이지 않은 태도로 남자들과 얘기를 하고 농담을 한다.(75쪽)

가족구성은 일처다부 형태가 지배적이지만 일부다처도 공존하며,
혼외정사는 억제되고 있지만, 사람들의 태도는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다"라는 것이다.
사생아의 어머니는 사람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지 않는다. 이런 건 별일 아니다.
진짜 경멸 받는 것은 화를 잘 내는 것이다.
이들이 할 수 있는 가장 심한 모욕은 "화 잘 내는 사람"이라는 말이다.(63쪽)

아이가 아무리 조르고 보채도, 그 누구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72쪽) 보라.

"한번은 돌마가 뜨거운 찻주전자를 붙잡으려 하는 세살 된 아들을 찰싹 때렸다.
동시에 거의 즉각적으로 그녀는 아기를 품에 꼭 안아주었다.
나는 그렇게 분명치 않은 신호를 받으면 아이가 혼란스럽지 않을까 궁금했다.

그러나 그와 비슷한 경우를 여러번 본 다음에 나는 그 뜻이
<나는 너를 사랑해. 그렇지만 그건 하지마>라는 것을 알았다.
돌마는 아이에 대해서가 아니라 그 행동에 대해서 불찬성을 표시한 것이었다."(72쪽)

그들은 또 부엌에서 온 가족이 마치 안무받지 않은 춤을 추듯이 일한다.

"아무도 <네가 이걸 해>라든지 <제가 그 일을 할까요?>라고 말하는 일이 없는데도
자연스럽고 우아하게 해야 될 일이 이루어졌다.

한 순간에는 다왕 아저씨가 아기를 얼르고 있고
다음 순간에는 화덕 위의 솥을 젓고 있다.
그리고는 곳간에서 밀가루를 가지고 오고 있는 것이다.

그는 아기를 돌마에게 넘겨주고 돌마는 채소를 다지면서
아기를 무릎에 안고 있다.
앙축은 불이 계속해서 타도록 풀무질을 하면서

다와 아저씨가 밀가루를 쏟아붓도록 항아리를 그쪽으로 내민다.
할머니가 화덕에서 교대를 해주고
앙두스는 빵을 만들 반죽의 모양을 만든다.

돌마는 집 옆에 있는 개울로 물을 길러 나간다.
그러고 나서 다와 아저씨는 화덕 옆에 앉는다."(74쪽)

그들은 자기 말로 말하고, 자기 목소리로 노래하고, 자기 몸으로 일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은 말한다. "모든 사람이 우리처럼 행복하지 않단 말입니까?"(91쪽)


3.
나는 설령 이 이야기가 모조리 뻥이라고 해도, 이들을 사랑한다.
나는 설령 이 이야기가 모조리 지어낸 이야기라고 해도, 헬레나 아줌마를 존경한다.

내가 생각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은 여기 그려진 삶이다.
나는 상상력으로도 이들의 삶을 넘어서지 못한다.

내 상상력의 끝은 여기다. 다시 말하면, 헬레나 아줌마 덕분에 내 상상력은 이만큼 넓어진 것이다.

나는 이 책을 읽는 사람은 누구나
다음과 같은 헬레나 아줌마 말에 "나도!"라고 맞장구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라다크를 통해서, 나는 파괴적인 변화에 직면하여 내가 취해온 수동적인 태도는
적어도 부분적으로는 내가 자연과 문화를 혼동한 데 기인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내가 본 많은 부정적인 경향이 우리의 통제력 너머에 있는 어떤 자연적인 진화의 힘이 아니라
나 자신이 속한 산업문화의 결과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나는 또 정말로 생각해보지도 않고
인간은 본질적으로 경쟁하고 살아남기 위해 싸우는 이기적인 존재라고 생각했고,
좀더 협동적인 사회는 유토피아적인 꿈에 불과하다고 보았다.

내가 그런 식으로 생각한 것은 당연했다.
나는 여러 나라에서 살아보았지만 모두가 산업문화의 나라였다.
나는 세계의 덜 '개발된' 지역으로도 꽤 광범위하게 여행했지만
그 여행은 안으로부터의 관점을 얻을 만큼 충분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본질적으로 산업사회의 산물이었고
모든 문화가 자신의 영속화를 위해 사용하는 눈가리개를 쓴 채 교육받은 사람이었다.
나의 가치관, 역사에 대한 이해, 사고의 패턴은 모두
<산업인간>의 세계관을 반영하고 있었다."(8쪽)

그러나 문제는 여전히 남는다.
눈가리개를 벗는 것은 가능한 일일지 모르만, 우리에게는 경험이 없다.
우리 몸 속에는 원형으로 간직할 만한 어떤 경험이, 유전자를 샅샅이 뒤져서 찾아보아도 없다.

언제나 수탈당했고 언제나 억압당했다. 그리고 침탈당했다.
아쉽게도 우리에겐 돌아가야할 혹은 돌아가고 싶은 원형적인 삶이 없다.

지금부터 시작해서 부지런히 만들어 나간다고 해도
백년이 걸릴지 이백년이 걸릴지 삼백년이 걸릴 지 알 수 없고,
영영 못 만들고 말지도 모를 일이고,
과연 시작이나 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끝)
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intotheself
    '05.7.12 8:08 AM

    글 잘 읽었습니다.

    저도 오래 전 읽은 책인데 우선 제목이 낯설어서 오래 들여다보았지요.

    오래 된 미래라니?

    다 읽고 나서야 제목의 깊은 뜻을 이해했던 기억이 나네요.

    새롭게 눈 뜬 생활방식

    그러나 그대로 내가 살아가는 현실에서 실천할 수는 없는 방식

    그래서 제 나름으로 받아 들인 것이

    지금 하고 있는 일에서 혼자서 즐길 것이 아니라

    여럿이서 함께 하는 장을 조금씩이라도 만들어가자는 것이었고

    그런 발상의 전환이 제 인생에 조금이라도 더 향기를 풍기게 된 원동력이 된 것을

    지금도 감사하고 있지요.

    이제는 큰 딸아이가 커서 이 책을 읽을 나이가 되었고

    엄마 오래된 미래가 무슨 뜻이야 하고 물어옵니다.

    도서관에서 책 제목을 보았는데 무슨 정원이라고 그것도 읽어보고 싶어.

    아,이런 소리를 들을 때 세월이 우리 둘 사이에 이런 대화를 가능하게 했나

    새삼 감격하게 되네요.

  • 2. 스콜라
    '05.7.12 11:51 AM

    강은일님의 해금연주회를 갔었는데 프로그램안에 '라다끄의 여인'이란 곡이 있었습니다.
    연주자 역시 이 책을 읽고 많은 감명을 받은 모양이더군요. 라다끄의 여인처럼 용감하게, 지혜롭게 살고싶단 얘기를 듣고 고객를 끄덕였었는데 이리 숨어있는 지혜들을 보면 실행은 못하더라도 진흙속의 진주를 찾은 양 마음이 행복합니다.

  • 3. 달구네
    '05.7.16 6:18 PM

    저도 이책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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