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분에 기르는 오이에 흰가루병이 생겼드랬습니다.
질문방에 물었더니 얼른 뿌리째 뽑아버리라더군요.
미련을 버릴 수가 없어서 며칠을 두고 봤더니
처음에는 드문드문 보이던 증상이
점점 퍼져서 이파리란 이파리는 죄다 밀가루 같은 허연 가루를 덮어쓰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얘네들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온 후에는 그 봄이 다시 올 수 없듯
이제 와서 제대로 된 모종을 구해다 처음부터 키울 수가 없기 때문이죠.
해서, 병든 이파리들을 죄다 따버리고 파란 잎사귀만 남겨뒀는데
금세 새로운 이파리들마저 병들어갔습니다.
걱정스런 맘에 덜 깬 눈 비비며 베란다로 나가 보면
먼저 난 이파리들이 흰가루를 덮어쓰고 있든말든
위로는 가녀린 더듬이 뻗어 자꾸 새로운 잎이 돋아 너울거리고
마디마디마다 꽃은 피어나고
거기에 뽀송한 솜털을 입은 애기들이 올망졸망 맺혀갑니다. 나 살아 있노라 아우성치듯....
그러면 나는 안쓰럽고 대견한 마음에 북을 돋워주기도 하고
아직 자리잡지 못한 덩굴손을 조심스레 잡아서 줄을 타게 해줍니다.
그러다 걱정마시라고 위로해주듯 환하게 웃는 오이꽃을 발견하면 슬며시 마음이 놓이고,
아! 그들 가운데
어느새 당당한 자태를 뽐내는 아이들도 더러 발견할 수 있습니다.
혹독한 시련을 거친 뒤끝이라 더더욱 빛나는 것입니다.
세 놈만 따서 아침상에 올렸더니
식구들 모두 흔감한 표정으로 모여들어 내 마음이 좋았더랬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