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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속의 명장면, 생활속의 즐거움

산골편지 -- 공포의 야콘

| 조회수 : 1,445 | 추천수 : 22
작성일 : 2004-09-06 12:52:33


요즘 궁금한 게 있다면 불영계곡에 과연 단풍이 들었을까하는 것이다.
가을걷이가 워낙 바쁘다보니 성당도 몇 주 빠졌기 때문에 한 동안 불영계곡의 화재(?)를 확인할 수 없었다.

시골 일이라는 것이 어디 끝이 있는가.
고추와 야콘 수확은 끝났지만 아직도 콩이 밭에 그대로 뿌리내리고 있고 밭의 비닐도 걷어야 한다.

여름내 산 속에서 모습을 감추었던 꿩과 다람쥐 등이 내 가을걷이를 돕고 있지만 일은 줄지 않고 더 늘어나는 것 같은 기분까지든다.
나도 가을을 느끼고 싶은데 고요함, 여유로움의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다.
이제는 한숨 돌리고 싶다.

*********************************

어제는 네 분의 일손을 구해서(사실 난 사람을 샀다는 표현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람을 사다니) 야콘을 캤다.
야콘은 우리 긴 밭 중에서 제일 꼭대기에 심었기 때문에 참을 해내는 것이 여간 힘들지 않았다.

빈 손으로 야콘밭에 가려해도 몇 번을 쉬었다 가는데 참을 양손에 들고 가는데 몇 번을 쉬어야 했던가.

요즘은 5시가 넘으면 이내 어둠이 찾아들기 때문데 오후들어서는 더욱 일손을 빨리 놀려야 했다. 그러나 결국 4분의 1도 캐지 못하고 하루 일을 마무리해야 했다.

그래 오늘은 그 나머지 야콘을 우리 부부가 캐기로 했다.
오전에 끝날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 어둠이 찾아들기 시작하는 데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먼저 다 캐놓았기 때문에 내일로 미룰 수도 없었다. 산골에 아침으로 얼음이 얼 정도로 춥기 때문에 그대로 두었다가는 다얼릴 지경이었다.
박스작업을 하는데 그만 어두워지고 말았다.

남편이 아이들도 안심시키고 손전등을 가지고 오겠다고하기에 난 씩씩하게 그러라고 했다.
남편이 내려가고 얼마 안 있자 주위는 염소색깔만큼이나 새캄해졌고 아니나 다를까 무서워지기 시작했다.

사방이 산이고 가까이에는 묘지가 여럿 있었다.
달빛의 혜택도 받을 수 없는지라 난 무서워 머리를 들 수도 일어 설 수도 없었다.

야콘 바구니를 끌어안고 딴 생각을 해 보려해도 자꾸 묘지가 뒤통수를 잡아 당기는 것 같아 견딜 수가 없었다.
법정 스님이 '무서움은 아음이 지어내는 것'이라고 하셨지만 마음이 지어내고 머리가 지어내고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 온통 머리에는 사방의 묘지주인은 누구일까하는 쓸데 없이 구체적인 생각까지 끼어드는 거였다.

남편이 이제 내려 갔으니 오려면 멀었다는 생각을 하니 더욱 떨려 가슴이 다 뻐근해졌다. 이럴 땐 평소에 친하게 지내던 애기 꿩과 다람쥐라도 곁에 있었으면 좋으련만 어디서 침흘리고 자고 있는지 숨소리도 안들렸다.

별을 보면서 큰 숨을 쉬고 싶었지만 고개를 들면 묘도 보게 될까봐 계속 야콘 바구니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왜 남편따라 내려가지 않았던가?'
'어찌하여 이 캄캄한 첩첩산중에 와서 이리 찬바람과 무서움에 떨어야 하는가?'
하는 생각에 눈물보다 소리가 먼저 나왔다.

한참을 큰 소리로 엉엉 거리고 나니 무서움이 훨씬 덜 했다.
"선우 엄마!"
"선우 엄마!"
계속 부르며 남편이 올라 오고 있었다.
내가 무서울까봐 어찌나 빨리 그 비탈을 올라왔는지 목구멍에서 화약냄새가 난다며 숨을 몰아쉬었다.

거기까지도 좋았다.
손전등을 켜고 마저 야콘을 담는데 손전등 충전이 떨어지고 있었다.

담던 것을 중지하고 담아둔 자루를 우선 경운기에 싣고 내려가기로 했는데 문제는 경운기 라이트도 없고 주위가 너무 어두워 그 비탈을 내려가기가 곤란하다는 거였다.

파리목숨만큼 붙어있는 손전등을 들고 내가 앞서며 길을 안내하는데 보통 곡예가 아니었다.
경운기는 비탈을 내려올 때가 가장 위험하다는 소리를 들은터라 바짝 긴장할 수 밖에....

야콘을 내리고 나머지 야콘을 구하기 위해 다른 손정등을 가지고 그 높고 긴 밭을 다시 올라갔다.
한 사람은 비추고 한 사람은 박스에 집어넣는데 또 손전등 불빛이 졸기 시작했다.

도시같았으면 벌써 그 손해를 포기했을거다. 한 달 월급타면 그 정도는 다시 복구할 수 있을테니 말이다.
그러나 농작물이란 돈이 얼마가 되었든 일년 내내 고생한 것이라 작은 것 하나라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도시와 농촌의 개념 차이가 이리 달랐다.
아직 도시와 시골의 문화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나로서는 이런 경우가 제일 힘이 든다.

결국 나머지는 경운기로 옮기는 것을 포기하고 밑에서 다시 이불과 갑바를 가지고 와서 덮고 그 위에 비닐 돛자리로 감싸 주었다.

야콘의 양보다 덮어씌운 것이 더 커 하나의 산을 이루었다.
그리 해두었는데도 남편은 혹여 얼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집에 돌아오니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빵으로 허기를 때우고 있었고 어두워지면 밭에 가지 말라는 말을 자꾸 가슴에 새겨 주었다.

안그래도 에미, 애비 스스로 그 다짐을 새기고 있는데 말이다.
산골농사를 하면서도 아이들에게만큼은 산골의 그런 가슴앓이를 안시키려고 애를 썼는데 오늘 이리되고 보니 여간 콧잔등이 시큰거리지 않았다.

아이들이 자고 있다.
'선우야, 주현아!
너희들이 컸을 때 아빠의 산골행을 고맙게 생각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구나'

************************************************

몇 년 전에 대구에 강의를 간 적이 있었다. 올 때는 비로 인해 비행기가 결항되어 고등학교 졸업 이후 첨으로 기차를 타게 되었다.

비행기가 결항된 것이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약간은 흥분된 감정으로 차창 밖의 것들을 보며 가을을 즐기고 있었다.
한참을 가는데 옆 좌석의 아줌마가 말을 걸어왔다.
자기처럼 여행을 다녀오는 것 같진 않은데 어디다녀오는냐고.

내 사정을 얘기하자 묻지도 않았는데 본인은 가을이면 어디든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해마다 하고 살았는데 막상 떠나자니 걸리는 것이 한 둘이 아니더란다. 아이들도 걸리고 여자다 보니 혼자 어디에 묵는 것도 그렇고 아는 집에 가자니 머리가 자유로울 것 같지 않아 그렇고.

결국 몇 년을 포기하다 이번에는 그저 기차타고 대구까지 갔다가 그대로 돌아오자는 생각으로 무작정 기차를 탔다가 돌아가는 중이라고 했다.
난 그 여자가 부러웠다.

나 역시 똑같은 생각을 하며 살았지만 그럴 용기조차 없었다. 어찌보면 그 여자가 나보다 훨씬 가을을 잘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며 돌아온 적이 있었다.

오늘은 가을이 가기 전에 그 정도만이라도 훌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몇 번이나 했다.
커피를 마셔야겠다. 그 생각을 진하게 굳히기 위해서...................


2001년 11월 4일
아이들과 같이 자고 싶은 날에 산골에서 배동분 소피아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여진이 아빠
    '04.9.8 10:03 PM

    많은 생각 할 거리를 남기네요. 글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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