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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과제- 유서

유서 조회수 : 1,486
작성일 : 2025-11-14 16:46:49

90이 넘은 아빠를 모시고 대학병원 가는날 5시부터 챙기고 6시40분에 아빠집에가서 설거지하고 청소하고 음식쓰레기 치우고  7시30분에 버스를 타고 발디딜틈 없는 사람들 틈속에서 늙어 이리저리 흔들리며 위태롭게 서있는 아빠 팔을 잡고 지하철을 타고 다시 버스를 타고 병원에서 체혈을 하고  심장초음파를 하고 2시간이 넘게 의사를 기다려 5분 진료를 하고 약타는데 30분을 기다리다 아빠와 늦은 아침을 먹고 가을 가로수길을 걸으며 집으로 돌아오는데 아빠가 말했다. "엄마를 괜히 산소를 했다. 드론 해양장 뿌리는게 나을걸 그랬어" 아빠와 수목장부터 화초장 잔디장 납골당 선산까지 아빠가 묻힐 곳을 참 많이도 다녔다. 

아빠는 뭘 원하길래 저렇게 고심하는걸까...

난 아빠가 불사신이 되길 바라는게 아닐까 생각하곤했다.

어디서든  잊혀지길 바라며 영원히 기억되고 싶어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아빠 집에와 흘린 소변묻은 바지를 빨고 화장실에서 부터 거실까지 떨어진 당뇨로 끈적이는 소변들을 닦아내며 오지 않는 자매들을 원망하며 지친 몸으로 반찬을 하고 버스를 갈아타고 지하철을 갈아타고 집으로 왔다.

사는게 고단하다는 생각에 서러움이 울컥 치밀어 오르는 순간 아이가 카톡을 보내왔다.

 

엄마 간호학과에서 내준 내 유서쓴건데 엄마에게 보여주고 싶었어.

아이의 유서가 내 이기심을 내 고단함을 울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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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귀염이 
 내가 태어났을 적에 할머니는 세상 밖으로 나온 나를 축하하기 위해 날밤을 꼬박 새며 뜨개질을 멈추지 않았더란다. 실 하나 하나 매듭 지으며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귀하게 여겨질 나를 생각하며 백개가 넘는 뜨개 덧신을 만들었다. 그 따뜻하고 부드러운 덧신은 내가 태어나게 된 병원 산모들에게 나누어졌다.


평생을 귀한사람 대접을 받으라고 할머니는 '**' 라는 이름보다 평생을 귀염이라고 불러주었다. 하루라도 불러주지 않으면 큰일 날 것처럼. 더 이상 나를 귀염이라고 불러주는 존재가 곁에 없을 때, 인생을 살아오며 때로는 나 자신이 누군가에게 소중한 존재였다는 것을, 귀염이라는 것을 잊을 때가 있기도 했다.

그래서 힘든 순간이 오면, 봄이 와서 산들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인사를 할 때에면 그녀가 계속 떠오른다. 내 손을 항상 감싸 쥐어주던 주름진 손의 단단함이, 소중하게 귀염이라 불러주던 음성들이.

세상을 떠나기 전에 귀염 받았던 순간들을 남기려 한다. 나 또한 누군가를 귀하게 여겨 주던 사람이었길 바라며.


 인생의 그래프를 그릴 때 분명 행복했던 시절들이 존재했건만, 나는 안 좋았던 기억들을 빼곡히 떠올리기 일수였다. 문득 궁금해졌다. 나는 나를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은 걸까?

부모님도 태생도 나의 선택 없이 결정되었다면, 결말의 내가 어떠한 사람이었는가의 정의는 나만의 선택이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난 행복한 삶을 살았으리라. 귀염이라는 이름처럼 귀여움을 받고, 귀한 사람들과 인연을 맺었으리라.

행복이 충만했던 시절을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떠올려주었으면 한다.

중간중간의 고통이 있기에 행복이 그만큼 즐겁고 빛나리.

2. 비
인생의 첫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열아홉살 수능 전날 밤, 난 불안에 떨며  엉엉 울었다. 자다가 놀라 뛰어온 아빠의 옷깃을 잡으며 물었다.
"내가 수능 못 봐도, 대학 못 가더라도... 나 사랑해줄 거야? "
아빠는 살짝 미소지으며 말했다.
"**야 걱정하지마. 엄마 아빠는 네가 건강하기만 하면 돼. 아프지만 않으면 돼. 널 항상 사랑해." 
그 말을 끝으로 안심하며 잠 든 나를 아빠는 밤새 다독여주었다.

후에 알게 된 것으로는 아무런 신을 믿지 않는 우리 아빠는 매일을 나를 위해 기도하셨더란다. 건강하라고 행복하라고 .

수능을 끝 마치고 나왔을 때 비가 한 무더기로 쏟아졌다. 학교 교문 앞에는 아이들을 기다리는 부모님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 많은 인파 속에서도 신기하게 우리 엄마가 그렇게 잘 보였다. "엄마 나 국어 잘 봤어~"하고 한 걸음에 달려가는 내 옆에 학생을 보며 나는 무거운 발걸음으로 걸어갔다.그 한 마디를 나도 해줄 수 없는 게 너무나 미안했기 때문에.

우산을 들고 있던 엄마의 손을 잡았을 때 얼음장처럼 차가웠던 것이 아직도 생생하다.
"엄마 왜 이렇게 손이 차가워? 춥지 않아? 차에서 기다리지."
"네가 들어가서 시험보는데 엄마만 어떻게 편히 있겠어. 계속 기다렸어."

그재서야 느낀 거다. 나만이 힘든 줄 알았던 열아홉이, 독서실 책상으로 사방이 막힌 방에서 공부할 때에면 거실이 왜 이리 고요했는지.
일곱시에 퇴근한 아빠가 집과 반대편인 우리 학교로 늘 데리러 와주었던 것,
내가 먹는 반찬만 늘 타지않고 가지런했던 것,
들리지도 않는 소리 줄여가며 텔레비전을 보던 엄마 아빠의 모습이 이제야 보인 거다.

여담이지만 드디어 나의 수능이 끝났다며 텔레비전 볼륨을 최대치로 키우고 기뻐하는 엄마 아빠의 모습이 너무나 재미있었다.

3. 홀수
 초등학교 시절부터 여자아이들 사이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었다. 짝수를 만드는 것.
교실에서도 책상 두개를 붙여 짝꿍이라 불렀고
좁은 가로수길을 걸어갈 때, 두 명이 앞 서 걸어가면 한 명은 뒤에 걷기 마련이었다.
어린 나는, 우리들은 둘, 넷, 여섯 짝수를 맞추기 위해서 급급했다.

그럼에도 머릿 속에 남은 궁금증들이 많았다. 내가 좋아하는 프리큐어도 블랙, 화이트, 루미너스 세명인데, 우리가 쉬는 시간마다 둘러 앉아 즐겨하는 공기놀이의 공깃돌도 다섯개 홀수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모두 홀수인데 홀수가 외롭지 않는 방법은 없을까?

 어쩌면 나의 홀수는 고등학생 때가 되어서야 완성되었을지 모른다.
이들과 지내며 외로움과 소외감을 느낀 적이 없었다. 둘이 놀다가도 한 명이 없으면 우리는 빈자리의 한 명을 늘 떠올렸으니까. 연분홍색 리본이 달린 가방을 보면 '아 저거 승현이가 좋아할텐데' 하고, 셋이 있어야 온전히 완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복도에서 깔깔 웃으며 장난을 치는 나와 친구들을 볼 떄에면 선생님꼐서 넌저리 웃으시며 "좋을 때다~" 라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때의 나는 그 말의 의미가 그저 우리가 어리고 젊기에 한 말이라 생각했지만, 학생의 유년 시절이 좋았음은 그들을 아무런 조건없이 사랑할 수 있음이 아닐까, 그것이 부러우셨을 수도 있다.

나이의 나이테가 늘어갈 수록, 쌓여가는 역할이 많아질수록 우리는 서로의 나이테를 어찌할 수 없이 비교하게 된다. 학벌, 직업, 결혼, 배우자 갖은 조건들이 붙어갈 수록 그 사람을 바라보는 내 시야가 안개가 끼인 것처럼 흐려질지도 모른다.

떠올려보면 나의 학생 시절은 샘이나기도 했고 휘몰아 치기도 했지만 그 순간들마저 그럼에도 사랑스러웠다. 처음으로 나의 홀수가 완성된 시절.

4. 내가 사랑했던 것들에게
초여름 푸른 나뭇잎들이 그늘을 드리어주는 시원한 산길, 흙 냄새, 풀 냄새,
부드럽고 따뜻한 나의 극세사 이불

열아홉과 스무살의 나에게 위로를 주어, 눈으로 꾹꾹 눌러 읽어내렸던 시험지 속 문학 작품들, 이태준의 무서록, 박인로의 누항사, 칸트의 실천이성비판

지각해서 바쁘게 챙기는 내 입에 넣어주는 엄마가 싼 김밥
엄마가 어린시절 나를 안아 나지막히 읽어주던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동화책
아빠가 운전하며 틀어주는 그런 사람 또 없다는 이승철씨의 발라드들

밤길 고민 가득한 나의 발걸음을 함께 동반해주던 달과 별들
잠들 때에면 늘 내 팔에 얼굴을 포개는 둘리의 꼬순내

현정이가 '**야'가 아니라 '*쟈'라고 불러주는 것
늘어져서 나에게 기대어 잠드는 승현이

할아버지 방에 들어가면 보물 숨겨놓은 듯 몰래 꺼내어,내 손에 쥐어주시던 달콤한 곶감

오지 않는 버스를 기다리는 시간들
바람 따라 움직이는 사찰의 풍경소리

이 모든 걸 기억하는 나는 저 따뜻한 기억으로 죽어도 난 행복할것 같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IP : 175.196.xxx.15
6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25.11.14 4:51 PM (59.7.xxx.113)

    산책하며 보니 나무들이 서로 경쟁하듯 바싹 마른 잎들을 떨구더군요. 그렇게 떨군 잎들이 바닥에 수북하게 쌓여있고요. 그 잎들은 누군가가 모으고 어딘가로 보내져 거름으로 다시 태어나겠지요.

    아버님과 원글님의 하루가 좀더 따듯하고 빛나길 바랍니다.

    저희는 시부모님은 수목장으로 모셨어요. 엊그제 시아버님 기일이라 다녀왔어요. 왕복 400km의 먼거리지만 가끔 드라이브 하는 것같아요.

  • 2. 와아
    '25.11.14 4:56 PM (121.66.xxx.66)

    눈물과
    글솜씨에 감탄이 되네요
    부모의 바른 모습을 보고
    아이가 참 바르고 이쁘게 자랐다는 생각이 들며
    나는 과연 우리 아들에게 올바른 본보기가 되었나
    되돌아보게 되는 글이네요
    아버님 얘기에서 눈물이 핑
    세상 바른 마음으로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드는 글이네요
    감사

  • 3.
    '25.11.14 5:08 PM (49.164.xxx.30)

    충격..글 너무 잘써요.
    참 마음이 따뜻한 아이라는게 느껴지고..엄마를 닮았나봐요

  • 4. 서담서담
    '25.11.14 5:54 PM (121.165.xxx.154)

    나중에 보려고 저장

  • 5. ...
    '25.11.14 5:58 PM (106.247.xxx.102)

    세상에 어쩜 이리 똑띠 따님을 두셨을까요
    따님 글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되네요...

  • 6. 필사...
    '25.11.14 6:58 PM (115.41.xxx.13)

    필사를 해야 하나... 이런 생각이 들만큼
    너무 잘썼어요. 아직 대학생인 아이가 이런 훌륭한
    생각을 하다니...부끄럽다 ㅜㅜ
    아이 너무 잘 키우셨네요. 이런 생각을 가진 아이한테
    간호받는 환자들은 복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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