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2차 계엄을 실행할 수도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더 이상 미국에 산다는 것을 핑계로 지켜만 볼 수는 없다
는 생각을 했어요.
지난 화요일.
그 늦은 시간에 국회 앞으로 모여들어 계엄군들을 막던
시민들이 있었기에 국회가 계엄 해제를 시킬 수 있었어요.
이번에는 함께 있고 싶었어요.
토요일 이른 오후까지는 여의도에 가야하는데
제 결심이 빠르지 못해, 몸이 좀 고생했어요.
제 시간으로 목요일 오후 6시에 비행기를 탔는데,
인천에 도착하니 토요일 오전 6시가 조금 못되었어요.
공간도 시간도 이런 일이 일어났다는 것도 모두 현실에서
빗겨나간 느낌이었어요.
탄핵은 투표에 부치지도 못했지만, 더 이상 총 든 자들이
국민 앞에 서지는 못했어요.
저는 90년대 중반 학번이어서 현대사의 큰 비극을
자료집으로, 증언으로 그리고 가족들의 경험으로만
접했어요. 하지만 어릴 때 광주학살의 사진을 본 것은,
87항쟁 전후에 형제자매들이 당한 일들과 그들의
학우들의 주검 앞에 선 그들의 고통을 본 것은 지금도
생생한 아픔으로 제 몸 안에 있어요.
제가 총 든 자들 앞에 선 것은 팬더믹의 한가운데 였어요.
미국에서 범죄율, 총기 범죄율이 가장 낮다고 할 수 있는
곳에 살아요. 20년 넘게 이 곳에 살면서 총을 든 민간인을
본 적이 없어요. 총소리도 들은 기억이 거의 없어요.
그런데 큐어넌 이라는 자들 열 댓명이 팬더믹 가운데 사람들이
필수적으로 갈 수 밖에 없는 마트 앞에 총을 바지춤에 차고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었어요. 사람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그들을 피해 빙 돌아서 마트에 들어가는데,
한 사람이 그들 앞에 섰어요. 얼굴을 보니, 많이 가깝지는
않아도 만나면 늘 가벼운 대화를 나누는 같은 블록에 사는
아저씨였어요. 그 아저씨가 그자들에게 총기 신분증명서가
있냐고 물었어요. 매사추세츠에서는 아무도 함부로 총을 들고
다니지 못해. 어디서 와서 사람들을 위협하는 거야.
그들이 그 아저씨를 둘러 쌓으려 할 때, 저도 모르게 몸이
움직였어요. 곁에 서 있어야겠다는 생각만 있었어요.
지금 생각하면 폭력에는 함께 저항해야 한다는 내 조국에서의
가르침이 제게 각인되어 있었던 것 같아요.
총 든 자들 앞에 선다는 것은 생각보다 훨씬 무서운 일이었어요.
몇 달 후에 그 큐어넌이라는 자들이 미국회의사당 폭력난입을
한 것을 보고는 크게 숨을 내쉬어야 했어요.
민주국가의 대통령이라는 자가
국민에게 전쟁을 선포하고,
국민들을 총 든 계엄군 앞에 서게 했어요.
이 일이 끝날 때까지 한국에서 같이 하고 싶은데,
고작 며칠 있다가 돌아와서 죄송해요.
마감해야 할 일이 있다는 핑계가 부끄럽습니다.
한국에서 출발할 때, 월요일 아침 9시가 좀 넘었는데,
여기 도착하니 여전히 월요일 아침 9시였어요.
지나왔으나 지나지 않은 시간처럼
제 마음도 한국에 계신 분들에게 지나오지 않았습니다.
부디 모두 건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