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핵이라고 다 같은 탄핵이 아니다. 2016년 박근혜 탄핵은 통치불능 대통령을 통치에서 격리시키는 문제였다. 지금 윤석열 탄핵은 내란범 손에서 군 통수권 계엄권을 회수하는 문제다. 완전히 다른 얘기다.
1.
2016년 11월 초에 '4월 사퇴 6월 대선'이라고 조기퇴진 거국내각 협상 국면이 있기는 했다. 이 시점에서는 박근혜가 받으면 민주당도 받을 생각이었다. 박근혜가 내란범은 아니었으니까. 대선 일정도 반년 전부터 확정되는 장점도 있고.
지금 대통령은 내란범이다. 한동훈 대표 생각대로, 6개월 후에 대선을 하고 그동안 2선 후퇴를 한다고 치자. 군 통수권은 누구 손에 있나? 계엄권은? 김건희 특검법 거부권은 쓰나 못쓰나? 내란범들 사면권은? 답을 할 수가 없다. 당연히 정치협상이 될 리도 없다.
완전히 다른 상황을 '탄핵' 두 글자만 보고 같다고 우기니 말에 힘이 실릴 수가 없다. 내란범은 증오라도 받지, 이건 그냥 웃음거리다.
2.
2016년에는 민주당도 뒤가 없었다. 2016년 탄핵 정국은 본질상 "대통령이 통치불능인가?"라는 문제에 의회의 답을 구하는 절차였다. 부결이 나면 국민 분노야 하늘을 찔렀겠지만, 그 답은 답대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9일 표결일. 긴장감은 아침부터 국회를 돌아다니던 나한테도 저릿하게 전해 왔다. 부결이라면 다음 국면은 아무도 예상 못하는 혼란이다. 진짜 계엄이 왔을 수도 있고.
2024년은 완전히 상황이 다르다. 지금 의회의 답을 구하고 있는 시민은 없다. 이미 헌법에서 결론을 받아든 상태다. 윤석열은 내란범이다. 이번 탄핵은 단지, 시민이 이미 확고히 아는 사실을 의회가 수행하는 문제일 뿐이다.
이것은 중대한 차이다. 2016년에는 "될 때까지 탄핵안 상정"이라는 노선은 거의 검토된 적이 없다. 절차적 정당성도 문제가 되고, 결론 난 문제에 떼를 쓴다는 비판도 받기 쉬웠다. 지금은 얼마든지 그래도 된다. 어떤 역풍도 불지 않을 것이다. 절차 논란이 혹시 있더라도 정당성에 흠집을 낼 수 없다. 그게 내란이라는 사건의 무게다.
지난 토요일의 탄핵 표결은 그래서 2016년 표결과 의미가 거의 정반대다. 2016년 표결은 긴 탄핵 정국의 최종장이었다. 이 날 결과가 정치 공동체의 미래에 정말로 중요했다. 지난 토요일 표결은 이번 탄핵 정국의 문을 연 날이다. 이 날 결과는 실망스럽다. 하지만 치명적이지도 돌이킬수 없지도 않다.
국민의힘은 앞으로 탄핵안이 가결될 때까지 매주, 지난 토요일의 악몽을 다시 만날 것이다. 매주 커지는 여론 압박을 받을 것이고, 야당에만 주어지는 카메라와 마이크를 그저 바라봐야 할 것이고, 이례적인 시청률로 몇시간씩 이어지는 실황 라이브에서 악역을 맡을 것이고, 동료들끼리도 긴장과 의심을 견뎌야 할 것이다. 이렇게 쌓은 업보를 일요일 지역구에서 온갖 욕을 먹으며 정산할 것이다. 보통 정치일정이란 종료 시점이 정해져 있지만, 이건 그것도 없다.
3.
2016년에는 민주당이 여당표 확보 작업을 꽤 열심히 했는데, 설득이 먹힐 만한 여건이 있었다. 반기문.
당시 새누리당 비박계는 여론이 이렇게 악화된 마당에야, 새 당을 만들고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을 옹립해서 대선을 치르는 게 낫다고 봤다. 대안 경로(탄핵 책임론에서 자유로운 대선 주자)가 있었기 때문에, 비주류 의원들이 탄핵 대오에 동참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게 없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탄핵을 찬성한 후 정치적 입지를 갖출 시나리오가 없다. 이런 처지에서는 설득으로 생각을 바꾸지 않는다. 지금 민주당이 2016년 민주당처럼 물밑 설득작업을 한다 해도, 성과가 그때와 같지는 않을 것이다.
4.
그렇다면 탄핵은 어려운가? 2016년 여당 의원들에게는 '1.광장의 압박 + 2.야당의 대면 설득 + 3.생존 대안 시나리오'가 있었다. 1은 지금도 있다. 3이 없는 한, 2는 별로 안 중요하다. 지금 3이 없다. 이게 없으면 스크럼은 일단 안 깨진다. 결론은 이대로 교착인가?
국민의힘 의원 입장에서 경우의수를 나눠 보자.
1) 살 길과 죽을 길이 있으면 살 길을 택한다.
-> 확실히 살 길이 있나? 없다. 국민의힘 의원들도 이건 포기했을 것이다.
2) 불확실한 길과 확실한 죽을 길이 있으면 불확실한 길을 택한다.
-> 지금 국민의힘 의원 대부분이 여기에 있다. 2선 후퇴가 혹시 국민을 설득할 수 있을까? 윤석열 대통령이 임기를 6개월만 남기고 다 내려놓지 않을까? 이런저런 시나리오를 바쁘게 조립해 보는 중이다.
다시 말하지만, 안 될 것이다. 내란범 손에서 군 통수권을 회수하지 않는 대안이 국민을 납득시킬 방법은 없다.
3) 모든 길이 죽을 길이라고 하면, 훗날을 위해 잘 죽는 길을 택한다.
-> 2)번의 모색을 이리저리 하다 보면 결국 여기에 도착하게 될 것이다. 외길이라는 것. 2)번에서 답이 나올 방법이 없다는 것. 그게 내란이라는 사건의 무게다.
잘 죽는 방식은 두 가지가 있다. 탄핵 찬성표로 헌법과 국민의 명령을 받들고 죽는 길. 표결 불참으로 핵심 지지층의 명령을 받들고 죽는 길. 정치인의 입장과 셈법에 따라 '잘 죽음'의 길이 달라지기는 할 테다.
대부분 의원들에게는 '탄핵안 가결 + 나는 찬성투표 안함' 이 조합이 최악의 결과다. 투표자가 점점 늘어 197명이, 198명이, 199명이 되었을 때, 이 의원들이 무슨 생각을 할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추가 : "탄핵보다 빠른 하야를 관철시킨다"라는 길이 하나 더 있고, 이 길로 노력하는 의원들도 있다. 국민의힘 관점에서는 대선 일정이 미뤄지지는 않지만, 최소한 '탄핵'을 반복하지 않는다는 장점이 있다.)
5.
2016년과 2024년 사건의 성격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탄핵의 경로도 달라질 수밖에 없다.
2016년 탄핵은 광장의 분노를 에너지 삼아 의회 내부정치가 역동적으로 움직인 결과다. 상대방에게 일정한 활로를 열어주면서 합의를 이끌어냈다.
2024년 탄핵은 여당 의원들이 2)번 모색을 포기하고 3)으로 넘어올 때 달성될 것이다. 활로를 열어주는 정치가 아니라, 희망을 닫아주는 정치가 탄핵을 이끌 것이다.
내가 평소에 정치를 대하는 관점과는 정반대지만, 지금은 '맨투맨 의회정치'보다는 '큰 구도를 유지하는 공중전'이 더 중요하다. 압도적인 명분으로 매주 국민의힘을 괴로운 무대에 세우는 구도의 힘이 결국 2024년 탄핵을 이끌 것이다. 그런 면에서 지금 민주당이 할 일은
1. 제대로 짜인 이 구도를 유지해 내기
2. 한동훈식 대안의 모순을 드러내기
3. 내란 수사를 감시하기
이 셋이다. 이 셋은, 국민의힘 의원들이 2)의 모색을 끝내고 3)으로 인식을 전환하는 데 중요해 보이는 순서로 나열했다. 지금 이 셋을 다 하고 있다. 앞으로 기조를 유지할 수 있다면(그리고 이상한 오버를 안 할 수 있다면) 탄핵은 될 것 같다. 아니면 탄핵이 거의 확정적일 때 하야 선언을 하거나.
얼마나 걸릴지는 모르겠다. 2016년에는 첫 대규모 집회 이후 6주쯤 걸렸다. 지금은 계엄 이후 1주차다.
2016년과의 마지막 차이를 짚지 않을 수 없다. 2016년 탄핵 정국은 11월이었다. 그 해 11월은 손꼽히게 따뜻했다. 좀만 껴입어도 길바닥에 있을만 했다.
지금은 12월이다. 너무 춥다. 6주씩 가면 많이 화날 것 같은데, 그러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