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벼랑에 대하여
한 줄의 편지 쓰고 싶은 날 있듯
누군가 용서하고 싶은 날 있다.
견딜 수 없던 마음 갑자기 풀어지고
이해할 수 없던 사람이 문득
이해되어질 때 있다.
저마다의 상황과 저마다의 변명 속을
견디어가야 하는 사람들
땡볕을 걸어가는 맨발의 구도자처럼
돌이켜보면 삶 또한
구도가 아니라 할 수 없다.
세파에 부대껴
마음 젖지 않는 날 드물고
더 이상 물러설 데 없는 벼랑에 서보면
용서할 수 없던 사람들이 문득
용서하고 싶어질 때 있다.
(김재진·시인, 1955-)
+ 죄
불완전한 인간을 만든 신의 애프터서비스는 용서다
(함민복·시인, 1962-)
+ 흘러가는 것들을 위하여
용서해다오
흘러가는 강물에 함부로 발 담근 일
흘러가는 마음에 뿌리내리려 한 일
이슬 한 방울 두 손에 받쳐드니
어디론가 스며들어가는
아득한 바퀴 소리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들을 위하여
은밀히 보석상자를 마련한 일
용서해다오
연기처럼 몸 부딪쳐
힘들게 우주 하나를 밀어올리는
무더기로 피어나는 개망초들
꽃이 아니라고
함부로 꺾어 짓밟은 일
(나호열·시인, 1953-)
+ 용서
쉴 새 없이 올라오는 풀 뽑다가
풀들에게서 한 수 배운다
제 올라오는 족족 대가리 분지르고
뿌리까지 뽑는 나에게 품었을
시퍼런 원한 같은 거
까맣게 잊고
모른 채 아무렇지도 않게
또 얼굴 내밀었으니
작년에 핀 것 잊고
엊그제 핀 것 잊고
호미 들고 기다리는 내 앞에
오늘 또 꽃까지 피워 올려
빙그레 웃고만 있으니
(최영철·시인, 1956-)
+ 용서의 꽃
당신을 용서한다고 말하면서
사실은 용서하지 않은
나 자신을 용서하기
힘든 날이 있습니다
무어라고 변명조차 할 수 없는
나의 부끄러움을 대신해
오늘은 당신께
고운 꽃을 보내고 싶습니다
그토록 모진 말로
나를 아프게 한 당신을
미워하는 동안
내 마음의 잿빛 하늘엔
평화의 구름 한 점 뜨지 않아
몹시 괴로웠습니다
이젠 당신보다
나 자신을 위해서라도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나는 참 이기적이지요?
나를 바로 보게 도와준
당신에게 고맙다는 말을
아직은 용기가 없어
이렇게 꽃다발로 대신하는
내 마음을 받아주십시오
(이해인·수녀 시인, 1945-)
+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나는 왜 아침 출근길에
구두에 질펀하게 오줌을 싸놓은
강아지도 한 마리 용서하지 못하는가
윤동주 시집이 든 가방을 들고 구두를 신는 순간
새로 갈아 신은 양말에 축축하게
강아지의 오줌이 스며들 때
나는 왜 강아지를 향해
이 개새끼라고 소리치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개나 사람이나 풀잎이나
생명의 무게는 다 똑같은 것이라고
산에 개를 데려왔다고 시비를 거는 사내와
멱살잡이까지 했던 내가
왜 강아지를 향해 구두를 내던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하는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사람의 마음을 얻는 일이라는데
나는 한 마리 강아지의 마음도 얻지 못하고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있을까
진실로 사랑하기를 원한다면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윤동주 시인은 늘 내게 말씀하시는데
나는 밥만 많이 먹고 강아지도 용서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인생의 순례자가 될 수 있을까
강아지는 이미 의자 밑으로 들어가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강아지가 먼저 나를 용서할까봐 두려워라
(정호승·시인, 1950-)
+ 용서
용서하는 것은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용서했다는 사실조차
잊어버리는 것은
더더욱 좋은 일입니다.
(박성철·시인, 1943-)
+ 용서
나 세상을 용서하던 날, 내 눈 가득 눈물이었다.
그랬다. 용서라는 것은 남이 나를 용서함이 아니라
내가 먼저 용서하는 것이었다.
진정 사랑함은 진정 용서하는 것...
그랬다. 서른 세 살 이스라엘 청년 예수도
목수의 아들로 간직할 수 없는
세상의 무시와 비방과 조롱 속에서도
오직 용서하였다.
세상의 모든 영혼들을
용서하였다.
눈물로 용서하였고
보혈로 용서하였다.
지금 우리의 가슴에는 예수가 흐느낀다.
용서하라! 용서하라! 용서하라!
내가 너희를 용서했는데
왜 용서하지 못하느냐?
주님의 흐느낌에 나는 울었다.
그리고 용서하였다.
진정 사랑함은
진정 용서하는 것...
사랑과 용서가 하나임을
알지 못했던 날들이 부끄러웠다.
나 세상을 용서하던 날, 내 눈 가득 눈물이었다.
이천 년 전... 어느 골짜기에서
피 흘리던 예수의 피가
내 눈물이 되었다.
예수는 사랑이었고
진정 사랑함은
진정 용서하는 것이었다.
(장시하·시인, 1969-)
+ 지금 이 순간
햇볕이 유리창을 간질이고 있다
창밖엔 물오르는 초록,
아픈 기억이 있다면 놓아주어야겠다
놓아주는 일이 더 아프더라도
용서라는 말이 더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당장은 이해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저 물살 빠른 시간에게 주어야겠다
마음을 찬찬히 비우고 보면
해가 뜨는 오늘이 잔칫날이다
(홍수희·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