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한강 작가 포니정 혁신상 수상소감 전문

... 조회수 : 2,942
작성일 : 2024-10-17 18:57:20

 

 

한강 작가 제18회 포니정 혁신상 수상소감 

 

 

 원래 이틀 전으로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진행했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걸음하지 않으셨어도 되고, 이 자리를 준비하신 분들께도 이만큼 폐가 되지 않았을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찾아와주셨으니, 허락해 주신다면 수상소감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간략하게나마, 아마도 궁금해하셨을 말씀들을 취재진 여러분께 잠시 드리겠습니다.

노벨 위원회에서 수상 통보를 막 받았을 때에는 사실 현실감이 들지는 않아서 그저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려고만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언론 보도까지 확인하자 그때에야 현실감이 들었습니다. 무척 기쁘고 감사한 일이어서, 그날 밤 조용히 자축을 하였습니다. 그후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따뜻한 축하를 해주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셨던 지난 일주일이 저에게는 특별한 감동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이후 제 개인적 삶의 고요에 대해 걱정해주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렇게 세심히 살펴주신 마음들에도 감사드립니다. 저의 일상이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기를 저는 믿고 바랍니다. 저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은 올 봄부터 써온 소설 한 편을 완성하려고 애써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내년 상반기에 신작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소설을 완성하는 시점을 스스로 예측하면 늘 틀리곤 했기에, 정확한 시기를 확정 지어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는 저와 연결되는 통로를 통일하여서 모든 혼란과 수고, 제 주변 사람들의 부담을 없애고자 합니다. 제가 출간한 책들에 관련된 일들은 판권을 가진 해당 출판사에 부탁드리고, 그 카테고리에 잡히지 않는 모든 일들은 문학동네 담담 편집자의 이메일로 창구를 일원화하겠으니 부디 참고 부탁드립니다.

이제, 이 자리를 위해 준비해온 수상소감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최근에는 건강을 생각해 커피를 비롯한 모든 카페인도 끊었습니다. 좋아했던 여행도 이제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 사람입니다. 대신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읽어도 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는 좋은 책들을 놓치지 않고 읽으려 시도하지만, 읽은 책들만큼이나 아직 못 읽은 책들이 함께 꽂혀 있는 저의 책장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다정한 친구들과 웃음과 농담을 나누는 하루하루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담담한 일상 속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입니다. 아직 쓰지 않은 소설의 윤곽을 상상하고, 떠오르는 대로 조금 써보기도 하고, 쓰는 분량보다 지운 분량이 많을 만큼 지우기도 하고, 제가 쓰려는 인물들을 알아가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설을 막상 쓰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길을 잃기도 하고, 모퉁이를 돌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들어설 때 스스로 놀라게도 되지만, 먼 길을 우회해 마침내 완성을 위해 나아갈 때의 기쁨은 큽니다. 저는 1994년 1월에 첫 소설을 발표했으니, 올해는 그렇게 글을 써온 지 꼭 삼십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상한 일은, 지난 삼십년 동안 제가 나름으로 성실히 살아내려 애썼던 현실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한줌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 짧게 느껴지는 반면, 글을 쓰며 보낸 시간은 마치 삼십년의 곱절은 되는 듯 길게, 전류가 흐르는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약 한 달 뒤에 저는 만 54세가 됩니다. 통설에 따라 작가들의 황금기가 보통 50세에서 60세라고 가정한다면 6년이 남은 셈입니다. 물론 70세, 8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 모로 행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니, 일단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쓰다 보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6년 동안 다른 쓰고 싶은 책들이 생각나, 어쩌면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세 권씩 앞에 밀려 있는 상상 속 책들을 생각하다 제대로 죽지도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말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참을성과 끈기를 잃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일상의 삶을 침착하게 보살피는 균형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지난 삼십년의 시간 동안 저의 책들과 연결되어주신 소중한 문학 독자들께, 어려움 속에서 문학 출판을 이어가고 계시는 모든 출판계 종사자 여러분과 서점인들께, 그리고 동료, 선후배 작가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다정한 인사를 건넵니다. 저를 수상자로 선정해주신 분들과 포니정재단의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

 

50~60이 작가의 황금기라 

열심히 쓰겠답니다

정말 믿음 가는 작가

IP : 114.199.xxx.113
13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좋아요
    '24.10.17 7:05 PM (223.38.xxx.144)

    저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싶습니다.ㅡㅡㅡㅡㅡㅡㅡㅡㅡ
    네, 계속 써주세요. 작가님을 읽을 수 있어 기쁩니다.

  • 2. ..
    '24.10.17 7:08 PM (211.204.xxx.17)

    참 좋아요
    작가의 팬이 될래요

  • 3. ...........
    '24.10.17 7:12 PM (210.95.xxx.227)

    한강작가 책은 아직 못 읽어봤는데 수상소감 만으로도 진짜 글을 잘 쓰는 사람이라는게 느껴지네요.

  • 4. ..
    '24.10.17 7:21 PM (117.111.xxx.88)

    수상 당일에도 카모마일차 마시면서 자축했다고 좋은 글 많이 써주세요 지금처럼요

  • 5. 정말
    '24.10.17 7:25 PM (125.178.xxx.170)

    모든 글이 마음에 와 닿네요.
    많이 많이 작품 남겨주기를!!

  • 6. ...
    '24.10.17 7:36 PM (175.196.xxx.78)

    본업에 정진한다 하시는 한강 작가님
    이 얼마나 빛나는 가치인가요!

  • 7. 취향
    '24.10.17 7:40 PM (221.138.xxx.92)

    문장이 정말 좋아요....청초하고 단아한 느낌.

  • 8. 우왕
    '24.10.17 7:41 PM (183.98.xxx.141)

    멋있어요, 언니!!!

  • 9. 작가
    '24.10.17 7:45 PM (210.96.xxx.10)

    작가님 목소리 자동 재생되는 신기함!!

  • 10. ㅇㅇ
    '24.10.17 8:22 PM (14.5.xxx.216)

    정말 글을 잘쓰네요
    마음에 와닿는 소감입니다

  • 11. Sevens
    '24.10.17 8:30 PM (121.189.xxx.123)

    신기합니다.
    읽고 있는데 귀에는 작가님 목소리로 얘기하는 것 같아요.

    전 평소 비문학책을 읽었는데
    올 여름엔 헤르만 헤세 묘를 갔다 오면서 다시 소설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문학과 친해보려구요.

  • 12. 지구별산책
    '24.10.17 8:41 PM (223.38.xxx.17)

    어쩜 이렇게 글을 잘쓰실까??

  • 13. ^^
    '24.10.17 10:27 PM (39.118.xxx.243)

    그러니까요. 글을 읽고 있는데 한강작가님의 목소리로 자동음성지원이 되네요. 한강작가님 정말 멋지세요.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1637015 신한투자증권이 국민연금운용사에 이어서 우정사업본부운용도 탈락했답.. 3 악의축 2024/10/17 1,456
1637014 구충제를 ㅎ 1 살짝웃김 2024/10/17 1,081
1637013 롯데백화점 5% 할인 쿠폰 받는 방법궁금해요 13 ... 2024/10/17 1,882
1637012 공원에 있는 길냥이들2 4 시민 2024/10/17 827
1637011 고딩 딸 빈혈수치 7. 걱정됩니다. 10 걱정 2024/10/17 1,886
1637010 쌍계사 48 2024/10/17 7,481
1637009 치아가 뽑히는 느낌이 드는데 2 ㅇㅇ 2024/10/17 1,309
1637008 질투 자격지심 열등감이 제일 무섭다니까요 8 ... 2024/10/17 4,229
1637007 울 100소재 담요 너무 까슬거리네요 7 ………… 2024/10/17 1,021
1637006 죽는 게 확실하면 그대로 있고 싶습니다. 5 폐섬유화 2024/10/17 3,863
1637005 금투세에 난리였던 사람들, 주가조작 불기소엔 조용하네요 17 이상하다 2024/10/17 2,015
1637004 더글로리 송혜교는 정말 인정이네요 18 2024/10/17 5,815
1637003 정숙한 세일즈 가방이요~ 4 뚱뚱맘 2024/10/17 3,395
1637002 라이젠탈 캐리 크루저 써보신 분 계실까요? 3 어느새 2024/10/17 393
1637001 사교육계에서 일하는데 가장 답답한 점 58 oo 2024/10/17 17,485
1637000 명 선생님은 ㅡ 3 Jhhjjg.. 2024/10/17 1,586
1636999 진짜 김건희 무혐의는 점입가경이네요. 13 ... 2024/10/17 3,356
1636998 오늘 지하철역에서 안내견 봤는데 3 00 2024/10/17 2,513
1636997 저 요새도 운전할때 에어컨 트는데 5 ㅇㅇ 2024/10/17 1,183
1636996 중딩과 유럽 패키지 어떨까요 12 .. 2024/10/17 1,753
1636995 층간소음으로 인한 강제운동 3 hh 2024/10/17 1,575
1636994 늘보리를 밥에 섞어먹으니 변비가 와요 4 질문 2024/10/17 2,111
1636993 집 내놓으면서 싱크대 시트지를 새로 붙일까 하는데요 4 .. 2024/10/17 1,298
1636992 디스패치가 또....김건희 덮으려고 에휴 21 ... 2024/10/17 7,420
1636991 원샷한솔에 강아지 6 토리 2024/10/17 1,69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