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cook.com을 즐겨찾기에 추가
login form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아침부터 이과 남편에게 한강님 시 읽어줬어요^^

기분좋은 조회수 : 2,134
작성일 : 2024-10-13 07:53:40

오늘 아침 해뜨기 전 눈을 뜨고 어느 회원님이 올려주신 한강님의 ‘서시’ 소개글을 보게 되었어요 (눈뜨자마자 82ㅎㅎ) 
제가 좋아하는 시인데 그분이 올려주셔서 제 머리 속에 다른 생각이 들어서기 전 아름다운 시로 머리를 맑게 씻고 아침을 시작할 수 있어서 참 감사했어요 

 

주말 아침이라 출근의 압박없이 침대에서 느긋하게 딩굴거리던 옆자리 남편에게 “시 한편 읽어줄까?” 했더니 이과 남편은 “길어?”라고 묻길래 “아니”라고 답해줬어요 

한강님만큼은 아니지만 저도 말투가 조곤조곤한 편인데 창밖의 해가 완전히 뜨기 전 하늘마냥 반쯤 깨인 목소리로 차분히 읽다보니 남편 들려주려고 읽었지만 저에게 읽어주는 시이기도 했어요 

 

다 읽고 나니 남편이 “운명 말고 내 머리를 끌어 안아줘“라며 제 안에 파고 드네요 ㅎㅎ
올해 생일로 드디어 60대에 들어선, 머리 희끗한 남편이 저에겐 운명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퍼뜩 듭니다 

 

남편만 바라보는 여자라는 뜻이 아니라 
저의 파란만장한 인생에 제 희노애락의 대상이기도 하고 때론 원인이기도 했던 사람이면서 한편으론 40년 가까이 제 인생의 부침과 미숙에서 성숙으로 가는 길을 바로 옆에서 지켜본 사람이기도 해서요 
죽을만큼 사랑한다고도 했다가 보기싫어 밀쳐내기도 했다가 내모습이 부끄러워 그로부터 도망가고도 싶었던 

 

뭐 한강님의 크고 깊은 뜻과는 거리가 먼 얘기지만 새삼스레 성실 그 자체로 열심히 한눈 팔지 않고 살아온 남편이 남자나 아빠가 아닌 저와 같은 인간 대 인간으로 보이며 애틋함과 고마움과 미안함, 존경심마저 배어나와 이렇게나마 표현해 봅니다 

 

누군가의 마음, 인생을 돌아보게 하는 글의 힘이란… 
다시한번 한강님께 감사드리고 아직 읽지 못한 혹은 두고두고 읽을 아름답고 깊은 글들이 많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이 축복이란 생각을 합니다 
모두들 행복한 주말 아침 보내시길^^

IP : 220.117.xxx.100
17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24.10.13 7:56 AM (220.117.xxx.100)

    서시 - 한강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 거야
    떨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뺨에,
    얼룩진


    * (문학과지성사, 2013)

  • 2. ...
    '24.10.13 8:06 AM (223.118.xxx.78)

    시 읽어 줄까 하는 아내의 물음에 길어?
    딱 이과 남자다운 질문이네요.ㅋㅋ

    시는 너무 좋은데 우리집 공돌이 남편한테 읽어 줘봤자 전혀 공감 하지 못할거 같아서 혼자만 즐기다 갑니다.

  • 3. 아..이 아침
    '24.10.13 8:09 AM (211.60.xxx.146)

    이런 글을 읽을 수있어서 행복합니다.
    비슷한 또래의 부부라 그 마음 공감이 갑니다.
    남편이나 남자가 아닌 한 인간으로서 서로를 바라보며 함께 나이들어가는것...
    아름다운 한강님의 시 올려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드려요.~

  • 4.
    '24.10.13 8:11 AM (121.134.xxx.92)

    두 분의 모습이 그려져서 덩달아 행복해지는 아침입니다..
    저에게 훗날 내 운명이 다가와 물어보는 순간, 내 인생 돌아보면 참 고맙고 다시 없을 남편일텐데 제가 그간 좀 소중하게 대하질 못했네요.. 쩝.

    방금 한강의 단편 소설 하나 읽고서 눈내리는 겨울을 떠올리고 있었어요. 좋은 순간 나눠주신 원글님도 행복하세요~

  • 5. ...
    '24.10.13 8:34 AM (61.43.xxx.79)

    한강님의 서시 읽어주는 주말 아침이
    참 행복해 보여요.
    저도 옆에 누워있는 남편보며 행복해지려 ..훗

  • 6. 요즘
    '24.10.13 8:36 AM (220.117.xxx.100)

    참 보기 좋고 평화로운 기운이 퍼진 느낌이예요
    한글날이 마땅히 받아야 할 대접을 받은 느낌!
    가을이 책 이야기와 생각을 나누는 가을다운 계절로 돌아온 느낌!
    아주 좋아요

    어릴 때는 이과 남편에게 감수성이 부족하느니 그런 것도 안 읽어봤느니 하면서 퉁박도 줬지만 돌아보면 얼마나 유치한지.. ㅎㅎ
    남편은 평생 일하며 가족을 챙기고 가족들이 누리는 것들을 성실하게 책임졌고 저는 남편으로 인해 가벼운 부담을 지고 남편이 일한 시간의 반의 반도 못했죠
    남편은 남편대로 평생 공부하고 일하며 인생을 바라보고 느끼고 돌아봤을텐데 문과의 감수성이 뭐라고… 반성 많이 했어요
    어쨌든 한강님으로 인해 뒷전으로 밀려났던 것들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분위기가 된 것이 참 좋습니다
    82도 마찬가지^^
    풍요로운 가을 주말을 만끽하셔요

  • 7. 한강 작가
    '24.10.13 8:37 AM (119.71.xxx.160)

    덕분에 글재주 있으신 분들 다 커밍아웃 하시네요

    주옥같은 글이네요. 감사 ^^

  • 8. 저두
    '24.10.13 9:44 AM (121.169.xxx.192)

    덕분에 행복합니다. 옆지기를 만나 산 세월이 홀로 산 세월보다 길어지니 서로 애틋해집니다. 매일 아침 안아달라며 파고드는 짝궁 잘 보듬어줘야겠어요^^ 여러분 감사해요^^

  • 9. 한강 작가가
    '24.10.13 9:46 AM (218.39.xxx.130)

    모두를 보드랍게 만드네요.. 자랑스럽습니다^^

  • 10. 봄봄
    '24.10.13 9:53 AM (110.12.xxx.235)

    좋은 글 소개해주셔서 감사해요. 필사 함 해봐야겠어요

  • 11.
    '24.10.13 10:21 AM (211.219.xxx.193)

    길고만^^

  • 12. 맞아요
    '24.10.13 10:23 AM (118.235.xxx.115)

    수상을 계기로 혹은 핑계로 책 얘기 문학 얘기를 주고받기 어려웠던 사람들과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이 분위기가 넘 좋아요^^
    글이나 글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는건 결국 사람의 사람에 대한 생각이고 마음을 나누는 거니까요
    한강님이 큰일 하셨어요
    어제 어느 분이 한강님의 글은 역사를 바꾸는 힘이 있다는 이야기가 무슨 뜻인지 어렴풋이 짐작이 갑니다
    새삼스레 한강님 포함 마음 속 고통과 부채의식으로 잠못자며 몸 비틀며 글과 그림과 음악을 만들어낸, 지금도 만들고 있는 모든 예술가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올립니다!

  • 13. 저도
    '24.10.13 10:31 AM (115.41.xxx.13)

    얼마전 회원님이 올려주신 서시 읽어보고
    너무 좋아서 시집 좋아하지 않는데 한강 작가님 시집은
    궁금해서 바로 구입했습니다. 빨리 배송되기를~

  • 14. 아침
    '24.10.13 11:06 AM (112.121.xxx.182)

    좋네요 ^^
    마음이 차분해지면서 뭔가 여유로워지는...
    감사합니다 ^^

  • 15. 그래도
    '24.10.13 11:56 AM (211.211.xxx.168)

    남편분, 열심히 들어 주셨나봐요.

    제 남편같으면 ㅎㅎ

  • 16. ..
    '24.10.13 12:18 PM (116.88.xxx.40)

    82 회원이 대부분 갱년기에 접어들어 감수성도 무뎌지고 삶에 지치고 팍팍해지고 내 안의 소녀는 어디 간지도 모르는 채 살다가 한강님의 수상소식이 모두에게 인간성과 감성을 돌아보게 만든 것 같아요.

    나이가 들어도 무뎌지지 않고
    젊을 때 하던 고민을 놓치지 않고
    세상에 대한 책임감을 외면하지 않고
    내 안의 날카로움을 녹슬게 두지 않고
    타인과 사회에 대해 생각하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 17. 저도
    '24.10.13 12:20 PM (27.117.xxx.68)

    덕분에 일요일 늦잠에서일어나
    시 한편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댓글입력 작성자 :

N

번호 제목 작성자 날짜 조회
1635143 고추가루보관 어떻게 하시나요? 5 찌찌뽕 2024/10/13 1,355
1635142 탄산수 제조기 쓴지 14년이예요 16 탄산수 2024/10/13 3,037
1635141 자식자랑하는 친척 6 Dum 2024/10/13 2,811
1635140 묵주기도 매일 하시는 분들께 여줘봐요. 15 천주교신자 2024/10/13 1,133
1635139 앞니가 깨졌는데 레진 말고 방법이 없을까요? 9 2024/10/13 1,221
1635138 11월 10일경에 추워질까요? 4 00 2024/10/13 1,408
1635137 녹차나 루이보스티 같은거 유통기한이요 3 .... 2024/10/13 654
1635136 귀차니즘 엄청난 사람인데 안 씻고는 못 살겠어요. 3 2024/10/13 1,000
1635135 주말부부인데 일거리갖고 와서 일하는 남편 어떠세요? 40 ㅇㅇㅇ 2024/10/13 3,860
1635134 마녀스프 끓이는중, 카레가루가 없네요. 6 다욧 2024/10/13 928
1635133 Sk통신사에서 10년뒤 편지도착 어제받앗어요!! 4 감동 2024/10/13 1,775
1635132 굳이 밥이아니어도 사람이 살긴하나봐요 6 ㅁㅁ 2024/10/13 2,345
1635131 대학수능날 중고등 학교 가나요? 12 ... 2024/10/13 1,210
1635130 한강 작가 일본 인터뷰 영상 (2020년) 4 ... 2024/10/13 1,350
1635129 마트 와인 중에서 3 뽀르르 2024/10/13 738
1635128 사주에 화.목이 빠져있어요 17 2024/10/13 1,994
1635127 애들간 대화인데요 38 이런게 2024/10/13 4,788
1635126 위고비와 삭센다 효과의 차이가 뭘까요. 16 2024/10/13 2,427
1635125 부모의 재능 물려받기 5 부모 2024/10/13 1,290
1635124 추워지기 시작하면 샐러드는? 2 궁금맘 2024/10/13 1,391
1635123 중식에서 전분역할은? 5 시간없는 죽.. 2024/10/13 603
1635122 한강 작가 노벨상수상 특집 긴급편성 프로 오늘밤 7시에 하네요 6 ........ 2024/10/13 1,789
1635121 어머니 수술후 회복음식 뭐가 좋을까요? 6 Lio 2024/10/13 806
1635120 질문 자동로그인 되어 비번을 알지 못할때 3 시나몬캔디 2024/10/13 399
1635119 댓글에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들 38 ... 2024/10/13 2,4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