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제 책을 읽었는데 여보
남자와 여자가 매일 만나서 섹스를 하는데 어느날 남자가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다가
남자는 소년이야 매일 당신 생각만 하느라 책이 재미가 없다는 말을 하는데
여자는 남자의 책이야기를 너무 좋아하는 거야
그래서 남자는 여자에게 꺼낸 김에 책을 읽어줘
여자가 내일부터는 순서를 바꾸자고 말해 언제나 만나면 같이 씻고 섹스를 했는데
이제는 책을 읽어준 다음에 섹스를 하자고 해
그래서 남자는 매일 책을 가지고 여자를 만나러 가
한 책이 끝나면 다음 책을 읽어주는 거야
여자는 전차의 검표원이었는데 일을 너무 잘해서
승진이 돼 사무직이 된거지 그러자 여자는 갑자기 홀연히 사라져
남자와 여자는 나이 차이가 많이 났어
남자는 15세였고 여자는 36세였지
8년의 시간이 흐르고 법학생이 된 남자는 법원에 재판을 방청하러 갔다가 전범으로
재판에 피고로 서게 된 여자를 다시 만나게 돼
전쟁중에 여자는 감시원으로 일하며 매달 10명의 유대인을
아우슈비츠로 보내서 죽이는 일을 했는데 조금의 죄책감도 가지고 있지 않아서
사람들을 분노하게 해
그 일은 다른 여섯명의 감시원과 같이 했는데
그 여섯명의 감시원들은 변호사와 의논해서 이 여자가 책임자였고
모든 걸 이 여자가 결정했다고
뒤집어 씌우는데 사실 이 여자는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르는 문맹이었어
그 서류의 사인이 자기 것이 아니고 자신은 읽을 줄도 쓸 줄도 모른다는 말을 법정에서
하면 책임자라는 무거운 벌을 피할 수 있는데 여자는 글을 못 쓴다는 말을 하는 것 보다
죄를 뒤집어쓰는 쪽을 택해 그런데 여보 당신 어머니 말이야
어머니를 모시고 병원에 갔을 때였어. 주차하기가 힘들어서 어머니 혼자 올라가시라고
하고 주차를 하고 내가 올라갔을 때 병원 접수대에 어머니가 우두커니 서 계셨어
접수하는데 어머니 이름을 적으라고 한 거야
병원에서 매번 그래
어떤 때는 본인의 서명이 필요하다며 보호자가 있어도 직접 적으라고 하는 경우도 있어
어머니는 글을 쓸 줄 모르시잖아
그 날도 어머니는 종이 앞에 볼펜을 쥐고 우두커니
서 계시는 거야
정말 마음이 아팠어. 나는 어머니가 그 접수대 앞에 앉아 있는 직원들과 또 대기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글을 모른다는 것을 알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을 알아서
나는 최대한 자연스럽게 어머니에게 말을 했어. 어머니 이렇게 휘리릭 쓰세요.
사인하듯이 둥그렇게 쓰세요. 라고
어머니가 갑자기 아주 큰 목소리로 뭘 둥그렇게 써. 이름을 쓰면 되지. 라고 하셨어
호통치시는 거야. 내 말이 잘못된 것 처럼. 나는 가만히 있었어.
어머니가 볼펜에 든 손에 다시 힘을 주며 펜을 드셨어.
나는 그 날 알았어. 어머니가 가끔 성공적으로 어머니 이름 세 글자를 쓰기도 하셨거든.
나는 어머니가 어머니 이름 세 글자는 외우셨구나 생각했는데
어머니는 글자를 아시는게 아니었어. ㅅ을 쓰고 ㅓ 를 쓰는 방식이 아니라
어머니는 자신의 이름을 하나의 그림처럼 외우고 계셨는데 그 날은 어머니의 그 그림이
뒤죽박죽이 되어버린 거야.
아무리 애를 써도 그 그림이 떠오르지 않았어.
엄마는 겨우 가운데 이름 한 글자를 쓰셨어. 그림 그리듯이. 나는 엄마를 지켜보다가
앞뒤로 어머니의 이름 석자를 채워서 그 종이를 접수처에 냈어. 어머니같이 부지런하고
똑똑하고 지혜로운 사람도 그게 안 되는 거야. 배울 시기를 놓쳐버린 후에는 정말
안되는 거야. 내가 몇번을 가르쳐드리려고 했지만 지금의 어머니는 몸이 너무 아프고
결국 포기하게 되었지.
그럼에도 엄마는 존엄을 포기할 수가 없어서 그런 힘든 순간을 수없이 마주해야하는 거야.
모른다는 건 그런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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