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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흔 살 엄마 이야기

.. 조회수 : 7,274
작성일 : 2024-07-21 15:59:11

오랜만에 친정에 가서 친정엄마와 나란히 누워 밤새 이야기를 나누었어요.

정확히는  엄마 얘기를 들어드린 거죠.

90세가 넘으니 엄마 인생엔 많은 옛날이 있고 많은 일들이 떠오르나봐요.

 

엄마는 50년대 중반에 전쟁의 비극도 비껴갈만큼 첩첩산골에 살았대요.

아버지는 같은 마을의 가장 가난한 집 총각이었는데 청혼하러 직접 왔고 엄만 아버지가 싫지 않았대요.

두분다 학교 문턱에도 못가봤고 아마 조선시대와 다를바없이 살았던 것 같아요.

 

어느 집 문칸방으로 밥그릇 2개, 숟가락 2개, 옥수수 한말만 가지고 새 살림을 날때 주인집 사람이 그러더래요. 이런 가난뱅이는 처음 본다고..

가난한 부부가 마주 앉아 밥을 먹고 나란히 앉아 아궁이에 불을 땔 때 아늑하고 행복했대요.

굶는 날이 더 많았지만..

 그리고 남의집 밭일 논일을 억척스럽게 해서 땅을 한평씩 늘려갔대요. 초가집이지만 셋방도 벗어나구요.

쌀농사를 지었지만 한번도 쌀밥을 안먹고 쌀을 팔아서 또 논을 사고 했답니다.

 힘들었지만 그렇게 재밌더래요.

모내기나 김매기 씨뿌리기 등 많은 일손을 사서 일을 하려면 점심이나 새참을 계속 만들어야해서 농삿일을 하면서 하루 걸러 두부를 만들고 된장 고추장을 만들고 산나물을 뜯어오고 장을 보러 장에 가야했대요.

읍내 장은 30리를 걸어가야했는데 신발도 없이 맨발로 다녔더랍니다.

고무신이 있지만 아껴야해서요.

그 옛날 돌멩이가 가득한 길이었을텐데 억척스럽고 부지런하던 젊은 아낙은 옥수수나 콩을 이고 아기를 업고  맨발로 걸어서 장에 가서 간고등어나 밀가루 같은 걸로 바꿔왔대요.

지금은 상상도 할 수 없는 고행같은 그 삶을 생각하니까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엄마는 그 시절엔 힘든줄 몰랐대요.

새벽부터 쉬지 않고 일을 해서 초저녁부터 졸음이 몰려왔지만 저녁을 먹고나면 등잔불 아래서 베를 짰대요. 아버지의 일과도 비슷했겠지요.

부모님의 첫 자가였던 세칸 초가집에서 다섯 아이가 태어났어요. 60년대 후반생인 저도 그 집에서 태어났답니다. 

도시에선 눈부신  발전이 이루어지던 시기인데 그 시절 강원도 시골에선 등잔불 아래서 베를 짰다는게 믿어지지가 않더군요.

부모님은 부지런하고 눈썰미있고 강인하며 명석한 분들이셨어요.

두분다 무학이지만 스스로 이치를 깨칠줄 아셨고 논과 밭을 차근차근 늘려갔고 아버지는 틈틈이 독서를 하고 신문을 구독하는 특이한 농부였어요.

전날 석간을 다음날 우체부가 배달해줬죠.

다섯아이 중 막내인 제가 태어난 후 작은 기와집을 사서 이사를 갔고 저는 가난을 모르고 자랐어요. 부자도 아니었지만  결핍을 못느꼈어요.

그리고 부모님은 5명의 자식을 상급학교에 보냈어요. 큰오빠가 중학교에 갈무렵 그 시골 촌에서 유일하게 중학교에 갔대요.

그렇게 다섯명을 다 대학을 보냈어요.

이제 더이상  돈은  모이지 않았고 자식들 도시로 보내고 하숙비와 학비 버느라 더 고단한 농부가 되어 뿌듯함 한켠엔 근심 주머니가 늘 있었던 것 같아요.

 

지금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도시에서 공부한 자식들은 다 도시에서 살고 있어요.

부모님만큼 부지런하지도 명석하지도 않은 자식들은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고 도시에서 고만고만하게 살아가면서 귀향의 꿈을 꿉니다.

월급쟁이로 살았지만 농부를 꿈꾸다니 참 아이러니한 귀소본능이네요.

 

아흔의 엄마는 풍요가 넘쳐나는 지금보다 가난했던 옛날이 더 재미있었대요.

누구나 과거는 다 그런 건가 봐요.

저도 깡시골에서 살던 8살까지가 가장 행복했고 그리운 시절이거든요.

 

엄마 집엔 제법 넓은 마당이 있는데 한켠엔 갖가지 꽃을 키우시고 또 한켠엔 각종 채소를 키우세요.

그렇게 꽃과 채소를 키우면서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엄마는 살아가세요.

남은 엄마의 여생은 더 행복하셨음 좋겠어요.

IP : 39.118.xxx.133
35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어머니
    '24.7.21 4:04 PM (210.123.xxx.101)

    건강하게 행복하세요~

  • 2. ...
    '24.7.21 4:05 PM (114.204.xxx.120)

    한편의 대하소설을 읽은 느낌이네요.

  • 3. ssunny
    '24.7.21 4:08 PM (14.32.xxx.34) - 삭제된댓글

    그렇게 책임강 강하고
    성실하신 부모님을 둔 원글님이 부러워요
    어머니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4. 행복하다...
    '24.7.21 4:08 PM (14.49.xxx.105)

    원글님 복이 많으셔요

  • 5. ssunny
    '24.7.21 4:08 PM (14.32.xxx.34)

    그렇게 책임감 강하고
    성실하신 부모님을 둔 원글님이 부러워요
    어머니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 6. ㅁㅁ
    '24.7.21 4:09 PM (112.187.xxx.168) - 삭제된댓글

    세상에
    대단하신대요
    언덕 귀퉁이한곳없이 빈손으로 오남매를 모두 대학까지

    두분 궁합이 잘 맞으신듯요

    모두가 지난날들을 곱게기억하진 않거든요
    아래층 독거 95ㅡ6세어른 종종 예이야기 들어 드리는데
    영감이라고 집에 쌀한톨이없는데 술에 도박에
    어느날은 죽어버릴라고 청산가리를 삼키려다가 큰아들한테 들켜
    미수로 그쳣다고

  • 7. 원글님
    '24.7.21 4:10 PM (124.49.xxx.19)

    부모복이 많으시네요.
    부러워요.

  • 8. 우와
    '24.7.21 4:10 PM (180.70.xxx.42)

    무엇보다 아흔 넘으셨는데 정신 맑으시고 정정하신게 부럽네요

  • 9. ㅈㅈㅈ
    '24.7.21 4:14 PM (222.100.xxx.51)

    그 시절 젊은 색시가 맨발로 거친 산길을 아기업고 이고지고 장에 갔다왔을 것을 상상하며
    왜 내 가슴이 저릿한지.........
    그렇게 누워서 두런두런 옛날 얘기 함께 공유하고 추억하는 모녀 관계...
    원글님 복 많으십니다

  • 10. ㅇㅇ
    '24.7.21 4:14 PM (211.234.xxx.220)

    잔잔한 글..가슴이 뭉클하네요.
    오래오래 건강하고 행복하시길.원글님도 어머님도요.

  • 11. ..........
    '24.7.21 4:14 PM (211.36.xxx.41)

    이런 글 너무 좋네요.

  • 12. 7899
    '24.7.21 4:14 PM (121.161.xxx.51)

    어쩜 이렇게 글을 담백하면서도 진솔하고 재미있게 쓰실까..
    뭐하는 분인지 궁금하네요. 서울에서 나고 자란 남편과 저는
    어쩌다 보니 2년전 돌아가신 시아버지의 고향으로 귀촌했어요.
    전남 오지중에 오지로요. 인구 감소의 직격탄인 이곳엔 젊은이는 없고 할머니들이 많아요. 솔직히 도시 할머니들만 봐오다
    처음 접한 오리지날 시골 할머니들의 행색에 충격도 받았어요.
    평생 땡볕아래 농사로 그을린 얼굴은 새카맣고 손은 갈코리에
    허리는 다 굽고.. 제 옆집 할머니는 80이 넘었는데 몇백평
    고추농사를 지으세요. 자식자랑에 눈을 반짝이면서요.
    그런 잘난 자식들이면 엄마 좀 편하게 해주지 ㅠㅠㅠㅠ
    아무튼 제 사는 곳이 시골이라 그런가 글이 참 와닿습니다.

  • 13. 은하수
    '24.7.21 4:16 PM (58.142.xxx.16)

    너무 좋은글에 감사를 드립니다.
    저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엄마이야기 올릴께요
    6.25를 온몸으로 이겨내고
    양담배 장사로 온식구 먹여살린
    13살 소녀 이야기입니다.

  • 14. 구름
    '24.7.21 4:23 PM (14.55.xxx.141)

    글을 참 잘 쓰십니다^^

  • 15. 123
    '24.7.21 4:24 PM (175.209.xxx.151)

    뭉클한 어머님 이야기를
    잔잔하고 따스하게 써주셨네요
    정말 잘 읽었습니다.
    다른 분들 글도 기다려져요

  • 16. .....
    '24.7.21 4:41 PM (218.50.xxx.110)

    좋은글 감사합니다

  • 17. 여름
    '24.7.21 4:46 PM (219.241.xxx.46)

    장한 어머님 얘기 정말 가슴 뭉클해집니다. 어머니 건강하게 오래사셨으면 좋겠어요. 감동적인 글 잘 읽었습니다

  • 18. 부모
    '24.7.21 4:46 PM (14.36.xxx.79)

    제목이 ‘부모’ 인 노래가 떠올라요

    낙엽이 우수수 떨어지던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두우~ 울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옛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날에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아흔 엄마와 나란히 누워
    아직 총기 성성한 엄마의 옛이야기 듣는 풍경
    눈으로 보고 있는 듯 정겨워요
    부럽습니다

  • 19. ..
    '24.7.21 4:47 PM (39.118.xxx.133) - 삭제된댓글

    제가 자랄때 엄마는 한없이 따뜻하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승질(?)이 보통이 아니었어요.
    그렇게 안하면 기강이 안잡혔겠지요.
    아버지는 오빠들한텐 점잖은 아버지였지만 저한텐 다정한 아버지였어요.
    그리고 아버지의 삶도 참 독특한데 부단한 독서와 사색으로 아버지 말년엔 스스로 진보의 가치를 깨우치셨거든요.
    갑작스런 병으로 60대중반에 돌아가셨지만 많은 분들이 그후 오랫동안 제 아버지를 그리워하고 존경했어요.
    곡물과 채소들은 농부의 발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말을 들을때 새벽녘 청량한 공기속에 밭으로 걸어가던 아버지의 모습이 떠올라요.

  • 20. 하이탑
    '24.7.21 4:49 PM (1.235.xxx.173)

    너무 조은 글입니다, 계속 올려주세요~

  • 21. ㅡㅡㅡㅡ
    '24.7.21 4:57 PM (61.98.xxx.233) - 삭제된댓글

    존경스러운 부모심이십니다.

  • 22. ..
    '24.7.21 4:58 PM (39.118.xxx.133)

    읽으신 분들도 있겠지만 제가 전에 올렸던 엄마 이야기입니다.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3779609

  • 23. ㅇㅇ
    '24.7.21 5:01 PM (58.29.xxx.148)

    좋은 부모님 밑에서 잘자라신 원글님 행복한 인생이시네요

    노모의 옛이야기를 잘 들어드리는게 최고의 효도같아요
    지나고 보니 진짜 그렇더라구요

  • 24. 세상에
    '24.7.21 5:02 PM (121.166.xxx.251)

    30리길을 맨발로 걷고
    고된 밭일에 두부까지 직접 만들고 밤새 베까지 짜시다니요
    무학이신 분들이 자식 다섯을 다 대학 보내시다니 참으로 대단하십니다
    고단하고 팍팍한 삶에 지쳐 자식들 구박하고 진학포기시키고 끌어앉히는 부모 많잖아요
    존경스러운 부모님이시네요

  • 25. 1 1 1
    '24.7.21 5:08 PM (175.210.xxx.15)

    마음이 푸근해집니다 자식들 잘 키워내려 애쓰신 부모님의 노고가 그대로 느껴지내요 부모님의 모습에 저도 배우고 갑니다

  • 26. 어머
    '24.7.21 5:18 PM (218.50.xxx.110)

    링크 글 처음 보는데 뭉클해요.
    건강하시길...

  • 27. 뭉클하네요
    '24.7.21 9:19 PM (182.210.xxx.178)

    저런 어머니가 계신 원글님 복이 많으시네요.

  • 28. ㅅㅅ
    '24.7.21 9:35 PM (211.58.xxx.62)

    어머니가 정정하시고 행복한 기억을 풀어내시는것을 보니 긍정적인 성격이신분이신가봅니다.

  • 29.
    '24.7.21 9:51 PM (119.196.xxx.139)

    저는 이 글을 읽고 왜 눈물이 나죠?
    저의 뭘 건드렸길래...

  • 30. ..
    '24.7.21 10:12 PM (39.118.xxx.133)

    직접 농사 지은 쌀을 한톨도 먹지않으면서 악착같이 사모았던 논과 밭은 한때는 꽤 넓고 풍족했는데 막내인 제가 대학을 졸업할 무렵엔 한평도 남지 않았어요.
    부모님의 뼈와 영혼을 갈아 장만한 논밭을 자식들의 가방끈과 바꾼거죠.
    그 자식들은 부모님의 바람대로 농사꾼이 되지 않고 도시 화이트칼라 직장인이 되었지만 고단한 삶인건 다르지 않네요. 그 무엇도 되지 못한 것 같기도 하구요
    그냥 좀 쓸쓸합니다.

  • 31. ..
    '24.7.22 12:04 AM (112.146.xxx.207)

    백 씨 성을 쓰시던 어떤 농부님이 생각납니다.
    훅 그 분이 아버님이실지…

    그 분이라면, 존경받으셨다는 얘기가 수긍이 돼요.
    세상을 밝힌 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아니라 해도
    원글님, 이렇게 글 쓸 줄 아는 딸을 키우신 것으로 부모님은 뭔가를 남기신 거라고 전하고 싶어요.
    그리고 원글님은 이미 ‘누군가’이십니다. 글을 계속 써 주세요. 글 쓰는 업을 가졌든 아니든…

  • 32. ...
    '24.7.22 11:27 AM (211.234.xxx.191)

    좋은글 감사합니다 어머님 건강하시길요

  • 33. 수필
    '24.7.22 11:59 AM (39.125.xxx.74)

    제가 좋아하는 문체의 글이예요

  • 34. ..
    '24.7.22 12:25 PM (220.87.xxx.112)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어머니 오래오래 건강하시기를 바랍니다

  • 35. 마른여자
    '24.12.17 9:02 PM (117.110.xxx.203)

    좋은글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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