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에 살고 있는데)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몇 년 전부터 근처 커뮤니티 칼리지에서 문예창작을 공부하더니 같이 수업 들은 사람들끼리 단편 소설을 모아서 출판을 하고, 또 자신이 활동하는 동호회에서 두번째 책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해요.
친구의 단편 내용이 너무 좋아서 한국어로 번역해서 주변에 소개하고 싶었는데,
소설 내용이 미국의 남부 기독교와 그 문화에 대한 노출이나 이해가 없으면 왜 좋은지를 모를거 같아서 한국어로 번역해도 제대로 그 의미를 살려 낼 자신이 없어지더라고요.
(플래너리 오카너의 글들과 느낌이 비슷한 듯 하기도)
한국으로 치자면,
나이 든 할머니가 아들이 입다 버린 구멍난 난닝구를 입고 손부채로 손주 자는 곁을 지키는 모습을 작가가 묘사 했을때 그걸 번역할 때 구멍난 난닝구에 대한 묘사만으로 그 느낌을 다 살려낼 수 없을 거 같은 그런 느낌?
뜬금없지만,
미국과 소련의 냉전시대에 미국에서 출판된 공상과학 소설들이 한국에는 번역이 되지 않다가 한참 지나고 나서야 번역이 되어 읽게 되는데 그 책들이 처음 나왔을 때 읽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안타까워 하면서 동시에 어차피 그 책들이 처음 나온 시절엔 한국에서 그 책을 읽으면서 공감을 할 수 있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이 몇이나 되었을까 생각도 많이 했어요. 그 시절에 AFKN으로 미국 방송 보던 사람들이라면 좀 나았겠고요.
미국에서 60-80년대에 돈을 벌었던 베이비부머들의 차고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것을 들어 보자면,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라는 노란색 표지의 잡지들과, 인사이클로피디아 브리태니카 등이 있을거고,
그 세대 사람들에겐 노먼 롹엘이 최고의 아티스트이고...
뭐 그런 사회적인 공감대같은 거,
한국어로 번역했을 때 그 느낌을 살릴 자신이 없어요. 야구카드 모으는 것에 대한 감성도...
암튼,
친구가 저에게도 자신이 들었던 수업을 권유했는데 친구가 쓴 글을 읽기 전에는 똘끼 충만한 글 하나 정도는 나도 쓸 수 있을거 같다 생각했다가, 친구의 글을 읽은 다음엔... 나는 이렇게 잘 쓸 자신이 없다. 역시 나는 독자로 사는 것이 제일 편하구나 생각했어요.
번역 잘못 한 책들 흉 보는거 진짜 많이 했는데 언제부터인가 막무가내 불평보다는 나라면 이걸 어떻게 번역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