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은 5학년때 같은 반의 반장이었다. 평범한 동네에서 이층집에 살고 몹시 젊고 예쁜 엄마를
가진 말간 얼굴을 한 남자아이였다.
그 집 마당에는 목련이 있어서 봄에는 언제나 흰 목련꽃이 피었다. 집에서 학교가는 길에
언제나 그 집앞을 지나야 해서 나는 학교 다니는 내내 여고생이 되고 대학생이 되어도
그 집의 목련을 보며 다녔다.
4월이 되어 약속을 지키듯 어느 봄날 목련이 피면 잘 지내나. 친구를 떠올리곤 했다.
친구는 차갑고 쌀쌀했다. 어린 아이인데도 차갑고 쌀쌀했다. 쌀쌀했으므로 그 친구가
어쩌다 웃으면 아주 기뻤다. 친구인데도 어려웠다. 사람을 좀 어렵게 만드는 친구였다.
어려웠고 가깝지 않았다. 그래도 늘 눈길을 끌었다.
공부를 잘했고 집이 부자였다. 아버지는 차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음속으로 늘 동경했다.
5학년 어느날. 우리반의 회의록을 그 애가 집에 두고 와서 가지러 가야 했다. 나에게
같이 갈래. 해서 같이 갔다. 둘이서만 이야기를 해 본 적이 없어서 좀 두근거렸다.
학교에서 친구집은 가까웠다. 그래도 그 길을 갔다 오는 동안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갈 때는 차분하게 걸어갔지만 올 때는 웃으면서 뛰어왔다.
갑자기 가까워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그 뿐이었다.
다시 쌀쌀했고 여자친구들과는 별로 말하지 않았고 잘 웃지도 않았다.
6학년때도 같은 반이었다. 6학년 담임은 나쁜 사람이어서 나는 그해 많이 힘들었다.
나쁜 담임은 그 친구에게는 나쁘게 하지 않았다. 1년은 더디게 흘러갔다.
크리스마스가 가까워졌을 때 교실에서 우리끼리 학예발표회같은 걸 했다.
친구는 그 때도 반장이어서 교단에 나와서 등대지기를 불렀다.
얼어붙은 달 그림자
등대지기는 음악책에 나오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들은 이후에는 어른이 될 때까지
등대지기를 들으면 그 친구 생각이 났다
6학년 그 친구가 손을 뒤로 하고 몸을 조금씩 흔들흔들하면서 부르던 그 등대지기.
6학년을 마치는 날. 우리가 영영 헤어지고 이제 만나지 않게 되는 날. 복도를 지나가는데
그 친구가 나를 불렀다. 향기나는 볼펜세트를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주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쌀쌀맞게 그냥 건네주고 갔다.
중학교에 가면 이제 연필을 쓰지 않는다고 했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는 볼펜을
쓸 만큼 자란 모양이었다. 향기나는 볼펜 세트는 나에게만 준 것은 아니었다.
학급임원인 여학생 다섯명 모두에게 주었다.
나는 그 볼펜을 소중하게 썼다. 희안하게도 쓸 때마다 향기가 나는 볼펜이었다.
중학교의 교실에서 나는 그 볼펜을 썼다. 한동안, 오랫동안 생각했다.
그리고 고등학생이 된 어느 날, 자율학습을 마친 늦은 밤의 버스에서 만났다.
거의 잊고 있었기 때문에 버스에서 내리려고 할 때 눈이 마주쳤는지 처음에는
알아 보지 못했다. 마중나온 친구의 아버지를 보고서야 알아챘다.
친구가 웃었고 나는 좀 부끄럽고 당황했다.
친구의 아버지는 친구의 가방을 받아주시고 두 사람은 목련이 있는 그 집을 향해 걸어갔다.
나는 떨어져서 천천히 걸어갔다.
목련나무가 있는 집을 지나며 가끔 다시 생각이 났다.
다시 만난 건 대학교 1학년의 봄. 경주였다. 막 대학에 간 아이들, 사회생활을 시작한
친구들이 동창회라고 만났다. 그 애 집 담 안쪽에 목련이 피는 4월이었다.
어른이 되었지만 여전히 쓸쓸한 얼굴을 하고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어릴 때와 비슷하게
대하기 어려운 친구가 그 곳에 왔다.
2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