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주의 창시자 마르크스가 5월5일 태어났군요.
마르크스에 대해 별 관심이 없어 몰랐는데 그의 인생을 보니 과연 좌파들이 추종할 사람 맞네요.
놀랍게도 임종석, 조국 등 586들과 김남국 등 최근 인간들, 좌파도 아닌 얼치기 좌파 이재명 등 수많은 좌측 인간들의 살아온 길, 추구하는 바가 완전 데칼코마니!
그들이 자본주의 타도를 외치면서도 자본주의에 빨대꽂고 자본주의식 방식(주식, 부동산,코인 등)으로 돈벌며 호위호식하는게 하나도 안 이상하네요.
마르크스의 삶을 따라가는것이었어요...
(페이스북 전집현)
<어린이날인 5월5일 탄생한 부르조아적 삶 추종형 인간: 공산주의 아버지 마르크스 >
ㅡ 마르크스의 사생활과 그가 추구하는 반(反) 자본주의 사상은 정반대의 방향으로 ‘분열’ ㅡ
그는 자본가 계급에 대한 증오로 똘똘 뭉쳐 있으면서도
귀족과 자본가 같은 사치스러운 소비생활을 동경하며 평생 가족과 친구들의 골수를 빼먹고 살았다
1. 젊었을 때부터 방탕한 생활
마르크스(1818~1883)가 유대인 부르주아(아버지가 변호사) 집안에서 태어난 그는 어릴때부터 방탕한 생활을 했다.
그는 베를린대학교에 다니면서 한 해에 700탈러나 되는 돈을 탕진하며 아버지의 등골을 빨았다.
베를린의 고위 관료의 1년 평균 수입이 800탈러였고, 부잣집의 돈 잘 쓰는 한량도 1년에 500탈러 이상을 쓰는 일은 드물었던 시절이었다.
아버지가 대학생 시절의 마르크스에게 "돈 좀 덜 쓰면 안 되겠냐"는 편지까지 쓴 적이 있다.
물론 마르크스는 무시하고 계속 돈 부쳐 달라고만 답장을 썼다.
2. 아내와 자녀는 최고 부르조아지 삶을 살게 하다
그는 모든 자본가와 귀족을 적으로 돌렸지만 1843년(25살)에 결혼한 부인(예니 폰 베스트팔렌)이 독일 귀족(남작)의 딸임을 몹시 자랑스러워했다.
남작의 딸이 가사일을 할 수 있나며 굶어 죽어도 집에 가정부를 두었다.
그는 자식을 여섯명을 두었으며, 밥은 못먹여도 비싼 발레교습과 피아노교육을 시켰다.
종종 온가족이 예쁘게 차려입고 소풍을 가며, 새옷을 장만하여 장기간 휴가를 떠났다.
집안의 가구를 수시로 바꾸었으며 자주 친한 사람들을 불러 파티를 했다고 한다.
마르크스는 부인에게 ‘상류 계급’ 사람들에게 어울리는 방식으로 살게 해 주지 못했다고 생각하고
자녀들만은 프롤레타리아 계층이 아닌 상류계급과 어울릴 수 있도록 노력했다.
딸들이 적당한 구혼자들을 주위에 끌어들이려면 무도회 드레스, 댄스 교습을 비롯해 돈으로 살 수 있는 기타 사교적 장치들이 필요했는데,
그로서는 분수에 넘치는 소비라서 다른 사람들에게 돈을 무한정 구걸해야 했다.
3. 사치와 향락을 위해 친구의 등골을 빼먹다
실제 마르크스의 수입(주로 신문사 기고)은 당시의 영국 중류계급 수준이상이었으나,
허영을 버리지 못해 과다 지출로 인한 생활고를 겪었던 것이다.
그나마 부인이라도 금전 관념이 있었다면 집안 경제상황이 최악은 아니었을 것이나 그의 부인도 남편처럼 사치스러웠다.
결국 마르크스 가족의 구원자는 유럽 대륙을 떠돌던 시절 파리에서 만난 평생의 든든한 물주친우, 엥겔스였다.
엥겔스는 직물회사 ‘에르멘 & 엥겔스’의 멘체스터 지사로 취직해 20년간 회사의 현금 상자나 계좌에서 교활하게 돈을 빼돌려 마르크스의 생활을 부조했다.
그럼에도 마르크스는 돈을 헤프게 써서 파산에 이르기까지 사치와 향락의 파티는 이어졌고
이를 위해 아버지 유산을 다 팔고 돈이 없자 부인이 물려받은 유산(주로 예술품)까지도 다 팔아버렸다
그의 어머니와 누이까지 마르크스의 연대보증으로 인해 힘들게 살았다고 한다.
4. 유산을 탐하며 친척이 죽기를 바랬다
마르크스는 아내의 삼촌과 장모 사망, 어머니 사망, 친구의 사망으로 얻은 유산으로 보다 넓은 집으로 이사했다.
집세가 연간 65파운드로 넓은 정원, 매혹적인 온실, 딸마다 자기 방을 가질 만한 넓은 실내 공간을 갖추고 있었다.
공원을 내려다보는 2층에는 마르크스의 서재가 될 널찍한 방이 있었다.
그는 새 집에 비싼 가구를 들이고 아이들에게는 애완동물을 떼거지(개 세 마리, 고양이 두 마리, 새 두 마리)로 사다 주고, 해변으로 가족 모두가 3주 동안 여행을 떠났다.
이러니 거대한 유산도 마르크스 부부의 방탕한 생활에 금새 녹아내렸다.
(1) 1855년 아내의 삼촌 사망 : 100파운드 챙김
1855년 봄에 마르크스는 아내의 삼촌이 사망하자 환희에 넘쳤다.
그는 이 노인의 재산을 상속받기를 오랫동안 고대하며 노인을 ‘상속 훼방꾼’이라 수년간 지칭했다.
유산 중 아내의 몫 100파운드가 그해 연말에 도착했다.
(2) 1863년 어머니의 죽음 : 100파운드 챙김
마르크스의 어머니 헨리에테 마르크스가 향년 75세로 사망했다.
유산을 상속 받아야 했으므로 독일 트리어로 돌아가 장례식에 참석해야만 했다.
그동안 여러 채무를 청산하고 나니 100파운드 정도만이 손에 남았다.
(3) 1864년 맹우 빌헬름 볼프 사망 : 820파운드 챙김
독일에서 공산주의 활동에 동참했던 맹우 빌헬름 볼프가 1864년에 그에게 많은 돈을 남기고 사망했다.
마르크스에게 820파운드라는 거액의 돈이 상속되었다.(한화 2-3억 원의 가치)
(4) 1866년 장모님 사망: 120파운드 챙김
예니의 어머니인 남작 부인도 사망해 120파운드의 유산을 받게 되었다.
아내가 친정어머니의 마지막 며칠 동안 병상을 지키기까지 했으므로 장모의 죽음에는 차마 기쁜 마음을 내색하지 못했다고 한다.
5. 그래도 말년에는 풍족한 생활
마르크스가 52세가 되던 1870년 여름, 그는 드디어 ‘경제적 안정’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엥겔스가 가족 사업인 ‘에르멘 & 엥겔스’의 지분을 에르멘 형제 가운데 한 사람에게 팔았던 것이다.
그는 이 돈으로 ‘궁핍한’ 친구 마르크스에게 1년에 350파운드의 종신 연금을 선물해주었다!
현재 한국 돈 가치로는 적어도 매년 1억 2,000만 원에 해당하는 수입이었다.
또한 그는 자본주의의 최대의 상징인 주식으로 돈을 벌어 살림에 보탰다.
그는 주식 투자가 ‘적(자본가 계급)으로부터 돈을 우려내는’ 일이라고 합리화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철도회사와 철강회사 주식을 사서 2주만에 4000파운드라는 상당한 거액을 벌어들였다고 한다.
이후 마르크스는 1883년에 죽을 때까지 경제적으로 유복한 생활을 누렸다.
마르크스보다 오래 산 엘레아노르와 라우라의 두 딸은 아버지의 사후에 각각 자살했다.
맏딸 라우라는 1911년에 66세로 파리 외곽에서 남편 폴 라파르그와 함께 ‘더 이상 살 이유가 없어서’ 자살했는데, 주로 엥겔스의 돈에 기생해 생계를 유지했다.
6. 불륜으로 낳은 자식을 버리다
마르크스는 아내가 돈을 구하려고 고향에 간 사이에 가정부와 부적절한 관계를 통해서 ‘프리드리히 데무트’란 아들을 낳았다.
근데 막스는 끝내 자신의 아들로 끝내 인정하지 않았고 아무런 책임도 지질 않았었다.
이 아이를 처리하는 데 엥겔스가 도움을 줬다. 엥겔스가 그 아이는 사실 내 아이라고 둘러대주고 자신의 세례명인 프리드리히를 쓰도록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