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후 김활란은 자신의 적극적인 친일행적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 없이, 타고난 활동가답게 활발하게 움직였다. 1945년 9월 백낙준, 정인보 등과 함께 미군정의 조선교육심의회 자문위원으로 일하였다. 1945년 12월 신탁통치 국면을 맞아하여 독립촉성부인회를 만들어 신탁통치반대운동을 하였다. 김활란은 이화여전을 종합대학으로 승격시키기 위해 노력하였고 이화여전은 1946년 8월에 종합대학이 되었다. 김활란은 1948년 제헌의회 선거인 5·10선거에 서대문구 후보로 출마하였으나 낙마하였다. 1948년 9월 파리에서 개최된 국제연합총회에 파견되어 한국에 대한 유엔승인을 얻기 위해 노력하였다. 김활란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직후 공보실장에 임명되어 3개월간 활동하였다. 공보실장에서 물러난 후 김활란은 민간외교단체인 전시홍보외교동맹(戰時弘報外交同盟)을 만들어서 홍보활동을 하였다, 김활란은 이화여전 졸업생들을 모아 위문단을 조직하여 부산 인근에 주둔한 군부대를 찾아 다니며 위문활동을 하였다. 김활란은 임시수도 부산에서 거처로 쓰던 ‘필승각’에서 육해공군의 장성과 민간인 대표를 위한 파티를 열었으며 유엔군의 휴양처와 같이 사용하였다. 또한 홍보활동의 일환으로 필승각에 소규모 박물관을 만들어 홍보활동에 사용하였다. 김활란은 『코리아타임스』(The Korea Times)라는 영자신문을 발행하여 민간홍보외교 활동을 하였다. 1951년에는 전시홍보외교동맹의 주선으로 유엔본부를 방문하여 유엔총회 의장과 사무총장을 만났으며, 미국 대통령 트루먼(Harry Shippe Truman)을 만나 한국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하였다. 김활란의 외교 활동은 전쟁 후에도 이어졌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 김활란은 유엔총회에 한국대표로 참여하여 한국의 유엔가입을 위한 활동을 하였다. 한국전쟁 후 김활란은 유네스코(UNESC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가입을 정부에 적극 권유하였고 1962년에서 1966년 유네스코 한국대표로 활동하였다. 전쟁 중 임시 수도 부산에서 김활란은 이화여자대학을 열어 1951년 9월에 개학식을 하였고 대학원을 신설하였다. 1961년 5·16쿠데타 후 정부는 「교육에 관한 임시 특례법」에 따라 60세 이상이 된 사람들을 공직에서 물러나도록 하면서 당시 62세였던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총장직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퇴임 후 김활란은 이화여대의 재단이사장과 명예총장직을 맡아 학교일을 계속하였다.
출처: 국사편찬위원회 (정부기관)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n400600&code=kc_ag...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