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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의 12월과 크리스마스

1987 조회수 : 1,456
작성일 : 2023-12-23 12:12:11

1987년의 12월은 제게 설렘이었어요.

그 당시 국민학교 4학년이었던 저는 우리집 강아지 보다도 못한 존재였어요.

사업가 아빠는 언제나 부재중이었어요. 차가웠던 집만큼이나 더 쌩한 새엄마라는 여자와 그 여자의 딸에게 저는 언제나 귀찮고 성가신 존재였어요.

옆 집에 저보다 3살 많은 피비케이츠 닮은 언니가 살았는데 그 언니네 부모님도 이혼해 언니는 고모와 살고 있었어요. 바하 인벤션, 모짜르트, 쇼팽 야상곡과 에띄드를 스와니강 치듯이 치는 언니, 구디 막대핀과 구디방울이 철제 덴마크 쿠키통에 가득 있던 언니, 미국에 있는 엄마아빠와 전화로만 만날 수 있는 언니.

소설 속에 나올법한 이쁘고 고상한 이름을 가진 언니도 외롭고 심심했는지 

집에만 오면 저를 데리고 다녔어요.

미국에서 보내온 옷으로 저를 꾸며주기도 하고, 머리모양도 이리저리 바꾸어 주고, 또 어떤 날은 공부를 가르쳐 주기도 하고, 피아노를 가르쳐주기도 하고요.

그림도 그리고, 분홍 존슨즈로션을 얼굴과 손에 발라주기도 하고...

 

12월 10일 경 부터는 보낼 곳도 없는 크리스마스 카드를 잔뜩 만들어 댔어요. 반짝이풀과 색상지, 색종이, 싸인펜, 색연필, 크레파스 등으로 요렇게, 조렇게 예쁘고 정성스럽게... 봉투에는 크리스마스씰도 미리 붙여놓구요. 집 밖에만 나서면 어디서든 캐롤이 들리고 작은 구멍가게에는 싸구려 크리스마스 장식이라도 하나씩 붙어 있었어요. 문방구에는 크리스마스카드와 카드, 장식품을 만들기 재료들이 가득했어요.

교보문고, 동방플라자 같은 곳은 중앙 가장 넓은 곳에 카드 판매대가 자리했구요. 큰 트리도 있었어요.

 

설렛어요.

12월 내내 붕 떠있는 것처럼요. 크리스마스에는 짠!하고 괜히 좋은 일이 생길 것 같았어요.

내게 일어날 좋은 일이라고는 5살때 헤어진 친엄마와 같이 사는 일 밖에는 없었는데, 혹시 산타할아버지한테 선물 대신 엄마랑 살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산타의 존재가 거짓이라는 걸 알면서도요. 그렇게 정성스럽게 만든 카드는 옆집 언니와 친구들, 선생님에게만 주고 가족에게는 주지 못했어요.

피비케이츠를 꼭 닮은 언니가 없었다면

그때의 12월은 그렇게 설레지 않았을 것 같아요.

왜냐면 1987년 12월 만큼 설레는 크리스마스는 더 이상 없었어요.

누구라도 이리 오라고 손짓하면 쭈뼛거리며 다가가는 유기견처럼 저는 옆집 언니에게 다가 갔어요.

부모없이 외로웠던 작은 아이 둘이서 그렇게 12월을 지냈어요. 

 

언니는  봄이 오자 갑자기 옆 집에서 사라졌고, 

저는 6학년 때부터 친엄마와 살게 되었어요.

2023년의 크리스마스는 길에 들리는 캐롤도 없고,

반짝이 풀로 덕지덕지 만든 카드도 없고, 크리스마스 씰도 없네요.

마치 항상 벌을 받고 있는 기분으로 살았던 초등학교 시절이었지만, 4학년 때의 설렛던 12월로 돌아갈래? 하면

망설임 없이 그 언니를 만나러 돌아갈거에요.

 

 

 

 

 

 

IP : 58.142.xxx.18
1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
    '23.12.23 12:19 PM (114.200.xxx.129)

    한편의 소설같아요....ㅠㅠ 그언니 진짜 한번 만나보고 싶겠어요...87년도의 크리스마스는 제기억속에는 없네요.. 저는 90년초반부터 크리스마스들이 기억이 나는데 꼬맹이였던 시절의 크리스마스는 기억이 잘 안나요..

  • 2. ..
    '23.12.23 12:22 PM (106.101.xxx.218)

    동화같은 이야기네요..
    그런 행복한 추억 한 페이지로 그 언니도 원글님도 평안하시기를 바랍니다

  • 3. ...
    '23.12.23 12:30 PM (112.171.xxx.25) - 삭제된댓글

    4학년 당시의 일을 정말 잘 기억하시네요
    표현력과 감수성이 대단하십니다
    구디 막대핀
    어릴때 보살핌 못받고 가난하게자라
    80년대 후반 고등 되서도 갖고싶고
    부러웠던 기억이 나네요

  • 4. ..
    '23.12.23 12:46 PM (61.253.xxx.240)

    4학년 당시의 일을 정말 잘 기억하시네요
    표현력과 감수성이 대단222

    좋은글 따듯하게 잘 읽었습니다

  • 5. ...
    '23.12.23 1:14 PM (222.239.xxx.231)

    반짝이는 카드처럼 따뜻한 크리스마스 풍경이 느껴지네요

  • 6. ㄴㄷ
    '23.12.23 2:44 PM (118.220.xxx.61)

    글을 잘 쓰시넹.
    삼성프라자 시청에 있었던 동방프라자
    아니었나요?
    예전엔 문방구에서 재료사다가
    카드 만들었죠.
    반짝이 붙히고 금.은종이 오려서요.
    전 그때 대1이었는데
    여고동창의 남사친친구들이랑
    호프집에서 신닌게 놀았었어요.
    어린시절 그 언니분도 어디선가
    잘 사시겠죠.

  • 7. ...
    '23.12.23 3:08 PM (58.142.xxx.18) - 삭제된댓글

    아 맞아요 그 때는 동방플라자였어요.
    자주색 건물이었던 삼성생명 지하요

  • 8. ...
    '23.12.23 3:17 PM (58.142.xxx.18) - 삭제된댓글

    아 맞아요 그 때는 동방플라자였어요.
    자주색 건물이었던 삼성생명 건물 지하...
    동방플라자를 참 좋아했었어요.

  • 9. ...
    '23.12.23 3:28 PM (58.142.xxx.18)

    아 맞아요 그 때는 동방프라자였어요.
    자주색 건물이었던 삼성생명 건물 지하...
    동방프라자를 참 좋아했었어요.

  • 10. ......
    '23.12.24 3:24 AM (70.175.xxx.60)

    단편 소설같아요^^
    행복한 크리스마스 보내세요

  • 11. ....
    '23.12.24 7:08 AM (58.142.xxx.18)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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