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학년때 담임선생님은 중년의 남자선생님
교사로서 책임을 다하시는 좋은 분이셨는데
엄격하셔서 대하기가 어려웠다
최선을 다하고 열심히 살라고 가르치셨고
선생님 자신도 그렇게 사셨다
교사다운 분이셨는데 나는 선생님이 좀 어려웠다
아직 학기초였는데 어느날 선생님이 숙제로
1부터 1000까지 적어오라고 시키셨다
나는 그걸 100정도로 이해하고 집에 갔다
그러니까 그날 나는 일찍 숙제를 시작해야 했는데
보통때와 같이 했다
집에 가서 먼저 놀기부터 했고
해가 져서 저녁을 먹었고 저녁먹은 후 7시쯤일까
그때 숙제를 시작했다
그것이 100까지가 아니었고
1000까지라는 걸 그제서야 알아차린 것이었다
밤이 깊어가기 시작했다
1-100은 쉬웠다 익숙했으니까
그러나 다시 101-200까지
다시 201-300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나는 이걸 해낼 수 없다는 걸 빨리 알아챘고
숙제를 안하고 학교에 간다는 부담감에 괴로워
울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 써내려 가고 싶지 않았다
301-400까지 가는게 너무 고통스러웠다
대체 이 숙제의 의미가 무엇인지 몰랐다
가족들은 나를 달래며 밤이 늦었으니 자라고 했다
고통스러워하며 자버렸다
내가 못할 분량이라고 생각되었다
나는 1000까지 쓸 수 없어
그러면 좀 늦게 자고 완성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이라도
더 쓰던지 아침에라도 더 써서 가면 되는데
나는 완성하지 못한다에만 집중해서
어차피 1000까지 못 쓰면 완성하지 못한 것임으로
440 이든 600이든 같은 거라고 생각했다
숙제를 하지 않고 가는 것은 처음이었다
고통스러워하며 등교했다
너무 너무 무거운 마음으로 학교에 갔다
선생님의 무서운 얼굴보다 선생님을 실망시키는 것과
너는 숙제도 안하고 오는 그런 아이구나 하고 선생님께
인식되는 것이 괴로웠다 이 두 가지가 괴로웠다
교실엔 60명 정도가 있었는데 100까지도 적어오지
않은 애들부터 20 0정도 적은 애 300 적은 애 다양했는데
결론부터 말하면 다 적은 애는 딱 한 명이었다
이은정
여학생
반장
은정이는 밤까지 500 정도 적고 새벽에 일어나 800 정도까지 적고 아침밥 먹으며 또 적어서 1000을
완성해왔다 노트가 찬란했다 밤에 적은 숫자와 새벽에
숫자 아침에 적은 숫자가 다 달랐다 커졌다가 작아졌다가 연필심이 두꺼워졌다 얇아지며 숫자들을 1000을 향해 꾸준히 나아갔다. 노트에 숫자가 가득 찼다. 그리고 드디어 1000. 어린 손가락이
너덜너덜했다 새벽에 적었다고? 어린이도 새벽에
일어나도 되는 거야?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새벽이라는
시간을 알지 못했다 그저 은정이가 너무 대단했다
은정이는 원래 몹시 뛰어났지만 그렇게 뛰어날 줄은
정말 몰랐다 그런데 나는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도 막 적어나가는 아이들이
있었지만 어쨌거나 1000을 완성할 수 없으므로
나는 숙제를 안 한 것이 될 테니까 그렇게 적어 나가는 게
의미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고 보면 이후에도 나는 쭉
그렇게 살았다 포기 쪽이 훨씬 편하고 포기가 쉬웠다
심지어 달콤하기까지 했다
그날 선생님은 몸살이 나서 결근을 하셨다
이럴 수가
우리는 기뻐 날뛰었다 하지만 다음날 선생님이 오셨을 때
역시 1000까지 다 적어온 학생은 첫날과 같이 은정이
하나 뿐이었다 하루가 더 주어졌지만 그 많은 양에 질린 채
모두들 다 포기해버린 것이었다 나 역시 그랬다
전날의 처절한 기억을 가졌지만 어차피
401-500까지 501-600 까지의 그 지겹고 고통스러운
과정을 견딜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포기가 달콤했다
나는 그 숙제를 끝내 하지 못했다
우리 반 전체가 하지 못했고 은정이만 했다
내내 그런 식으로 살았다 고통스러우면 피해갔다
새벽에 일어나 눈을 비비며 손가락이 뭉개지도록
쓰지 않았다 뜨는 해를 바라보며 1000을 완성하고
연필을 내려놓는 그 쾌감이 어떤 것 인지를 당연히
알지 못한 채 어른이 되었고
어른이 되어서도 내내 그렇게 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