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생각많게 하는 글 읽고 제 인생도 돌아보네요.
금칠 수저는 태어나서 중학교까지는 당시 제 또래들보다 월등하게 잘사는 집이었길래 쓴 표현이구요...
잘나가던 아버지 사업이 서서히 기울다가 마지막 투자사업에서 부도나면서 거의 길거리 나앉게 되면서 그야말로 흙수저가 되었길래 금칠 수저라 썼구요...
당시에 드믄 마당넓은 백여평짜리 이층 단독주택에서 아빠의 초기 사업이 외제차 수입업이셔서 지금도 못타는 캐딜락차를 운전기사까지 두고 타고 다녔어요..
아빠와 우리 가족이 기사모는 그 차 타고 지나가면 교통경찰이 경례를 할 정도(아마 주기적으로 용돈을 준 듯)
오빠, 저, 남동생 세명 다 넓은 마당에서 강아지들과 뛰어다니며 즐겁게 놀았고 이층 서재에는 아빠가 전집으로 사준 동화책들이 가득 차 있어서 도서관에 갈 필요도 없이 일하는 언니가 만들어주는 간식먹으며 책읽기 내기 하며 지냈죠...
이 떄 읽은 책들이 우리 형제들의 공부의 원천이 되긴했어요.
아빠는 부도로 그거 해결하러 지방이랑 다니시면서 우리 형제들은 그야말로 산동네 단칸방에서 돈버는 거는 절대 못하는 우아한 사모님이었던 엄마와 함께 고난의 세월이 시작되었죠.
늘 반장만 하던 제가 하루아침에 망했다는 걸 알 리 없는 선생님들은 월사금을 못내는 제가 반항심으로 그런다고 홧병으로 드러누워 꼼짝 못하는 엄마 모셔오라고 혼내셨고....그래도 모범생에 자존심이 남아있는터라 정말로 반항하고 삐뚤어지고 싶은 마음을 겨우 추스리고 참고서 하나 없이 죽어라 공부했죠..
더 힘이 되었던건 고등학교 막 진학한 손위 오빠가 오기였는지 더 죽어라 공부해서 부동의 전교1등을 넘어서서 전국권이었기에 저도 함께 저절로 공부를 안할 수 없었다는....
여간 그 시절은 공부만 잘하면 흙수저가 개천에서도 용이 될 수 있었던 시절이라 3형제가 정말 눈물나게 힘든 가난속에서도 공부 잘하면 된다는 신념으로 살았던거 같아요..
아빠는 계속된 사업실패로 거의 폐인이 되다싶이 해서 제가 고등학교2학년때 간암으로 돌아가셨고 부자 망하면 3년이라고 엄마가 금붙이랑 패물 팔아 겨우겨우 입에 풀칠하던 것도 더이상은 팔거도 없게 되었고....
오빠야 워낙 공부를 월등하게 잘했고 장남이라 어떻게 해서든 아빠도 돌아기시기 전까지 먼친척에게 구걸하다 싶히 해서 대학을(것도 등록금 싼 서울대니) 보냈었지만 딸인 저는 친가 친척들부터 외가쪽까지 아빠도 없는데 돈은 누가 버냐고 다들 고등학교 졸업하고 은행직원으로 취직시켜서 오빠랑 밑에 남동생 뒷바라지하라고...
이때 놀랍게도 우리 엄마가 절대 안된다고..공부도 잘하는 애를 여자라는 이유로 그렇게는 못한다고...
엄마가 그 연세분들과는 달리 인탤리였던지라 영어도 일본어도 잘하셨어요(해방후에 대학입학까지 한 분이라..사정생겨 바로 중퇴..)
엄마가 저희 방학때 일본에 가셔서 외삼촌이 운영하는 큰 음식점에서 일하고 그 돈으로 저를 대학 입학시켰어요..그후엔 외삼촌이 주기적으로 도와주셨고...
말이 대학생이었지 3형제 다 대학들어가서는 사립대 반도 안되는 수업료지만 벌려고 죽어라 학점따서(그나마 서울대라 장학금제도가 엄청 좋았던 행운이...)장학금 받고 아픈 엄마를 대신해서 과외공부 같은 아르바이트로 생활비도 벌어야 했어요. 대학 재학시절 가입했던 서클에서 가는 MT를 돈 만원 회비가 없어서 못갔으니(그 친구들은 다 제가 집안이 엄해서 자고 오는 MT안간걸로 알아요)...
여간 그동안은 고생은 생략하고 대학졸업후 오빠는 소위 말하는 고시패스해서 전문직하고 있고 저는 정부연구기관 들어가서 주경야독 석박사해서 연구실장까지 올라갔고 남동생도 고생은 했지만 막내라 그나마 평탄하게 박사따서 교수하고 있으니 다들 무척 평탄한 중산층 삶을 누리고 있습니다.
전혀 재미는 없는 그런 삶이지만 중고등, 대학교때와는 상상도 안되는 강남의 아파트. 좋은 차, 콘도 회원권, 그리고 역시 전문직인 남편과의 미국 유학 생활이나 세미나나 국제대회 참석차 나간 유럽 출장같은 경험들과 추억이 행복함으로 남아있구요..
가끔 그 시절에 엄마가 고집세우지 않고 친척들 말마따나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은행원으로 시작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하니 지금은 돌아가신 엄마가 무척 감사하고 고맙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