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씨는 남편이 살아생전 즐겨 찾고 좋아하던 외갓집 동네에 남편을 묻었다. 쓰러지기 직전 마지막으로 함께 거닐던 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진 곳이 아니라 남편도 좋아할 것이라 믿는다는 김씨는 남편을 떠나보낸 슬픔 때문에 하루하루 견디기 힘들고 마음 아프다고 했다.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남편이 배가 출출하다고 해 차를 세우고 슈퍼에서 초콜릿을 사가지고 나오는데 군밤장사가 눈에 띄었어요. 저도 배가 고파 군밤을 좀 많이 샀어요. 운전석 옆자리에 앉은 남편이 군밤을 까면서 ‘따뜻한 것은 몇 개 안 되고 식은 게 많다’면서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는다고 했어요. 둘 다 배가 고파 제대로 껍질을 벗기지 않은 밤을 허겁지겁 먹었어요. 밤을 먹은 지 20분쯤 후에 갑자기 속이 안 좋다며 토하고 싶다고 말하더라고요. 급하게 먹은 밤이 체한 줄 알았는데 피를 토하는 거예요. 깜짝 놀랐죠. 그것을 보는 순간 남편이 의자 뒤로 몸을 기대더니 제 손을 찾더라고요. 이미 마음속으로 (죽음을) 예상했는지 눈을 감고 ‘윤 굿바이… 윤 굿바이…’ 하면서요.”
‘윤’은 결혼 후 30년 동안 줄곧 ‘여보, 당신’ 대신 아내 이름 중간 글자를 따 부르던 호칭이었다.
“피를 토하자 저도 당황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남편에게 연신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한시가 급해 빨리 병원으로 가려고 하는데 비도 오고 퇴근시간이라 올림픽대로가 엄청 막히더라고요. 비상등을 켠 채 유리창을 내리고 길을 비켜달라고 애원해도 단 한 대의 차도 비켜주지 않았어요. 몇십분을 도로에서 허둥대다 순간 119가 생각나 신고를 했더니 ‘위치가 어디냐, 남편의 상태는 어떠냐’고 물으며 급히 출동할 테니 꼼짝 말고 기다리라는 거예요.”
20여분 동안 구급차를 기다리다 “도로가 막혀 구급 출동이 늦어지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 차번호를 가르쳐주며 비상등을 켜고 한남대교로 진입해 서울대학병원으로 갈 테니 차를 발견하는 즉시 도와달라고 했다. 119에서는 “위급한 환자를 왜 멀리 있는 서울대학병원까지 데리고 가느냐”며 현재 위치에서 가장 가까운 병원인 강남성모병원 응급실로 가는 게 좋겠다고 해서, 김씨는 간이 나쁜 남편이 10여 년 전부터 진료를 받던 서울대학병원으로 가려던 마음을 바꿔 강남성모병원으로 향했다.
“길이 막혀 구급차가 끝내 내 차를 따라오지 못했고 제가 운전한 채로 강남성모병원 응급실에 간 겁니다. 그게 2월23일 저녁 7시쯤이었어요. 집에서 쓰러진 게 아닌데 신문이나 방송에는 집에서 쓰러진 것으로 보도가 되었더군요. 그게 그렇게 엄청난 루머의 시작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못해봤어요. 부음에 난 기사를 전해듣긴 했지만, 남편이 어디서 쓰러진 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어서 신경쓰지도 않았거든요. 상황이 이렇게 되고 보니 제가 119에 전화 걸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드네요. 신고내용과 통화기록이 남아 있어 확실한 증거가 될 수 있으니까요.”
서울소방본부 상황주임 최송섭씨는 2월23일 18시 1분, 3분, 18분 각각 세 차례에 걸쳐 김씨로부터 신고전화를 받았고, 한남대교와 가까운 강남소방소에 출동명령이 떨어졌으며 길이 막혀 출동이 늦어지자 구급대원이 김씨와 통화한 사실이 있음을 확인해 주었다.
죽음과 관련된 루머는 잘못된 부음기사 때문
피를 토한 후 1시간이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했을 때 남편은 출혈이 심해 혼자 일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내시경을 찍어보니 식도파열에 의한 출혈이었다. 출혈을 멈추게 하는 응급처치를 마치고 수혈하는 도중 또다시 혈관이 터져 출혈이 계속되었고 이씨는 차츰 의식을 잃어갔다. 병원에 옮긴 지 15시간 만인 24일 오전 8시10분 그는 자신이 그토록 아끼고 사랑하는 가족 곁을 떠났다.
“간이 나쁜 사람은 식도가 늘어지고 약해질 수 있다는 주의사항을 듣긴 했어도 평소 생활하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았고 특별히 음식을 가려먹지도 않았어요. 의사가 죽기 전에 뭘 먹었냐고 물어보더라고요. 점심때는 무엇을 먹었는지 물어보지 않아서 모르겠지만 피를 토하기 직전 군밤을 많이 먹었다고 했더니 딱딱한 군밤이 혈관파열의 원인이 될 수도 있었다고 하더라고요.”
남편이 사오라고 시키지도 않았던 군밤을 사지 않았더라면, 도로가 막히지 않아 병원에 빨리 도착했더라면 남편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는 죄책감에 시달려 잠도 제대로 못 잔다는 김씨. 그녀는 남편의 죽음을 둘러싸고 도는 어처구니없는 루머가 남편의 죽음 못지않게 견디기 힘들다고 했다.
“남편은 가족만큼이나 방송을 사랑했어요. 평생 방송을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열의를 다하더니 결국 쓰러지던 날까지도, 죽은 다음날까지도 (녹음이지만) 방송을 하게 되었네요. MBC 사장을 그만둔 직후에 1년여 동안 한국관광공사 사장으로 재직할 때 ‘방송 아닌 일을 해보니 방송계에 있을 때가 제일 행복했다’고 했습니다.”
방송에 남다른 애착을 보인 이씨는 지난해 10월부터 을 진행하며 더없이 행복해했다. MBC 사장 재직시절 직원들과 함께 밥을 먹으며 “이다음에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쉴 때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며 영원히 방송인으로 남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했지만 정작 의 진행을 맡아줄 것을 제의하자 자신이 사장으로 있던 회사에 혹시 누가 되지 않을까, 연출자가 하고 싶은 말도 못하고 불편해하지 않을까 망설이기도 했다고. 진행을 결정한 이후 회사관계자에게 자신의 이름 앞에 아무런 수식어 없이 그저 ‘이득렬씨’로 부르며 편하게 대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안방에 TV가 4대 있어요. 집에 들어오면 옷 갈아입기 전에 TV부터 켰어요. 4개 채널을 보면서 동시에 메모를 하며 모니터를 했죠. 오래된 습관이었어요. 13년 동안 뉴스데스크를 진행하면서 힘든 내색 한 번 하지 않았고요. 방송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이었어요.”
내성적인 이씨는 무척 가정적이었다. <9시 뉴스데스크>를 진행할 당시 집 앞 주차장에 도착하는 시간은 밤 10시30분 정도. 아내인 김씨는 졸린 시간이었지만 초긴장 상태로 방송을 마친 남편은 편안한 시간이라며 밖에서 “차 한잔 마시고 싶다”고 해 밤마다 예쁜 찻집을 찾아가 차를 마시기도 하고 호젓하게 드라이브를 즐기기도 했다.
중앙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 다니다 한양대학교로 편입한 이씨를 김씨가 처음 만난 곳은 학교 도서관. 두 사람은 한양대학교 영문과 선후배 사이였다. 편입해 1, 2학년 책이 없다는 이씨에게 책을 빌려주기도 했다. 졸업식 때 재학생 대표로 송사를 하라는 교수의 권유를 받은 김씨가 못하겠다고 했더니 이씨가 송사를 대신 써줄 테니 해보라고 권해 그것을 계기로 자주 만나게 되었고 결국 사랑하게 되었다. 학교에서는 누가 볼까봐 맘 편하게 손 한번 잡아보지 못했지만 김씨는 하늘 아래 남편보다 자신을 더 사랑해줄 남자가 없다고 믿고 6년여 동안의 연애기간을 거쳐 결혼했다. 결혼한 뒤에도 자상하고 부드러움을 잃지 않는 남편이었다.
“남편은 아주 작은 일에도 고마워하고 행복을 느꼈어요. 비 오는 날 차를 타고 가다가도 ‘비를 피할 수 있는 자동차가 있어 참 행복하다’고 말할 정도니까요. 근래에는 ‘아들은 자기 앞길 가릴 정도로 장성했고 딸은 착한 신랑에게 시집보냈으니 더 이상 바랄 게 없을 정도로 행복하다’는 말을 자주 했죠.”
단 한번도 아이들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지 않았을 만큼 다정다감한 아버지이기도 했다. 아침밥을 준비하면서 늦잠 자는 아이들 깨워달라고 부탁하면 살며시 웃으며 “나는 애들에게 인심 잃기 싫어요”라고 농담하곤 했단다.
“남편은 식당에 가면 종업원에게 좀 많다 싶을 정도로 팁을 주곤 했어요. 그래서 ‘우리 형편에 맞게 주는 게 좋지 않겠냐’고 싫은 내색을 했더니 ‘우리 딸하고 비슷한 나이에 식당에서 힘들게 일하지 않느냐’는 말을 하는 사람이었죠. 이런 일도 있었어요. 비가 억수로 쏟아지는 밤에 차를 타고 가는데 어느 부부가 아이를 안고 길가에서 허둥대고 있는 곳을 지나쳤어요. 그런데 아무래도 아이가 아픈 것 같다며 되돌아가자는 거예요. 보통 사람 같으면 망설이다 말았을 텐데 남편은 병원까지 데려다주고 나서야 마음을 놓더라고요. 내 남편이라서가 아니라 참 좋은 사람이었어요.”
모 여자 방송인과의 헛소문으로 살아생전 마음고생 심해
불쌍한 사람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다는 이씨는 동물 사랑도 유난했다. 방송가에 동물애호가로 널리 알려진 이씨는 말 못하는 동물을 사람 못지않게 사랑해 집 잃은 개나 주인에게 버림받은 동물을 돌봐주는 곳에 후원금을 보내기도 했다. 개 도와줄 돈 있으면 사람을 도와주는 게 좋지 않겠냐고 말하는 사람이 있었지만 웃음으로 받아넘기는 남편이었다.
“개밥을 줄 때도 그냥 주지 않고 대화를 해요. ‘넌 이담에 말할 줄 아는 사람으로 태어나거라. 네가 배가 아플 때도 있을 텐데 말을 못하니 내가 알 수가 없다’는 말을 하면서 쓰다듬어줬어요. TV에서 동물학대 뉴스가 나오면 재빨리 채널을 돌려요. 불쌍해서 볼 수가 없다는 겁니다. 그렇게 마음 여리고 착한 남편인데, 살아생전에도 오랫동안 몹쓸 루머에 시달려 마음고생 심하게 했잖아요. 결국 소문의 아이가 친아버지가 누군지 밝혀져 누명을 벗기는 했지만 정말 떠올리기조차 싫은 일이었어요.”
이씨 생전에 있었던 루머는 지난해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MBC 아나운서 출신 B씨와 관련된 것이었다. B씨의 아들이 전남편 아들이 아니라 방송계 유력 인사의 아들이라는 것 때문에 이혼하게 되었는데 친아버지가 이득렬 전 MBC 사장이라는 소문이었다. 항간에 떠도는 소문을 기사화한 미주통일신문 발행인 배모씨를 B씨가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면서 사건은 더욱 확대됐다. B씨 측은 친자확인소송을 통해 전남편의 아들임을 밝혀냈고, 배씨는 B씨의 명예훼손죄로 징역 1년의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악성 루머는 끝을 맺었다.
“제 친구를 통해 소문을 들었어요. 그 얘길 처음 들을 때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렸어요. 다행히 B씨가 재판을 통해 친아버지를 밝혀내기는 했지만 그동안 우리 부부가 겪은 마음고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어요.”
일년 내내 루머에 시달릴 때도 김씨는 남편에게 “이런 소문이 떠돈다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한번도 따져묻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남편을 믿었고 가장 괴롭고 마음 불편한 사람은 자신보다 남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끈질기게 소문이 따라다녔지만 꿈속에서조차 남편을 의심하지 않았어요. 남편은 시간이 지나면 진실은 밝혀지기 마련이라고 하더군요. ‘B씨의 전남편이 죽고 없다면 정말 큰일이지만 그와 그 아이가 살아 있는데 무슨 걱정이냐’고 하더군요. 말은 그렇게 해도 남편 마음이 얼마나 힘들었겠어요. 마음 같아서는 B씨 전남편이 빨리 유전자 감식에 응해줬으면 하고 바랐지만 그것도 빨리 이뤄지지 않았잖아요. 그 고통의 시간이 일년여 동안 계속되었으니 속이 탔죠.”
B씨의 재판이 빨리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소문이 끈질기게 따라다니자 김씨는 “우리가 이미 딸을 결혼시켜 사돈도 있고 아들 결혼도 시켜야 되는데 이런 소문에 휩싸이면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으니 대처를 해야겠다”고 남편을 설득했고, 그제서야 이씨는 평소 잘 알고 있는 변호사를 찾아가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지금은 아무 대응도 하지 말고 B씨의 재판 결과를 지켜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라는 답을 듣고 그저 묵묵히 소문을 견뎌냈다고.
“루머가 한창 떠돌 때 남편에게 어느 여기자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어~이, 나하고 전화하지 말어. 나하고 전화하면 아이 낳는대. 빨리 전화 끊어’ 그러더라고요. 농담으로 건넨 말이었지만 그 말을 듣는 제 마음이 무척 아팠어요. 언젠가 봉두완씨 부부와 함께 식사하는데 ‘이 사람 어디 숨겨놓은 아들이 있다면서요?’라고 봉두완씨가 웃으며 묻더라고요. 그래서 ‘젊고 예쁜 여자하고 소문이 나서 영광이에요’라고 제가 대답했더니, 옆에 있던 남편이 ‘내가 손목이나 한번 잡아보고 이런 소문 나면 손목 잡은 대가 참 크다고 할 텐데 그러지도 못하고 아들 낳았다는 소문에 휩싸였다’며 웃더라고요.”
남편의 죽음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아 유품도 채 정리하지 못했다는 김씨. 그는 살아생전 몹쓸 루머에 시달린 남편이 혼수상태에 빠지자 “모함 없는 세상에 가서 편히 사세요. 살면서 잘해주지 못해 미안해요”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건넸다고 한다.
김씨는 “‘남편이 죽은 다음이니까 좋은 점만 얘기하겠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내 남편 이득렬이란 사람은 연애시절부터 30년 결혼생활 동안 세상에 둘도 없을 만큼 좋은 남편이자 아버지였어요”라며 남편의 죽음과 관련된 악성 루머가 하루 빨리 사라졌으면 좋겠다는 간절한 바람을 눈물로 호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