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3월12일은 한국 정치사에서 잊을 수 없는 하루다. 제17대 총선을 불과 한 달 앞두고 단행된 대통령 탄핵, 임기 종료를 앞둔 16대 국회의원들이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시도했다. 의회의 힘을 믿고 대통령 권력을 바꿔보려는 시도, 결과는 어땠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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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12일 의회 주변 공기는 무거웠다. 결과는 예정돼 있었다. 의석수 차이가 월등히 나는 관계로, 당시에는 국회 선진화법도 없었기에, 의원들의 충돌(몸싸움 포함) 결과는 뻔했다. 열린우리당 의석으로는 한나라당과 새천년민주당의 합동작전을 막기 역부족이었다. 당시 열린우리당은 새천년민주당에서 갈라져 나온 소수 의석의 미니 여당이었다. 민주당은 한나라당과 함께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주도했다.
당시 민주당은 정치적인 텃밭인 광주와 전북에서 전패했다. 전남에서만 지역구 당선자 5명을 배출했다. 주인공은 이상열 의원(목포), 김효석 의원(담양·곡성·장성), 이정일 의원(해남·진도), 한화갑 의원(무안·신안) 그리고 이낙연 의원(함평·영광)이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 대변인을 지냈고 문재인 대통령 초대 국무총리를 지낸 인물, 2004년 3월 ‘격랑의 여의도’ 그 시절 그의 당적은 민주당이었다. 이낙연 당시 의원은 열린우리당 분당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당 잔류를 선택했지만 정치적인 노선은 참여정부와 큰 차이가 없었다.
민주당 참패 흐름 속에서 이낙연 의원이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노무현 대통령 탄핵 표결에서 반대표를 던졌던 인물은 2명이었는데 그중 한 명이 정치인 이낙연이었다. 당적은 민주당이었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시도하던 지도부에 저항한 대표적인 정치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