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
“현재의 의료대응체계는 환자 발생 속도에 비해 유효 병상의 확보와 효율적인 환자 배정 속도가 약간씩 못 미쳐 수요와 공급 간의 균형이 뒤처지는 상황이다.”
“많은 분들이 (거리 두기) 3단계의 의미를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다. 3단계를 보면, 제조업 분야도 일정 부분 멈추는 것이 포함돼 있다. 그런 것을 모르는 채 단순하게 식당의 취식을 금지하면서 테이크아웃만 하는 수준으로 생각하는 분들이 많다. 확진자 수가 많이 늘어났으니 3단계로 가야 된다는 기계적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는 독일 철학자 하이데거의 말은 곱씹을수록 명언이다. 지난 20일 박능후 보건복지부 장관(코로나19 대응 중앙재난안전대책본부 1차장)의 브리핑이 증거다. 박 장관의 ‘언어’는 코로나19 3차 대유행 국면에서 정부의 현실 인식, 그리고 시민을 바라보는 관점을 드러낸다.
확진자가 매일 1000명 안팎으로 증가하고 있다. 최근 1주일간 사망자는 81명에 이른다. 끝내 병원 문턱도 밟지 못한 채 숨진 사람이 여럿이다. 수도권에서 하루 이상 병상을 기다리는 자택 대기자도 354명(21일 0시 기준)이나 된다. 그런데 복지부 장관은 태연히 ‘수요와 공급’의 불균형일 뿐이라고 한다. 자택 대기자의 불안과 공포는 ‘수요’ 문제로, 의료진과 일선 공무원의 애타는 심정은 ‘공급’ 문제로 치환된다.
3단계 상향 관련 발언은 더 심각하다. 박 장관에 따르면 3단계 상향을 요구하는 시민과 전문가는 “의미를 모르고” “단순하게 식당 취식 금지 수준으로 생각해” “기계적”으로 “설득력 없는” 주장을 하는 사람이 된다.
지난달 1일로 돌아가보자. 정부는 거리 두기 개편안을 발표하며 “기존에는 시설별 여건이 제대로 고려되지 않았다. 방역조치를 맞춤형으로 재설계해 효과를 제고하려는 것”(정세균 국무총리)이라고 설명했다. 그러곤 50일 만에 ‘3단계는 일부 제조업도 멈추는 것이니 시행할 수 없다’고 한다. ‘맞춤형 재설계’는 그냥 해본 이야기였나. 3단계(하루 신규 확진자 800~1000명) 갈 일 없으리라 여기고 기준을 두루뭉술 만들었다가 당황한 건가. 정부가 설정한 기준을 시민이 ‘지키겠다’고 나서자, 정부가 시민의 무지를 탓하며 ‘훈계하는’ 형국이라니. 규제 강화에 시민들이 시위로 맞서는 외국에서 보면 해외토픽감일 터다. 정부의 오만이 도를 넘었다.
제조업이 멈추는 게 문제라고 치자. 그러면 식당·술집 내 취식 금지 등 시급한 조치부터 시행하고, 제조업 관련 조치는 재정비하면 된다. 몸(감염병 위기)에다 옷(방역조치)을 맞춰야지, 옷에다 몸을 맞추라고 해선 곤란하다. 지금 국민이 원하는 건 “기계적 3단계”가 아니라 방역을 실효적으로 강화하는 일이다. “강원도와 제주도에 빈방이 없다고 한다. 개탄스러운 모습”(17일 정 총리)이라며 시민을 탓한다고 현실이 나아질 리 없다. 오죽하면 서울시·경기도·인천시가 자체적으로 5인 이상 집합금지 명령을 내렸겠나.
정부는 정직해져야 한다. 지금 제조업이 멈추는 게 두려운가, 아니면 “팬데믹 발생 이래 최초의 소프트 록다운(soft lockdown)”(영국 일간 가디언)으로 가는 게 겁나는가. 바꿔 묻는다. 정부의 목표는 시민의 희생을 단 한 명이라도 더 줄이는 데 있나, 아니면 ‘K방역’ 신화를 지키는 데 있나.
지난 5월 K방역을 긍정 평가하는 칼럼을 썼다. 말미에 “공공병상과 중환자병상을 늘리고, 과중한 노동에 시달리는 의사·간호사 인력을 확충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비전문가지만, 수많은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전한 이야기여서다. 겨울이 오기까지 시간이 있었다. 정부는 병상·인력 확충에 소홀했다. ‘아프면 쉬라’면서도 유급병가나 상병수당은 도입하지 않았다. 거리 두기의 실효성을 높이려면 단계마다 피해 업종에 대한 보상·지원책이 따라야 한다는 권고 역시 외면했다. 뒤늦게 정부는 3차 재난지원금에 임대료 지원금을 포함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신화의 빛을 바래게 한 건 다른 누구도 아닌 정부다. 정부는 현실로 돌아와야 한다. 많은 시민이 목숨을 잃었거나, 잃을 위기에 처했다. 정부가 머뭇거릴수록 더 많은 시민의 생명이 위험해질 것이다. 시민이 3단계의 의미를 모른다고? 정부가 위기의 심각성을 모르는 거다. 21일자 일부 조간신문 1면에는 대규모 집단감염이 발생한 서울동부구치소에서 수용자들이 쇠창살 밖으로 수건을 흔들며 ‘살려달라’고 외치는 사진이 실렸다. 살려달라고 외치는 시민은 이들만이 아니다.
김민아 토요판팀 선임기자
https://news.v.daum.net/v/20201221210748279?fbclid=IwAR3ujMWETkfdnM5mOf-fHiSI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