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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누구나 비상구는 있죠.

안개꽃 조회수 : 2,876
작성일 : 2020-05-07 23:26:44

언제 밥한번 먹자,

라는 말이 들으나 마나 한 인사말이 되어버렸잖아요.

저란 사람이 너무도 고지식한 사람이다보니,

언제 밥 한번 먹자,라는 인사말을 진심으로 알아듣고

그날 우연찮게 만났던 상황과 목소리까지 생생하게

각인이 되어 진심으로 기다리고 연락도 해봤는데

열에 여덟은 기약없던 찰나에 지나지않던 해프닝이어서

이미 기억속에서 지워져가고 있던 중이었더라구요.


그러다가 어느날,

늦은밤 심야 토크쇼에서

한 개그맨이

언제 밥한번 먹자라는

말은 책임감없는 먼지같이 가벼운 인사니까

맘에 둘필요가 없다는 말을 하는거에요.

가끔, 그 누구도 해주지않는 말을

우연찮게 책에서 혹은 텔레비젼에서

만나게 되요.

그리고 예상치못했던 그 일들은,

꽤 오랫동안 또 맘속에 또렷하게 남아 잊혀지지않아요.


생각해보면, 늘 저는 쓸쓸하고 한가한 사람이었어요.

폭력적이고 알콜중독자로 평생을 살았던 아빠와,

늘 히스테릭했던 엄마의 기분은 팔색조처럼 변화무쌍하고

자식이 장대비를 맞고 돌아오든말든, 내일의 준비물을

걱정하느라 잠을 못이루거나, 학교에서 왕따처럼 홀로

지내고 있는 외로움에 대해선 전혀 헤아릴 아량을 갖추질 못했어요.


유년시절의 저는 지독히 가난하고 집에서나 학교에서나

부모에게서든, 선생님에게서든, 급우들에게서든,괄시받고 미움받으며 지냈고

가장 예뻤을 20대에는, 객지의 회사를 다니거나 혹은 퇴사하거나

30대에는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고 아기도 낳고

혹은 봄비가 세차게 오는 늦은밤, 택시를 타고 응급실에 달려가기도 하고

좁은 반지하방에서 분유를 사가지고 올 남편을 기다리기도 하고.

그런 남편이 점점 화를 내고, 제게 다정하게 대해주지 않으면서

아무도 몰래 눈물이 고일때,

빨래가 말라가듯이 그렇게 제 감정도 데면데면해지고

더 이상 남편에게 소소한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 지내요.

제가 제일 부러운 건,

아내에게 잘해주는 남편이 부러워요.

슬픔이 다가오면 나는 뒤로 한발,

기쁨이 다가오면 나는 앞으로 한발,

이렇게 조율하며 살면 된다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어릴때부터의 저는 부모님에게조차 괄시만 받고 지냈어요.

1년동안 지냈던 친척집에서도 저는 귀찮은 짐덩어리였어요,

주머니에 먼지밖에 없던 제 20대는 가난했고요,

기차를 타고 멀리 벚꽃도 보러갔지만 그 핑크빛 세상에서 가난한

제 방으로 돌아오는 날들이었어요.

30대는 사랑만으로도 충분할것 같은 결혼이

가난함과 기타 여러 여건으로 인해 제게 화를 내거나, 슬퍼하는

퇴색한 사랑의 민낯을 보게 되었고요.

40대는 이제 사람을 믿지않아서 그 어느 솔직한 말도 내놓을수없는

친구한명 만들어놓지않은 사람이에요.

그러기까지 밥한번 먹자라는 말을 진심 기다렸던 때를 여러번 놓치고

실망하고 난뒤의 일들이죠.

그 유년시절처럼 저는 외롭고 한가한 날들이에요.

그러나 제게는 절 바라보는 아이가 있어요,

그 아이는 쓸쓸한 저를 이해하더라구요.

가만히 다가와 제 등에 기대고 앉은 아이의 작은 체온이 많은 위안이

되거든요.

분명 뭔지는 모르지만, 제게도 좋은 날 올거라고 믿어요.


IP : 121.184.xxx.244
24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누군가에게
    '20.5.7 11:30 PM (112.166.xxx.65)

    나중애 밥 한번 먹자~~ 라고
    인사보다도 가볍게 말할 때
    다시한번 생각해봐야겠네요.
    정말 밥 먹을 생각은 1%도 없는 말인데.. ㅜㅜ

  • 2. 그래도
    '20.5.7 11:35 PM (182.224.xxx.120)

    원글님은 저같은 사람보다는 부자예요
    자식이 알아주고 보듬어 주잖아요.
    전 진짜 아무도 없어요. ㅠ.ㅠ

  • 3. ...
    '20.5.7 11:38 PM (211.205.xxx.216)

    제목에끌려들어왔는데 너무도 공감이되네요
    제가느끼고있는 감정 느낌 생각. 모든게비슷해요
    좋은날이 .빛나는 순간이.
    제게도 과연 올까요?
    마음의 모든무거운짐.다내려놓을수있는순간이.
    죽기전에 올까요.
    외롭고 괴롭고 무겁습니다

  • 4. ...
    '20.5.7 11:44 PM (220.75.xxx.108)

    원글님 등뒤에 기댄 그 작은 아이에겐 원글님이 비상구가 아닐까요? 글을 읽으니 원글님은 끝까지 꿋꿋이 버텨서 태산같은 엄마가 되어주실 분 같아서 제가 안심이 됩니다.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 5. 원글
    '20.5.7 11:55 PM (121.184.xxx.244)

    저도 제가 은근히 강하다는 것 알아요,^^
    살면서 일이 잘 안풀리고 힘들때면
    스텝이 좀 엉켰을 뿐이라고,
    리듬만 좀 타면 되지,
    슬로우퀵퀵,하고,
    이렇게 속으로 생각하거든요.
    그리고 퇴계이황도 몰락한 권질의 딸과 결혼했는데
    어려운일을 겪고, 사람이 모자라서
    제삿날 올릴 배를 치마속에 감춘것을 오히려
    손수 깍아주면서 맛있게 먹으라고 했다잖아요,
    그런 사람이 저를 본다면 어떤 말을 해줄까 생각해봤어요,
    꽃에 물을 주라고 했을까요^^

  • 6.
    '20.5.8 12:04 AM (175.192.xxx.170)

    밥 한번 먹을까요? 한끼 같이 하고 싶네요.

  • 7. 원글님
    '20.5.8 12:07 AM (119.70.xxx.47)

    글을 참 곱게 잘 쓰시네요.
    비상구는 비상 시에 나가는 곳이잖아요
    지금 비상시도 아니고 원글님 잘 살고 계신것 같아요
    화이팅입니다

  • 8. ...
    '20.5.8 12:10 AM (58.148.xxx.122)

    이렇게 마음을 울리는 글을 쓰는 사람이
    본인은 쓸쓸해하시니
    원글님께 빚을 진 기분이네요.

  • 9. ..
    '20.5.8 12:11 AM (220.118.xxx.5)

    윈글님 글에서 희망이 보여요. 왠지 좋을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요.

  • 10. 와우
    '20.5.8 12:14 AM (122.37.xxx.67)

    어쩜.... 맑고 아프기도하지만 참 아름다운 글이네요
    블로그해보세요 독자할께요~^^

  • 11. ...
    '20.5.8 12:22 AM (221.151.xxx.109) - 삭제된댓글

    사랑하는 아이가 원글님 곁에 항상 있잖아요
    그 아이에게 늘 따뜻하고 소중한 엄마신데요
    원글님의 글을 읽고 이 글이 떠올랐어요...

    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1334179&page=7&searchType=search&search1=1&keys=내 인생의 형용사

  • 12. ...
    '20.5.8 12:23 AM (221.151.xxx.109)

    사랑하는 아이가 원글님 곁에 항상 있잖아요
    그 아이에게 늘 따뜻하고 소중한 엄마신데요
    원글님의 글을 읽고 이 글이 떠올랐어요...

    https://www.82cook.com/entiz/read.php?bn=15&num=1334179&page=7&searchType=sear... 인생의 형용사

  • 13. 아름다운 글
    '20.5.8 12:27 AM (58.148.xxx.79)

    진짜 밥한번 먹으면서
    이야기 나누고 싶네요 !

  • 14. ....
    '20.5.8 12:37 AM (58.238.xxx.221)

    물흐르듯 글을 잘 쓰시네요.
    저와도 매우 비슷한점이 많아서 끌리기도 하구요..
    저도 주변에 힘들단 말을 안하니 외유내강으로 보더군요.
    속으론 썩어문드러져도 말안하니까요. 혼자 끙끙 앓아도....
    원래 징징대는 스타일도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가끔은 옆에 있는 사람에게 살포시.. 힘들다고 말할 사람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일상을 같이 하는 누군가에게...

  • 15. 쓸개코
    '20.5.8 1:05 AM (121.163.xxx.198)

    이렇게 좋은 글을 못읽고 지나칠 뻔..
    쓸쓸하게 시작되었지만 마지막엔 그래도 행복이 보이는군요.
    솜씨없는 댓글이어도 인사는 드리고 싶어요.
    원글님 잘 읽었어요. 고맙고요.

  • 16. 눈물 핑
    '20.5.8 1:07 AM (87.236.xxx.2)

    글을 정말 말갛게 잘 쓰시네요.
    읽으면서 글쓴 님의 마음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았고,
    언젠가 느꼈을 저의 소소한 슬픔들이 하나 둘 되살아나는
    듯했어요.
    원글님의 남은 하루하루가 따스함과 기쁨으로 가득하기를
    응원합니다!!

  • 17. 흠....
    '20.5.8 1:22 AM (110.70.xxx.41)

    근데 스스로에 대한 감정을
    넘 우울한 색채로 선택하신거같아요.

    저도 우울하고 불행하기에 충분한 환경이었지요.
    제 어린시절도 빛과 그림자가 있었어요.

    그리고
    님이 누군가에게 밥 먹자 손 내밀고
    같이 밥 먹으심되죠.
    기다리지마시구...

    저는,
    언제 한번 밥 먹자! 내가 시간될때 연락할게!라고 말한
    여자한테 3번이나 같은 말을 들었고
    단 한번도 그 여자가 먼저 연락하거나
    밥 먹자고 한적이 없는 경험을 3번이나 반복해봤지만
    결코 우울하지 않던데요.

    그 여자를 delete시킨 건
    바로 나 자신이고
    그 여자의 인성을 판단하고 저울질해서
    버린 건 내가 주체적으로 한 일이니까요.

  • 18. ...
    '20.5.8 1:46 AM (58.234.xxx.21)

    원글님에게 좋은 날이 올거 같은데요 ㅎㅎ
    퇴계이황의 일화가 참 감동적이네요
    그 시대에도 저런 남자가 있었다니

  • 19. 이해못하는 주역들
    '20.5.8 2:47 AM (210.126.xxx.58)

    주변을 보면 나만 을 외롭고 힘들었을거라는 생각하고 그 범위에서 무엇이든 생각하고 곱씹어 보곤하죠
    한 친구를 만나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그렇게 서럽고 외롭고 불쌍할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그 언니를 알고 친구에 대해 이야기 들어보면 또 ... 그언니가
    그렇게 불쌍하고 외로운 존재가 되는경우도 있더라구요..

    각자는 힘들고 외로운겁니다만
    앞으로는 가슴에 있는 아이와 함께 행복할겁니다 .

  • 20. cinapi
    '20.5.8 4:42 AM (114.202.xxx.112)

    스승이 딸이 지적장애인인데 결혼했어요 스승이 엄청난 분이셨겠죠

  • 21. 그런
    '20.5.8 5:34 AM (39.125.xxx.203) - 삭제된댓글

    아비를 둔건 원죄같은 거에요.
    작년에 그런 아비가 세상을 떠났음에도
    여전히 꿈속에서 현실처럼 나타나
    밤새 뒤척이는 오늘같은 날들은
    여전히 남아있습니다.

    그런 아비를 둬서
    다르게 평가받고 싶지 않았던지라
    티 안내려고 애쓰고
    멀쩡한 직장 가지려고 더 애썼지요.
    유일하게 이해해주길 바랐던 남편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았고
    한편으로는 이해도 갑니다.
    나도 이렇게 싫은데....

    그렇지만
    그런 아비를 둔 건 내 잘못이 아닌걸요.
    다정하지 않은 남편을 고른건 내 책임이니
    감당할만큼이면 감수하고
    그 선을 넘으면 어떻게든 해야겠죠.

    아이 많이 예뻐해주세요.
    내가 못받은 사랑만큼 더요.
    애 어려서 저는 잘 못했는데
    마음의 폭풍이 가라앉고 나니
    그게 제 자신에게 가장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그리고 그깟 밥 한번,
    내가 나를 사주고 말져 뭐.

  • 22. 누구나
    '20.5.8 8:28 AM (122.36.xxx.95)

    암을 겪고 나서 저도 이 세상에 혼자고 외롭다고 느껴졌어요. 뭐 이젠 누구나 외로운 거라고 생각하며 살아요. 원글님 힘들게 사셨지만 이제 아이와 함께 행복하시길 바래요

  • 23. 폴링인82
    '20.5.8 8:41 AM (118.235.xxx.171) - 삭제된댓글

    원글님의 비상구 아이가 있음에 축하드리구요
    그리고 유년시절에 아픔은 놓아주세요
    조금만 조금만 더 밝아진다면
    홍진경이 생각났어요
    홍진경도 글솜씨가 좋고
    생각도 바르고
    그러나 차이는 외적으로 활달해보이고 쫌 과하긴 하죠
    내적 외적 괴리감이 심할 수록 아픈 것 같아요.
    본인의 이야기를 주제로 한 이런 수필도 좋지만
    자연과 벗 삼아 아이와 사진 찍으러 다니세요
    엄마의 쓸쓸함을 유산으로 물려주실 건 아니잖아요?
    아이와 친구하세요.
    밝고 재미난 친구가 되어주세요.
    아이가 비상구니까 아이 손잡고 이제 환한 세상으로 나오세요
    밝음이 전 좋아요
    원글님 이름이나 호를 발금으로 지어주고 싶어요
    선물이예요
    예쁜 글 읽게 해주셔서요

  • 24. ...
    '20.5.8 4:16 PM (218.147.xxx.79)

    글을 참 잘 쓰시네요.
    나중에도 또 읽고 싶어질것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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