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엔 고기를 못 먹었어요.. 소, 돼지, 닭 모두.
유일하게 닭의 간은 좋아해서 닭 한 마리에서 나오는 조그만 간 하나는 제 차지였습니다.
고소하고 부드럽게 입안에서 녹듯이 부서지는 식감도 좋았고 진한 특유의 향도 좋아했죠.
친구들은..
간은 좋아한다는 말을 하면 너 구미호니?
요즘은 판매 닭에는 간이 미포함이라
가끔 돼지 간이나 사 먹으며 입맛을 달랬는데 돼지 간은 좀 뻣뻣해서 닭의 그것이 그리웠습니다.
그러다가
인터넷에서 냉동 닭간을 파는 걸 알게 되었죠..
알고 보니 고양이 밥 제조를 위해.. 많이들 사는 거.
뭔가가 먹고 싶어지는 오후 5시
인터넷으로 냉동 닭간을 주문했습니다..
1킬로그램 단위는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그리고.. 드디어 물건이 도착했는데.
포장을 뜯자.
반쯤 녹은 그것이 보였습니다.
간은 피를 많이 갖고 있는 무른 조직
그것이 반쯤 해동되었으니..
선명한 핏빛의 비닐팩이 눈앞에 ,,,,
일단 뚜껑 덮고 밥부터 먹었습니다..
밥 할 기운이 없어서 휴교중인 딸에게 김치 볶음밥을 해달라고 요청했죠.
먹으면서도 핏빛의 간 생각.
도저히.. 저 물건을 맹물에 못 씻겠다. 그 생각뿐.
물과 함께 씻겨서 싱크대 배수구로 흘러내려가는 붉은 핏줄기..
상상만 해도 속이 메슥거렸습니다.
큰 냄비에 물을 가득. 월계수 잎도 넣고 정종도 넣고
물이 끓었습니다.그것들을 풍덩풍덩
붉은 액체는 갈색 거품으로 변해 부글부글 끓어올랐습니다..
겉이 대충 익은 그것들을 다른 윅으로 옮겼습니다
파프리카, 대파, 당근, 양파. 냉장고에 있는 채소들을 넣고
마늘도 듬뿍 넣고 맛술도 뿌렸습니다.
엄마가 해주셨던 닭볶음탕처럼 간장과 고춧가루와 깨소금 등등 갖은양념을 다 넣고
한참을 가열했습니다. (혹시라고 속이 안익었을까봐..ㄷㄷㄷ)
완성된 모양은 나쁘지 않았습니다.
이제 맛을 볼 차례인데...
아.. 안 땡긴다.
배가 불러서가 아니다.. 그냥 안 땡긴다.
고심끝에 냉장고 포도주를 꺼냈습니다.
접시에 그것 조금, 약 7~8개..
포도주 한 잔.
조금 떼어먹어보니 부드러운 식감은 어린 시절 먹었던 그 맛이 분명합니다..
분명
그러했습니다.
포도주도 한 모금.
포도주에서 피맛이 나는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과 열두 제자의 마지막 만찬도 아닌데
왜.. 피 맛이 나는 걸까요.
닭 한 마리과 같이 조리된 닭간 1개랑 비교해보면
백 마리의 닭의 간을 농축시킨 맛..1킬로그램의 달간의 맛은...............
백 배 정도 강했습니다.
그것을 먹고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영화 <옥자>가 꿈에 나왔습니다.
- 옥자는 아직 안 본 영화인데도.. . 옥자가 도축장에 끌려가는 장면이 여러 번 되풀이..ㄷㄷㄷ
아침에 계란말이를 했습니다. 한 개도 안(못) 먹었습니다. 계란을 마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피 냄새가 나는 듯했습니다..
돼지고기를 넣은 김치찌개도 통과.
마침 사다 놓은 연두부 한 팩을 얌전히 까먹고
출근하자마자 한 일은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 먹기.
남편이 출근길에 말하더군요.
어쩌면 넌.. 그런게 먹고싶냐. 난 살면서 한번도 닭의 간이 먹고싶다는 생각을 안 해봤다.
- 네, 저도 이제 그럴것같습니다.
당분간 채식주의자가 될 것 같습니다.
팀원들에게 오늘은 각자 먹자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