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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김어준

정말정말 조회수 : 2,337
작성일 : 2020-03-18 17:21:33

엄마


글 : 김어준 (인터넷신문 딴지일보 총수)


고등학생이 돼서야 알았다. 다른 집에선 계란 프라이를 그렇게 해서 먹는다는 것을. 어느 날 친구집에서 저녁을 먹는데 반찬으로 계란 프라이가 나왔다. 밥상머리에 앉은 사람의 수만큼 계란도 딱 세 개만 프라이되어 나온 것이다. 순간 ‘장난하나?’ 생각했다. 속으로 어이없어 하며 옆 친구에게 한마디 따지려는 순간, 환하게 웃으며 젓가락을 놀리는 친구의 옆모습을 보고 깨닫고 말았다. 남들은 그렇게 먹는다는 것을.


그때까지도 난 다른 집들도 계란 프라이를 했다 하면, 4인 가족 기준으로 한 판씩은 해서 먹는 줄 알았다. 우리 엄마는 손이 그렇게 컸다. 과자는 봉지가 아니라 박스 째로 사왔고, 콜라는 병콜라가 아니라 PET병 박스였으며, 삼계탕을 했다 하면 노란 찜통-그렇다, 냄비가 아니라 찜통이다-에 한꺼번에 닭을 열댓 마리는 삶아 식구들이 먹고, 친구들까지 불러 먹이고, 저녁에 동네 순찰을 도는 방범들까지 불러 먹이곤 했다.


엄마는 또 힘이 장사였다. 하룻밤 자고 나면 온 집안의 가구들이 완전 재배치되어 있는 일이 다반사였다. 가구 배치가 지겹거나 기분 전환이 필요하면 그 즉시 결정해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가구를 옮기기 시작했다.


이런 일이 잦으니 작은 책상이나 액자 따위를 살짝 옮겼나보다 생각하면 오산이다. 이사할 때나 옮기는 장롱이나 침대 같은 가구가 이 방에서 저 방으로 끌려 다녔으니까. 오줌이 마려워 부스스 일어났다가, 목에 수건을 두르고 목장갑을 낀 채 땀을 뻘뻘 흘리며 커다란 가구를 혼자 옮기고 있는 ‘잠옷바람의 아줌마가 연출하는 어스름한 새벽녘 퍼포먼스’의 기괴함은 목격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새벽 세 시 느닷없이 깨어진 후 팬티만 입은 채 장롱 한 면을 보듬어 안고 한 달 전 떠나왔던 바로 그 자리로 장롱을 네 번째 원상복귀 시킬 때 겪는 반수면 상태에서의 황당함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재수를 하고도 대학에 떨어진 후 난생 처음 화장실에 앉아 문을 걸어 잠그고 눈물을 훔치고 있을 때, 화장실 문짝을 아예 뜯어내고 들어온 것도 우리 엄마가 아니었다면 엄두도 못낼 파워풀한 액션이었다. 대학에 두 번씩이나 낙방하고 인생에 실패한 것처럼 좌절하여 화장실로 도피한 아들, 그 아들에게 할 말이 있자 엄마는 문짝을 부순 것이다. 문짝 부수는 아버지는 봤어도 엄마가 그랬다는 말은 그 전에도 그 후에도 듣지 못했다.


물리적 힘만이 아니었다. 한쪽 집안이 기운다며 결혼을 반대하는 친척 어른들을 향해 돈 때문에 사람 가슴에 못을 박으면 천벌을 받는다며 가족회의를 박차며 일어나던 엄마, 그렇게 언제나 당차고 씩씩하고 강철 같던 엄마가, 보육원에서 다섯 살짜리 소란이를 데려와 결혼까지 시킬 거라고 말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느 날 갑자기 뇌출혈로 쓰러졌다. 담당 의사는 깨어나도 식물인간이 될 거라 했지만 엄마는 그나마 반신마비에 언어장애자가 됐다.


아들은 이제 삼십 중반을 넘어섰고 마주 앉아 세상 사는 이야기를 할 만큼 철도 들었는데, 정작 엄마는 말을 못한다. 단 한 번도 성적표 보자는 말을 하지 않았고 단 한 번도 뭘 하지 말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며, 화장실 문짝을 뜯고 들어와서는 다음 번에 잘하면 된다는 위로 대신에, 그깟 대학이 뭔데 여기서 울고 있냐고, 내가 너를 그렇게 키우지 않았다며 내 가슴을 후려쳤던 엄마, 사실은 바로 그런 엄마 덕분에 정신적으로든 육체적으로든 그 어떤 종류의 콤플렉스로부터도 자유롭게 사는 오늘의 내가 있음을 문득 문득 깨닫는 나이가 되었는데, 이제 엄마는 말을 못한다.


우리 가족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엄마의 휠체어 앞에 엎드려 서럽게 울고 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사신 거냐' 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IP : 221.150.xxx.211
2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 1. 읽을
    '20.3.18 5:29 PM (163.152.xxx.8)

    때마다 감동해요

  • 2. ///
    '20.3.18 5:30 PM (119.194.xxx.125)

    훌륭한 어머님이시네요
    손 크다는 응팔 엄마 보는줄 ㅋㅋ

  • 3. 제일 찡한 부분
    '20.3.18 5:30 PM (211.107.xxx.182)

    그 부분이 제일 기억에 남는 부분이에.
    그 엄마 참 좋으신 분이네요.. .

  • 4. 열번도 더봤는데
    '20.3.18 5:31 PM (203.247.xxx.210)

    볼 때 마다 눈물 핑

  • 5. 어준 흥해라
    '20.3.18 5:33 PM (119.69.xxx.110)

    덕분에 잘 읽었어요
    어준총수는 거칠게 보이지만 여린 면도 있고 글솜씨도 좋군요
    남다른 엄마의 아들이어서 지금의 행보가 가능한가봅니다
    어준총수 응원합니다!!

  • 6. Zzz
    '20.3.18 5:34 PM (116.37.xxx.160) - 삭제된댓글

    햐~~ 내가 어준이 어머니 절반은 넘게 닮았네
    웃지나 웃기는지..

  • 7. ..
    '20.3.18 5:37 PM (211.36.xxx.181)

    저는 처음 보는 글이네요ㅠ
    올려주셔서 감사^^

  • 8. ㅣㅡ
    '20.3.18 5:38 PM (125.132.xxx.103) - 삭제된댓글

    글도 참 잘 써요.
    김용민이 쓴 김어준평전에서 읽었던 글이네요.
    건투를 빈다도 좋아요
    언뜻 쉽고 단순한듯 명쾌한 김어준의 혜안이 반짝이는 책이에요.

  • 9. 엄마 닮았네
    '20.3.18 5:41 PM (168.126.xxx.50)

    콧등이 시큰
    사람냄새나는 섬세한 대인배 김어준을 응원합니다

  • 10. ...
    '20.3.18 5:41 PM (175.117.xxx.166)

    그 엄마의 그아들 ㅎㅎ 아들이 태어나면 김어준같은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생각했었는데... 언젠가 저 글을 읽고 포기가 되었어요. 내 아들은 속좁고 예민한 내 닮겠구나 싶었어요 ㅋㅋ

  • 11. ...
    '20.3.18 5:43 PM (223.39.xxx.133)

    맞아요 세상 멋진엄마
    지금은 어떻게 지내실까요

  • 12. 저런
    '20.3.18 5:55 PM (1.216.xxx.37)

    분이셔서

    아들이 김 어 준 인가 봅니다

  • 13. 이런..
    '20.3.18 5:59 PM (110.47.xxx.104)

    그랬구나
    그런 엄마의 아들이었구나
    보면 볼수록 보물같은 사람
    이런 사람이 우리곁에 있어서 다행이다

  • 14. 부모님
    '20.3.18 6:03 PM (121.65.xxx.2) - 삭제된댓글

    두분다 편찮으시다고 하던데
    일도 하면서 아프신 부모님까지 부양하는 김어준씨 참 대단하네요.

  • 15. ..
    '20.3.18 6:04 PM (61.253.xxx.184)

    대단한 분이시네요.......

    사실 두번이나 대학에 떨어졌으면
    엄마도 얼마나 괴로울텐데...

  • 16. 나옹
    '20.3.18 6:12 PM (223.62.xxx.15)

    사람냄새가 나는 글이죠. 오랜만에 봐도 좋네요.

  • 17. ㅇㅇ
    '20.3.18 6:59 PM (223.33.xxx.120)

    김어준 보물이에요 동시대에 살아줘서 고맙고 그냥 좋아요 멋있고
    ^^

  • 18. ..
    '20.3.18 7:00 PM (124.50.xxx.91)

    몇번을 읽은 이야기인데도 또 눈물이 나네요..

    결혼한다고 말했을 때 누구냐가 아니라 언제하냐고 물으셨다는..

    정말 대단하신 분이세요..

  • 19. .....
    '20.3.18 7:47 PM (125.177.xxx.105)

    얼마전 김용민이 페이스북에 올린사진을 보면 김용민씨 아들이 김어준을 그렸더라구요
    그아이는 제일 존경하는 사람이 김어준이라고 했다는 말 몇년전에도 들었네요
    아이도 없고 조카도 없으니 김용민씨나 주진우 아이들을 남다르게 느낄것 같아요

  • 20. 김어준
    '20.3.18 9:19 PM (125.132.xxx.203)

    이 글을 더 많이 쓰면 좋겠어요.
    김어준이 쓴 글 더 읽고 싶네요.
    예전 나우누리 시절부터 좋아했는데.

  • 21. 울었네요
    '20.3.18 10:11 PM (199.66.xxx.95)

    우리 가족들 중 아무도 알지 못하는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병원으로 찾아와, 엄마의 휠체어 앞에 엎드려 서럽게 울고 가는 걸 보고 있노라면, '엄마는 도대체 어떻게 사신 거냐' 고 물어보고 싶은 게 너무나 많은데 말이다.
    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ㅡ

    정말 어떻게 살면 이렇게 살 수 있을까요?
    제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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