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9월 1일 아침
일본 역사상 최악의 재해인 관동 대지진이 발생했다
도쿄에서 무너진 목조 가옥만 4만여 채였고, 연와조 건물의 85퍼센트, 석조건물 84퍼센트, 철근 콘크리트 건물의 8퍼센트가 무너졌다.
1000만 관동 인구 가운데 이재민만 310만 명에 이르렀고, 14만 2000명 이상이 사망하고 3만 7000명이 실종되었다.
이와 같이 엄청난 피해를 입힌 관동대지진을 일본에서는 공식적으로 ‘간토대진재(大震災)’라 부른다.
지진으로 인한 재앙이 그만큼 심했다는 뜻이다.
1995년에 고베를 강타한 ‘한신대진재’가 발생하기 전까지 ‘대진재’는 관동대지진 단 하나뿐이었다.
도쿄는 5일 동안 불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그곳에 거주하고 있던 조선인들에게 전혀 예기치 못한 비극이 닥쳤다.
“조선인들이 폭동을 일으키고 있다”
도시의 기능은 완전히 마비되었고, 먹을 물과 식량은 부족했다. 부두는 파괴되고 도로는 끊겨 지원은 원활하지 않았다. 가족과 재산을 잃은 사람들은 예민해져 있었다. 누가 조금 건드리기만 해도 폭발할 것 같은 일촉즉발의 분위기였다. 민심이 요동치면서 정부를 향해 “물과 음식을 달라!”고 외치는 사람들의 원성은 더욱 높아져갔다. 그런 가운데 일본인들을 혹하게 만드는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혼돈 속에 유언비어가 퍼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긴 한데, 그 내용이 매우 고약했다. 후지 산이 폭발하고 쓰나미가 재발하는 등의 재앙이 관동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당한 불행을 남의 탓으로 돌림으로써 위안을 받으려는 군중심리의 전형이므로 이마저 전혀 없을 법한 일은 아니었다. 더욱이 조선인에 대한 차별 의식은 당시 일본인 대부분이 갖고 있었다. 피지배 식민지인인 조선인을 일컫는 ‘불령선인’이라는 말은 어린이들도 입에 달고 살 정도였다. 그곳에서 조선인은 ‘불온하고 불량한 존재’였다.
대지진 당일에 퍼진 유언비어의 골자는 형무소를 탈옥한 죄수들의 폭동, 사회주의자들의 불순 행동, 그리고 불령선인들의 폭동과 방화였다. 이 중 불령선인과 관련된 소문은 도쿄 전역에 폭탄을 투척하고, 일본인을 습격하며, 우물에 독약을 탔다는 것 등이었다. 사회주의자나 죄수와 관련한 유언비어는 그다음 날 연기처럼 사라졌다. 그러나 조선인과 관련한 소문들은 더욱 확대되었고 그 내용에도 더욱 ‘사실적’으로 살이 붙었다.
“일본말이 서툴면 베어버려라”
관동대지진 때 조선인 학살은 일본 민간인으로 구성된 ‘자경단’의 소행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계엄군의 학살도 엄연히 존재했다. 그런데 군대 스스로가 밝힌 살해 이유 대부분은 믿기 어려운 것으로 가득 찼다. “선인이 폭탄을 던졌기 때문에”, “교량을 파괴하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단도를 휘둘러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호송 중 도망가서” 등 대다수가 범죄행위를 했기 때문에 살해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당시 목격자들은 계엄군이 처음부터 살해 의지를 갖고 있었다고 증언했다.
자경단은 위급 상황 발생 시 각 마을의 재향군인과 청년 등을 중심으로 모여 주민과 시설을 보호하고, 재난을 수습하는 민간 자치기구였다. 대지진이 발생하자 도쿄 1593개, 가나가와 현 603개, 사이타마 현 300개 등 총 3689개의 자경단이 소집되었다. 불길을 잡고 주민을 보호하는 것이 자경단 본연의 임무지만 이때만은 달랐다. 그들은 오로지 조선인을 학살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었다.
재앙의 두려움, 가족과 재산을 잃은 분노를 부추긴 것은 다름 아닌 경찰이었다. 경찰은 자경단을 긴급 소집하면서 조선인을 주의하라고 일러주었다. 그리고 스스로를 보호하라고 총기를 지급하면서 조선인을 살해해도 좋다고 지시했다. “선인 300명 정도가 불을 붙여 들고 혼마키에 다가왔다. 물어보고 대답 없는 자는 선인으로 간주하고 죽여도 좋다.” “선인으로 보이면 살해해도 무방하다는 경찰부장의 통달이 왔다.” “선인 2000명이 오자키 방면에서 몰려오고 있는데 시민들은 무기를 들고 이들을 경계할 것이며 살해해도 무방하다.” 한 일본군 육군 소장은 “너희 젊은이들은 이것(일본의 장도)을 들고 경계하다가 조선인이라고 생각되면 단칼에 베어버려라.”
그러나 기다리던 조선인들은 몰려오지 않았다. 자경단은 경계를 풀었으나 불안을 해소하지 못했다. 그래서 조선인들을 직접 찾아내 처단하기로 작정하고, 색출 작업에 들어갔다. 헌데 일본인과 외양이 비슷한 조선인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그들은 경찰이 알려준 조선인 식별 자료를 숙지했다. 이 자료는 조선총독부가 만든 것이다. “키와 몸무게, 얼굴 모습은 내지인과 다르지 않지만 자세가 바르고 등이 굽은 자가 별로 없음. 모발이 부드럽고 적음. 머리카락이 아래를 향해 자라는 자가 많고 안면에 털이 적고 구레나룻이 드묾. 뒷머리는 목침을 사용하기 때문에 대체로 납작함.”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자경단은 나름대로 조선인을 식별하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동원했다.
경찰서 안에서조차 학살이 자행되었다. 각 경찰서 유치장에는 수상한 조선인으로 분류된 사람들이 수감 중이었다. 자경단은 경찰서를 포위하면서 조선인들을 내놓으라고 함성을 질렀다. 겁을 먹은 서장과 순사들은 도망쳐버렸고 유치장에서 끌려 나온 조선인들은 경찰서 마당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했다. 군마 현, 요리이 정, 가메이도, 혼조 등 많은 경찰서에서 비슷한 학살이 벌어졌다. 유치장에서 수용소로 조선인을 호송하는 경찰을 습격해 전부 몰살시키는 일도 발생했다.
죽음의 제전은 9월 2일부터 9월 5일 계엄군 사령관의 발표 때까지 나흘 동안 절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학살을 멈추라는 발표 이후에도 광기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한편 군경의 단속에 검거된 조선인들은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계엄군의 경계 덕분에 그곳에선 적어도 목숨만은 부지할 수 있었으므로, 수용소에 자발적으로 들어오는 조선인들이 많아졌다. 나라시노 수용소에 3200여 명, 메구로 수용소에 600여 명, 아오야마 수용소에 1800여 명, 가산마루 수용소에 700여 명이 수용되었다. 그러나 수용소 생활은 비참하기 짝이 없었다. 감시자들은 본보기를 보이기 위해 의심이 가는 조선인을 공개 처형했으며, 죽지 않을 만큼만 물과 음식을 주었다. 그들은 삼엄한 경비 속에 화재 복구를 위한 노역에 강제 동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