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살에 취미로 신촌에서 열리는 영화 강좌를 하나 들었어요.
그 강좌의 온라인 모임방이 있었는데
하루는 그 방에서 영화 번개를 쳤습니다.
그래서 퇴근 후에 광화문에 있는 극장으로 달려갔는데
막상 도착해보니 저랑 어떤 남자분 딱 둘이만 왔더라고요.
막판에 다들 못 오게 되었다고 번개를 취소했는데
그걸 우리 둘만 못 본 거지요.
해서, 그 남자분과 둘이서 영화를 봤어요.
무슨 영화였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예술 영화였지 싶어요.
영화를 보고 남자분이 맥주나 한잔 하자고 해서
제가 광화문에 있는 '가을'이란 맥주집에 데려갔습니다.
광화문에 있는 '가을' 기억하는 분들 계실것 같네요.
봄, 여름, 가을, 겨울 술집이 다 있었는데 저는 주로 가을만 갔어요.
거기 통기타 라이브 공연도 있고 맥주도 맛있고, 광화문 직장인들의 아지트였죠.
저는 홍대쪽에서 일했지만 술은 대부분 광화문에서 마셨어요.
그 분은 그 술집 분위기를 엄청 좋아하더군요.
나랑 동갑에 대학원에서 문화전공 석사를 하고 있었던가 그랬어요.
우리는 얼뜨기 예술영화 평을 해대며 즐겁게 대화를 나눴는데
남자분이 저한테 그러더라고요.
봄날은 간다에 나온 이영애 닮았다고..
그날 검은 모자달린 검은 떡볶이 자켓에 빨간 목도리를 한데다
헤어스타일도 봄날은 간다의 은수랑 비슷하긴 했어요.
어쨌든 기분은 좋더라고요.
그러고나서 그 다음주인가 그 남자분이 제 직장 앞으로 한번 더 찾아왔어요.
무슨 음악시디를 들고 와서 저녁을 사주겠다고 해서
같이 저녁을 먹었는데, 대뜸 사귀고 싶다고 말하더군요.
저는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했어요.
남자는 인상이 선하고 잘생긴편이었는데 내 눈엔 참 모범생 같아 보이더군요.
그때만 해도 아직 젊고 철이 없어서 좀 센 남자를 좋아했던것 같아요.
우물쭈물 하고 있는데 회사에서 전화가 와서는 그 밤에 급하게 회의를 한다고 들어오래서
결국 대답은 미루고 일어났죠.
그 뒤로 그 남자분은 몇 번 더 연락이 왔지만 어쨌든 더 이어지진 못하고 그냥 흐지부지되었어요.
어느 분이 이영애 리즈시절 이야기를 써 놓으셨길래 읽다가
문득 그해 겨울 생각이 났어요.
맞아, 나한테 이영애 닮았다고 한 남자가 있었지.
오래전 기억을 떠올리며 씨익 웃다가 거울을 보니
거울에 웬 늙은 여자가...
세월이 나한테 무슨 짓을 한건지.
내가 세월한테 무슨 짓을 한건가.
암튼 그 남자분도 많이 늙었겠지요. 길에서 부딪쳐도 못 알아보겠지만
그때 그렇게 말해줘서 고맙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