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부시게 작품평인데 정리가 너무 잘된 거 같아서요.
기사 일부만 펌했으니 전문 읽어보심 좋을 듯해요.
https://entertain.v.daum.net/v/20190320154050871?f=m
하지만 그런 남편이 죽은 뒤, 혜자와 아들의 관계는 순탄치 않았다. 아들이 왜 시종 편치 않은 얼굴로 혜자를 대해왔는지를 드라마는 최종회에 이르러 길지 않은 분량을 할애하여 알려준다. 혜자는 어린 아들에게 매정하게 대했다. 사랑하던 남편을 황망하게 보냈으니 혜자도 우울증이 생겼을 것이고, 홀로 아들을 키우기 위해 생계와 가사를 책임지느라 한 치의 여유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장애를 입은 아들을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압박도 컸을 것이다.
치매에 걸린 후 혜자는 아들을 살갑게 대한다. 아빠라고 부르며 도시락을 싸주고, 사람들 앞에서 편을 들고 나선다. 아들은 뒤늦게 다리가 불편한 자신을 위해 엄마가 눈을 치워주었다는 사실을 알고, 그제야 편안한 얼굴로 엄마를 대한다. 여느 드라마였다면 이런 디테일한 갈등과 회복의 서사 없이 혜자와 아들의 관계를 그냥 화목하게 그렸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마는 부모-자식 관계가 그리 단순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늙은 부모에게 느끼는 자식의 감정이 각자 쌓아온 사연만큼 복잡한 결과 두께를 지닐 수 있음을 보여준다.
◆ 거대서사를 끼워 넣는 방식
<눈이 부시게>는 노년을 성찰해보는 보편 서사를 지니지만, 드라마에는 1970년대 사회상과 역사가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다. 한편에서는 미니스커트와 “키스는 해보고 결혼해야겠다”는 개방적인 사고가 존재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야간통행금지와 무단횡단 단속이 있던 1970년 초의 풍속사를 가볍게 그리는가 싶었지만, 우스꽝스럽던 시대상은 결국 준하의 의문사라는 묵직한 이야기로 이어진다. 유신독재 초기에 일간지 사회부 기자 준하는 이유도 없이 경찰서에 끌려갔다가 풀려나지 못한다. 그리고 며칠 후 화장된 유골의 상태로 돌아온다. 드라마 내내 판타지의 신물(神物)처럼 등장하던 시계는 준하의 결혼예물이자, 돌려받지 못한 유품이었다. 놀랍게도 그 시계는 담당 수사관의 손목에 걸려있었다.
이런 에피소드는 1975년 장준하 선생의 의문사를 연상시킨다. 장준하 선생이 산에서 실족사 했다고 진술한 목격자 김용환씨가 장준하 선생의 시계를 손목에 차고 있었다는 기막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물론 극중 준하의 삶은 장준하 선생의 삶과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유신독재 시절에 한 언론인이 당한 의문사와 그의 시계의 행방’ 이라는 모티브를 극에 녹인 것이다. 이는 마치 드라마 속 혜자의 친구에 가수 윤복희를 겹치거나, 단역으로 등장한 중국집 소년에게 이연복 셰프를 연결시키는 것과 비슷하다. 이들의 삶의 궤적이 일치하지 않지만, 그 시대를 대표하는 아이콘을 극 중에 삽입함으로써 시대적 공기와 현실의 맥락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