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십대 중반 미혼 여성입니다.
왠지 어렸을때부터 결혼이 싫었어요.
며느리가 되는 순간 말도 안되는 일들을 강요받게 된다는 생각에서요.
혼자 잘 노는 집순이에요.
학교, 회사 생활 문제 없었고 대인관계 원만했지만 일과가 끝나면 집에서 편히 쉬고 싶어하는 스타일이요.
친구도 좁고 깊게 사귀는 편이구요.
그러다 최근 2년여간 연애를 했는데 참 좋았어요.
저와 회사 동기였고 참 바르고 따뜻하고 다정한 사람이었거든요.
결혼에 대한 거부감이 심했지만 이런 사람과 살면 의지되고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죠.
애초에 전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다고 선언하고 시작한 관계였지만, 남자친구가 결혼해서 아이 낳고 평범하게 사는 삶을 꿈꾸더군요. 뭐 직업이 안정된 30대 중후반의 한국 남자라면 당연한 생각이겠지만요.
그는 그저 결혼해서 남들처럼 애기도 낳고 알콩달콩 살고 싶다는 단순한 마음인것 같았지만..
전 너무나 많은 고민을 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어요.
일단 전 아이를 원하지 않아요. 임신, 출산으로 인한 신체적 고통도 싫고.. 아이가 건강하게 태어날지, 또 자라면서 큰 사고 없이 바르게 자라줄지.. 원하는 삶을 살면서 행복해 할지.. 그런것에 대해 아무런 확신도 없고 평생을 걱정해야 할 내 책임이 되니까요. 물론 낳으면 예쁘기야 하겠죠.. 그렇지만 그 귀엽고 예쁜 나 닮은 아기 모습을 보고 싶어서 낳고자 하는 마음까지는 들지 않는거죠. 남자친구는 그걸 너무 원하고. 종족 번식의 본능이라고 해야할까.. 그렇게 대단한 유전자는 아니더라도 그런 류의 본능이 참 강하더라고요. 그런 본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제가 비주류이지만요.
최근 아기를 둘 낳은 친구 말은 제가 걱정이 너무 많대요.
물론 그런 고민들을 안 할 수는 없겠지만, 아기는 성인이 될 때까지 서포트하면 그 이후는 그들의 몫이라는 거에요.
전 모르겠어요. 그게 그렇게 쿨하게 끊어낼 수 있는 문제일까요.. 평생 걱정하며 살 것 같아요. 물론 대부분은 문제 없이 잘 크고 잘 살겠지만 내가, 또 내 자식만은 예외라고 행복할거라고 장담 할 수는 없는거잖아요.
아이는 한 번 낳으면 절대 돌이킬수 없는 엄청난 선택인데.. 그걸 확률에 맡기고 다 잘될거라고 믿으며 살 자신이 없어요.
사실 전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 고통이다' 라는 생각이 크거든요.
제 인생은 너무나 평탄하고 순조로웠는데도 그런 생각이 들어요.
저라면.. 저에게 태어나기 전 선택권이 주어졌다면 지금 생각으론 태어나지 않고 싶다고 했을거에요.
이런 얘기들을 하면.. 남자친구나 다른 친구들은 너랑 다르게 너의 아이는 태어나고 싶을 수도 있는데 왜 그렇게만 생각하냐고 해요.
대부분은 이렇게까지 생각하고 고민 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2세를 출산하는거겠죠.
이건 정말 인간의 커다란 본능이니까요.
저는 왜 번식의 본능이 없을까요.. 그것도 이상해요.
모든게 정상이고 평범한 부모님 밑에서 사랑받으며 잘 컸는데 말이에요..
남자친구와는 아이 문제에서부터 의견이 맞지 않았어요.
누가 양보할 수도 없는 져줄수도 없는 문제죠.
저를 정말 좋아한다고 했지만 아이를 낳고 싶지 않다는 저와는 결혼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거에요.
저도 그를 많이 좋아했지만 그를 위해서 아이를 낳고 싶은 마음까지 들지는 않구요.
아이 문제도 있었지만.. 그는 가난한 집의 효자 장남이었어요.
그와 결혼해서 남들 하는 것처럼 명절, 제사, 생신, 김장 등등 행사 챙기며 며느리 노릇 할 수 있을까..
그의 부모님이 몇년 뒤 지금보다 더 생활력이 없어졌을때 내가 기꺼이 병원비, 생활비를 대며 억울하지 않을 수 있을까.
지금 있다는 몇억 빚은... 신경쓸것 없다고 상속 포기를 하면 된다는데 정말 그렇게 정리되는 문제일까.
난 그냥 이 남자가 좋아 같이 살고 싶을 뿐인데 이 엄청난 책임과 부담들은 왜 따라오는거지..
그와 사귀면서 참 좋았지만 이런 고민들로 늘 마음 한켠이 무겁더군요.
결국엔 최근 이별하게 되었어요.
우리가 서로 결혼하기로 합의가 되었던 상태라면 이런 사소한 일로 헤어지지 않았을테지만.
그도 알고 저도 아는거죠. 미래가 없는 사이라는걸.
전 원래 정 떼는것을 힘들어 하는 스타일이라 지금 참 괴롭고 힘드네요.
지금도 보고 싶고 당장 전화해서 만나면 그 따뜻한 품에 안기고 싶어요.
늘 그랬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달래주었으면 좋겠구요.
그렇게나 다정하고 따듯한 사람인데..
이런 사람과 살면 참 좋을것 같은데.. 또 이렇게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까요?
좋으면서 저랑 가치관이 맞는 사람이요..
아니면 한국 문화에서는 힘들까요?
허하고 씁쓸한 마음에 긴 넋두리 풀고 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