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news.v.daum.net/v/20180912164800389?f=m
이후 1932년, 조선시대 내내 하나로 연결되어 있던 창덕궁과 종묘가 현재의 율곡로 개통으로 잘리고 마는데, 이러한 도시계획이 조선왕가의 맥을 끊어놓기 위한 행위였다는 주장이 있다. 본래 풍수지리로 보면 한양도성의 주맥이 하나는 삼각산(북한산)~보현봉을 거쳐 백악(북악산) 아래 경복궁으로 흐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보현봉에서 현 성균관대학교 뒷산인 응봉을 거쳐 창덕궁~종묘로 내려와 끝을 맺는다.
이처럼 조선왕조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공간이었던 종묘를 창덕궁·창경궁과 분리시킴으로써 풍수지리상 지맥이 차단되어 결국 종묘가 섬처럼 되고 만 것이다. 물론 이러한 도시계획은 일제강점 초기부터 있었고, 1924년 종로구 동숭동에 경성제국대학이 설립되면서 그 일대의 도시개발로 양쪽을 직선으로 잇는 것에 대한 필요성은 있었지만 순종이 강력하게 반대하여 실행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1926년 순종이 사망하자 총독부는 영친왕을 설득하여 종묘를 잘라내는 도로를 개설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창경궁과 종묘는 육교로 이동할 수 있도록 하였다.
자유게시판
드러낼 수 없는 고민을 풀어보는 속풀이방
창덕궁과 종묘 갈라버린 도로.. 일제의 악랄한 계획
안동 독립운동가저택 뿐 아니라 조회수 : 1,132
작성일 : 2018-09-15 20:49:10
IP : 218.236.xxx.162
1 개의 댓글이 있습니다.
1. 이렇게
'18.9.15 9:44 PM (211.195.xxx.35)한 나라의 얼을 죽이려고 한 나라가 또 있을까요.
요즘 일본보면 인과응보같아요. 그 죄를 어찌 다 용서받을지...
☞ 로그인 후 의견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N